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사강목 (문단 편집) == 기타 == > "__渤海不當錄于我史__, 而本爲高勾麗故地, 與我壤界相接, 義關唇齒, 故通鑑備書之, 今從之." > "__발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나__, 본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우리의 국경과 상접하여 의리가 순치지세(唇齒之勢)이므로, 《[[동국통감|통감]]》에서 갖춰 썼기 때문에 이제 그대로 따른다" >---- >'''『동사강목』''' 범례 [[발해]]에 대해서 조선사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득공]]의 《[[발해고]]》와 대비된다. 다만 발해를 두고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는 부당하다"며 한국사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부당하다는 것도 한국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기보다 신라의 삼한일통 이전의 고구려나 백제, 그리고 [[후삼국시대]] [[후고구려]](태봉)나 [[후백제]]처럼 ‘(유교적 도덕적 명분을 두루 갖춘) 정통성이 있는 왕조’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의미가 더 짙다. 마한 멸망 이후 신라의 삼한일통까지 안정복이 삼국(+가야) 전체를 ‘무통’ 즉 정통성 없는 나라로 간주한 이유가 이것이다. 발해의 경우는 견훤처럼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뒤에 [[신라]]로부터 [[대아찬]](5위) 관등을 받는 등 잠깐이나마 신라의 신하국을 자처한 적이 있기도 했고(한때 고구려 부흥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보덕국|보덕국왕]] [[안승]]은 신라로부터 [[소판]](3위) 관등을 받았다).] 발해사에 대한 분량이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이나 [[삼국사절요]]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발해사의 주요 사건들도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및 성경통지와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이나 [[고려사]] 등을 인용해서 시간 순서에 따라 모두 적고 '''발해사의 흐름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신라가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데는 발해의 강성함이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나 [[병자호란]]의 사례를 들어 '''거란의 발해 공격은 중원 공략을 앞두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선행 조치 차원'에서 행한 일종의 [[예방전쟁]]이었다'''는 해석은 현대 한국 사학계의 해석과도 들어맞는다.[* 다만 최근에는 [[병자호란]]을 위해 [[명나라]]를 선제 공격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문왕 때인 [[790년]] 신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북국’이 발해라고 주장한 것도 의외로 '''안정복이 유득공보다 앞선다.''' 따로 '발해국군현고'라는 항목을 두어서 '''발해의 지리 강역 변동에 대한 최초의 총괄적 분석을 시도'''한 것도 동사강목이 최초이다. 동사강목에서 발해를 한국사로 다루지 않던 것이 발해고의 편찬으로 반전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동사강목에서 발해의 역사나 지리에 대한 기록과 자료를 상세하게 수집 조사해 뒀기 때문에 훗날 유득공이 《발해고》를 편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출처: 김종복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발해사 연구 성과'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년] 단재 [[신채호]]가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길에 올랐을 때 갖고 간 '''유일한''' 물건이 동사강목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신채호는 안정복이 '''500년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평생을 역사 한 가지에 노력한 유일한 사학 전문가'''로써 연구의 정밀함은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고 지리지에서의 오류 수정이나 사실 모순의 변증에 가장 공이 많다고 호평하면서도, 초야에 파묻혀 살던 가난한 사람이라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1급 사료를 얻어볼 수가 없어 독단하거나 본인의 추측을 첨부한 것도 있으며, 유학자로서의 한계를 버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왕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면서도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한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기자를 단군, 부여보다 앞세웠다고도 깠다~~.[* 민족주의 사관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온 사람이 한민족 왕조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불편하게 생각해 기록이 날조되었다거나 실은 한민족 계통의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의외로 신채호는 기자를 허구의 인물이라고 부정하거나 실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그가 실존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기자조선의 기록을 일단은 인정한다는 입장이었고, '''"그냥 단군과 비슷한 시기에 기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나라에 왔었구나" 정도로만 보면 된다'''는 것.(출처: 조선사연구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