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딸기 (문단 편집) == 역사 == 재배종 딸기가 나오기 이전에도 ''Fragaria''속 중에는 '[[흰땃딸기]][* 동아시아에는 ''Fragaria yezoensis''([[땃딸기]])와 ''Fragaria nipponica''([[흰땃딸기]])가 있으나 전자는 남한에서 아예 볼 수 없고, 후자는 [[강원도]]에서 극악의 확률로 볼 수 있거나 제주도 한라산에서 [[들쭉나무]]와 좀[[민들레]] 비슷한 빈도로 서식하며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있다. 북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Fragaria vesca'' 종에 속한 야생딸기를 식용해왔다.]나 [[사향딸기]]처럼 먹을만한 야생딸기가 존재했으나, 대부분 극지와 가까운 고위도 지역이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종들이었고 고온에 약했으므로 일반적인 온대 지역에서 인공적으로 키우기 부적합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빨갛고 도톰한 딸기는, 실제로는 발견되고 만들어진 지 [age(1806-01-01)]~[age(1712-01-01)]년밖에 되지 않았다. 현재의 딸기는 다른 식용품들[* 본디 [[쌀]]은 붉은색이었고, [[옥수수]]는 다 자라봐야 어른 손가락만 한 크기였고, [[바나나]]는 [[완두콩]] 크기의 [[씨앗]]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작물이었다. 이 외 여러 현대 인간들의 식용 농작물들 대부분이 원래는 지금과 달랐다. 그것을 오랜 기간동안 우연히 발생한 [[돌연변이]]와 인위적인 [[품종개량]]을 통해 지금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현대 딸기의 시초는 17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의 식물학자 '아메데 프랑수아 프레지에(Amédée-François Frézier)'가 [[칠레]]의 야생 딸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던 것이 그 시초로, 당시 프레지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칠레의 해안가를 뒤지며 야생 딸기 종자를 채집하며 기록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하나 있었으니, 프레지에는 사실 교수나 학자가 아니라 [[프랑스 육군]] 정보국 소속 현역 [[중령]], 즉 '''[[간첩|스파이]]'''였다. 프리지에의 진짜 목적은 칠레를 점거 중이던 [[스페인군]]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딸기를 조사하는 척 하면서 사실 해안가에 설치된 요새와 주둔 병력, 대포의 수와 병참공급 현황 같은 군사정보는 물론이고, [[스페인]] [[총독]]의 근황과 원주민의 움직임까지 정치, 경제, 사회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즉 딸기 조사는 위장으로, 프레지에가 수집한 기록물들은 겉으로는 딸기 관련 정보만 담고 있었으나 비밀리에 스파이 활동으로 수집한 정보들도 군사암호로 같이 수록되어 있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심히 딸기를 조사한 건 실은 정탐 중이었던 것. 프레지에가 이런 활동을 한 까닭은 당시 유럽 왕가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스페인]] 국왕은 [[펠리페 5세]]이고 [[프랑스]] 국왕은 [[루이 14세]]였는데, 펠리페 5세는 사실 루이 14세의 손자[* 이 당시 [[유럽]]은 혈통 보존을 위해 각국의 왕족들끼리 혼인하는 외교성 [[정략결혼]]이 매우 잦았다.]로, 루이 14세는 손자의 왕권을 유지함으로써 스페인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페인과 관련된 정보들을 다방면에서 수집하고 있었고, 이 중 [[칠레]]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프레지에 중령을 파견한 것이었다. 프레지에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714년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리고 [[칠레]]의 해안가 방어 진지를 포함한 군사정보가 담긴 지도를 제작해 루이 14세에게 제출했다. 루이 14세가 프레지에 중령에게 금화 1,000냥을 상금으로 내린 것을 보면 그가 그린 군사지도에 아주 만족했던 모양이다. 이 부분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피소드/2017년#s-44|2017년 11월 5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다. 딱히 연관은 없지만, 프랑스에서는 딸기를 이 사람의 이름과 비슷한 fraise(프레즈)라고 부른다.[* 사실은 [[라틴어]]로 딸기를 의미하는 fragum에서 유래핬다.] 여하튼 스파이 활동을 완수한 프레지에 중령은, 그동안 [[칠레]]에서 꼼꼼히 관찰하고 스케치한 바닷가의 토종 딸기에 관련한 책을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출판한다. 그리고 귀국할 때 함께 가져온 토종딸기 종자를 파리에 심었다. 문제는 칠레에서 가져온 딸기는 빨갛고 예쁜 [[계란]] 크기의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지만 먹을 수는 없는 종자였고, 게다가 [[유럽]]에서는 풍토가 맞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예 열매조차 맺지 못했다. 이 때부터 프레지에를 포함한 유럽의 여러 식물학자가 칠레 딸기와 다른 야생 딸기를 교배시켜 열매를 맺게 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행했는데, 마침내 [[영국]]의 필립 밀러가 [[남미]] 칠레의 야생 딸기와 [[북미]] [[버지니아 주]]의 야생 딸기를 교배시켜 새로운 종자를 얻는 데 성공한다. 이 딸기가 지금 우리가 먹는 재배용 딸기의 원조다. 그리고 품종이 우수한 묘목을 선별해 대량으로 재배를 시작한 것이 1806년 전후다. 그러니 자연에서 자라는 [[산딸기]]가 아닌 재배해서 먹는 딸기의 역사는, 기껏해야 [age(1806-01-01)]년 전후 정도에 불과하다. 참고로 현재의 딸기의 족보에 대해서는 [[흰땃딸기]]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 인공적으로 만든 품종인 서양 딸기, 즉 양딸기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920~30년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딸기가 처음으로 동양에 전해진 것은 19세기 말,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에 관상용으로 처음 전해졌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딸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43년]]에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에서 처음 딸기 재배가 이루어졌으며, 딸기 시배지라고 하여 지역 홍보 효과도 누리고 있다. 참고로 딸기라는 단어 자체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조선]]시대 중엽에 간행된 [[훈몽자회]]다. 물론 이 때 딸기라고 가리킨 대상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산딸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