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빠 (문단 편집) ===== [[프랑스군]] 비하 ===== 밀덕 독빠들의 특징이 항상 독일군의 라이벌인 [[프랑스군]]을 비하한다[* 불빠를 제외하면, 밀덕계 전반적으로 프랑스군이 까이는 경향이 있긴 하다. 다만 프랑스군이 까이는 이유는 2차 대전에서의 무기력한 항복 뿐 아니라 이후 베트남과 알제리에서의 독립전쟁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며 패퇴했기 때문이다.]는 것인데, 마치 역사적으로 항상 프랑스군이 독일에게 호구 노릇을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프랑스군이 독일측에 참패한 전쟁은 [[보불전쟁]]과 [[프랑스 침공|2차 대전 초기]] 뿐으로,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프랑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협상국들과 동맹국들이 서로 대등하게 싸웠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나폴레옹 시절에는 아예 독일은 프랑스에게 있어서 주머니 속 동전처럼 굴려지는 존재에 불과했었고 30년 전쟁에서 독일을 수백 개의 소국들로 갈가리 찢어 버려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을 주도하기 이전까지 동네북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프랑스였다. ~~즉 1차대전 프랑스는 그렇지 않지만 2차대전 프랑스는 병신이 맞았다는 뜻이다~~ 1차대전에서 독일을 포함한 각국이 [[참호전]]에 휘말려들어서 갖은 삽질을 했는데, 밀덕 독빠들은 마치 '''프랑스만 참호전에서 삽질을 한 것처럼''' 왜곡을 하고 있다. 애초에 '''[[대체역사|프랑스군만 삽질을 했다면 진작에 독일이 1차대전의 승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호속에서 사이좋게 죽어갔다. 전차가 도입돼서 참호를 돌파할 방법을 찾기 전까지 독일이건 프랑스건 영국이건 철조망과 기관총 사선에 보병들이 돌격해야 했다. 거기에 최초의 전차를 개발한 영국과 최초의 회전포탑을 개발한 프랑스하곤 다르게 성능은 그렇지 않지만 육상전함에 가까운 [[A7V]]의 성능을 1차대전의 티거라고 부르면서 장갑을 왜곡하기도 했다.[* 막상 비유 대상인 티거도 무쌍전차가 아니라 타국의 다른 중전차들과 비교했을 땐 일장일단이 있는 대등한 수준이었다.] 또한 프랑스의 전략을 가지고 까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개전시 알자스-로렌 지방으로 진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역사적으로 독일계 공국들이 다스린 땅이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가 뜯어낸 땅이었다. 이를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가 다시 뜯어낸 것. 그러나 그 사이 이 땅은 상당 부분 프랑스화 되어 있었고(아일랜드 독립 시 영국으로 남은 북아일랜드를 생각하면 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치욕의 증거품이자 독일에게는 전리품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 당시 프랑스 국민이 느낀 치욕과 복수심을 일부 표현(더 자극하는 역할도 하였다)한 작품으로 마지막 수업이 있다. 그만큼 알자스 로렌 지방은 프랑스인에게 있어 잃어버린 땅이자, 회복해야만 하는 실지였다. 더군다나, 이 지방은 프랑스 석탄 및 철광석 생산량의 반 이상을 담당하는 요충지로서, 공업화의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이런 사정을 꿰뚫어본 슐리펜은 일부러 알자스-로렌 지방의 방어선을 깊고 느슨한 종심으로 짜고, 주공을 벨기에-네덜란드로 우회기동하여 프랑스군을 와해시킬 계획을 가졌다. 실제로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원안대로 실행되었다면 프랑스군이 포위되어 보불전쟁의 재현 또한 가능했기에, 전략적이고 승리지향적이기보다는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이며 지극히 정치적인 이러한 프랑스의 행보를 빌미로 까는것. 전부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라면, 독일 또한 똑같은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맹점. 굳이 히틀러까지 가지 않더라도, 1차대전시 독일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독일의 최대 오판이다. [[소 몰트케|독일의 모태였던 땅이자, 장교 및 지주들인 '융커'들의 기반인 오스트프로이센 지방이 러시아의 위협에 노출된다는 이유로, 프랑스 전선에 할당되어야 할 병력을 대거 러시아전선으로 재배치 한것]]. 