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랴오중카이 (문단 편집) === [[2차 호법운동]]과 [[영풍함 사건]] === 이후 랴오중카이와 허샹닝 부부는 쑨원의 언론 활동을 보조하면서 혁명 활동을 계속했다. 랴오중카이는 [[5.4운동]] 이후 [[후한민]], 주집신 등과 함께 건설 등 잡지를 창간하고 번역물을 개제하며 민생주의를 주장, 제국주의 침투로 인해 발달하지 못한 중국 실업 발전에 착수하고 구미의 선진과학기술과 생산관리를 학습하며 도로를 건설하여 인민의 이동의 자유와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압박에서 벗어나 세계진보를 향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광동 군정부 내부는 정학회에 반발한 민우사와 익우사 의원들이 이탈하고 쑨원의 [[루룽팅]] 토벌 호소에 민남에 주둔한 광동군벌 [[천중밍]]이 호응하여 월인치월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1920년 루룽팅을 축출하였다. 천중밍은 쑨원과 노선 차이로 그리 친하진 않은 인물이었으나 주집신이 천중밍과 쑨원의 사이를 중재했다. 이때 랴오중카이는 장제스, 주집신과 함께 1920년 4월과 7월 두 차례 천중밍을 만나 광저우로의 진격을 논했고 군자금을 지원했다. 쑨원이 천중밍에게 광동성장, 육군부장, 내무부장 자리 등을 약속하자 천중밍은 1920년 11월 광저우를 점령한 이후 쑨원을 다시 광저우로 초빙했고 쑨원은 1920년 광저우로 돌아와 1921년 4월 민우사 의원들을 중심으로 2차 군정부를 수립하여 비상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랴오중카이는 행정부장, 재정부장 겸 재정차장에 임명되어 쑨원의 북벌 자금을 모집을 도왔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쑨원은 [[돤치루이]], [[장쭤린]]과 연합하여 [[차오쿤]]과 [[우페이푸]]의 [[직예군벌]]을 타도하려 했다. 하지만 천중밍은 쑨원의 북벌이 광동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무모한 일이라고 반대하며 쑨원의 참모장이자 자금책인 등갱을 암살하는 등 강경하게 쑨원의 북벌을 방해했다. 이에 쑨원은 천중밍과의 동맹이 실패했다고 공언하며 천중밍을 광동성장, 내무부장, 월군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북벌을 강행했다. 랴오중카이는 [[왕징웨이]]와 함께 이 결정에 반대하며 천중밍과의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쑨원은 강경했다. 1922년 6월 14일, 천중밍이 랴오중카이에게 자신의 예금을 모두 이체하겠다고 통보하자 랴오중카이는 천중밍을 설득하기 위해 혜주에 있는 천중밍의 사령부를 찾아갔다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감금당했다. 6월 16일, 천중밍은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의 사령부를 공격했고 [[장제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지와 부하들은 쑨원을 저버리고 직예군벌과 협상하여 구국회 회복에 매달렸다. 쑨원은 [[중산(해방함)|영풍함]]을 타고 천중밍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인해 상하이로 퇴각했다. 6월 24일, 허샹닝이 랴오중카이가 감금된 것을 알고 찾아오자 랴오중카이는 자신이 곧 천중밍에게 살해될 것이라면서 작별시를 건네주었다. 천중밍의 부하 홍조린은 허샹닝에게 만약 영풍함이 포격을 중단한다면 다음날 랴오중카이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허샹닝은 이를 거절했다. 8월에 백운산에서 열린 천중밍의 총사령부 회의를 소집하자 허샹닝은 백운산에 직접 찾아가서 천중밍이 쑨원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랴오중카이가 도대체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한 점이 있어서 그를 가두는 것인가?"라고 질책했다. 이에 천중밍은 랴오중카이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날 밤 랴오중카이는 집에 돌아왔다. 랴오중카이 부부는 다음날 새벽, 즉시 상하이로 떠나 8월 21일 쑨원과 합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