심지어 벨기에-네덜란드의 주공을 빼서 알자스-로렌 지방의 종심방어선을 더 두텁게 하여 슐리펜 계획을 말아먹었다. 또한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을 정신론에만 입각하고 [[엘랑 비탈]]에 심취한 군대로, 2차대전 당시 [[일본군]]과 비교하며 깐다. 이는 과대한 논리 확장에서 나온 것으로, 정신론을 강조한 프랑스군을 따라한 일본군의 졸전을 프랑스군에까지 적용시켜버린 것이다. 실제 1차대전 원수이자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의 명언인(어린왕자에도 인용되었다) "전투에 이기는 것은 결코 졌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의 정신론은, 2차대전에서 일본군이 채용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공통점만으로 프랑스군 전체를 일본군과 같은 레벨로 생각하는것은 지나친 비약. 비록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펴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참호전의 수렁은 그당시 어떤 군대도 피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전쟁 막바지인 1918년 봄, 동부전선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합쳐 루덴도르프 공세를 펴다가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전선을 돌파하지 못해 멈추었고, 그 여파로 바로 이어진 연합국의 반격인 [[백일 전투]]때 변변히 저항도 못해 보고 결국 항복에 이른것을 보면 독일이 엘랑 비탈에 심취해서 무모했던 프랑스보다 별로 나을 건 없었다. 이렇게 프랑스군을 과도하게 비하하는 경향은 독빠가 주류인 한국 밀덕의 특징이었던데다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 부족도 있었으며, '''나무위키 내의 1차 세계대전 및 프랑스군 관련 몇몇 문서들'''에서 조차 이런 경향이 많이 보였으나 최근에는 1차 대전에 대한 정보가 많아짐에 따라 많이 개선된 편이다. 프랑스는 인구가 개전시 독일 인구의 반을 조금 넘는 60%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축국 주력인 독일 서부군을 끝끝내 막아냈으며, 당연히 승전국의 최고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1차대전의 연합국 최고지분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왜 1차대전 서부전선 총사령관을 프랑스군의 포슈 원수가 맡았는지를 생각해보자. 또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도 비교적 독일에 유화적이었던 영국과 미국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초강경이었던 프랑스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2차대전에서의 졸전에도 불구하고 전후 프랑스가 [[상임이사국]], 독일 본토 점령 등 높은 지위를 얻은 데에 있어 1차대전의 공로가 한몫했다는 시각도 있다.] 물론 독빠들은 ~~2차대전에서 랜드리스를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때문에 진 것이지 프랑스군 때문에 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국이 연합국의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 육군이 유럽 전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것은 전쟁이 끝나는 해인 1918년 봄에 이르러서였다. 오히려 전쟁 준비도 안됐으나 프랑스군의 애원으로 대규모 동원을 하여, 준비도 되지 않은 군대로 독일군을 엄청난 목숨 값으로 붙잡아둔 러시아가 더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이 타격으로 공산혁명이 일어나 망하지만. 동서의 양면전을 치루어낸 독일군은 물론 막강했지만, 1차대전의 승자는 결국 러시아를 제외한 연합국 측이었으며 서부전선의 주력은 프랑스군이었다. 끝물에 참전한 미군, 과다출혈로 도중에 이탈한 러시아군, 전쟁 중반 이후에나 섬에서 본격적으로 기어나온 영국군[* 애초에 영국은 섬나라,그리고 해군을 주로 키운 국가이고 영국은 독일 제국 해군을 상대로는 ~~삽질도 좀 했지만~~ 독일 제국의 숨통을 충분히 막아주며 해야 하는 일은 다 해줬다. 그리고 일단 섬에서 기어나온 이후에는 프랑스 다음가는 주력으로 자리잡았다.]과 달리, 독일의 주력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맞상대한 것이 프랑스군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프랑스군이 독빠들이 말하는대로 비정상적인 군대에 무능하고 약했더라면 전쟁이 4년이나 갈 이유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