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랴오중카이 (문단 편집)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eadlch.png]]|| || 암살된 랴오중카이와 랴오중카이 일가 || 이후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면서 [[장쭤린]], [[돤치루이]], [[펑위샹]]의 연합이 [[우페이푸]]의 [[직예군벌]]을 몰아내고 돤치루이를 임시 집정에 추대하여 임시 집정 정부를 열었다. 펑위샹이 쑨원을 북으로 초청함에 따라 쑨원은 북상선언을 발표, 베이징으로 올라와 돤치루이의 정책을 비난하며 남북통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그도 모르게 앓고 있던 지병인 간암이 악화되어 몸져 눕게 되었다. 이 시기 랴오중카이는 [[국민당의 1차 동정]]에 참여하여 천중밍 토벌에 나서던 중이었다. 1925년 3월 20일, 쑨원이 사망하면서 국민당은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다. 5월 국민당 제1회 3차 중앙전체회의는 중소협정을 높이 사면서 반제투쟁을 주장했지만 국민당 내부의 갈등은 불거지고 있었다. 국공합작 과정에서부터 쑨원의 아들 [[쑨커]]를 비롯하여 [[장쥐]], [[셰츠]], 황계륙 등 국민당 원로들과 [[다이지타오]]를 비롯한 국민당 우익 이론가들은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후한민]] 등도 계급투쟁은 중국에 맞지 않는 방식이라고 비난했다. 쑨원과 랴오중카이 역시 중국에는 프롤레타리아 전정과 급진적 공산혁명이 맞지 않다고 인정했으나 공산당과 소련에 신뢰를 표하며 국공합작에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다이지타오나 후한민 등은 국공합작이 공산당이 국민당을 잠식하려는 술책으로 여겼다. 이런 갈등을 무마하던 쑨원이 사망한 후 국민당은 쑨원의 후계자 자리와 향후 정책을 놓은 정쟁과 국공갈등이 겹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쑨원의 북상을 보좌하며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왕징웨이]]는 자신이 쑨원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으나 다이지타오, 후한민, 랴오중카이 등 역시 왕징웨이에게 못지 않은 세력과 입지를 가지고 있었고 소련에서는 주석인 왕징웨이가 아니라 랴오중카이가 국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라고 판단했다.[* 코민테른 대표 마링의 회고.] 1925년 3월 27일, 대원수 대리 후한민이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 군벌 [[양시민]], 유진환 등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나 이들이 [[1925년 객군 반란|반란]]을 일으키자 랴오중카이는 장제스, 쉬충즈와 함께 이들을 6월 12일 토벌했다. 1925년 6월 14일 대원수 대리 후한민이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를 소집하여 국민정부 설립을 논의했다. 7월 1일, 기존의 대원수부가 폐지되고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는데 [[후한민]], [[왕징웨이]], [[장런제]], [[탄옌카이]] 등 16명이 정부위원에 선출되었고 그 중 왕징웨이가 국민정부 주석에,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에 추대되었다. 대원수 대리였던 후한민은 실질적 업무가 없는 외교부장으로 좌천되었고 공인부, 농민부 등이 설치되어 공산당원들이 상당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국민당 우파의 불만은 가중되었으며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에 앞장섰던 랴오중카이에게 분노가 집중되었다. 그러던 중 1925년 8월 20일, 허샹닝과 함께 출근하던 랴오중카이를 노린 괴한의 총격이 벌어져 랴오중카이에게 적중했다. 보로딘, 장제스, 후한민, 쉬충즈 등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고 랴오중카이는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지고 말았다. 국민당은 애도를 표하며 3일간 반기를 게양하고 전 당원에게 1주일 동안 상장을 달게 함으로 랴오중카이를 애도하게 했다. 허샹닝은 장례가 끝난 후 '정신은 죽지 않았다'라는 큰 현수막을 문 앞에 걸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통한 마음은 다만 당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분발할 것이며 언제가 되어서야 나라를 위하려는 이 마음을 다할 것인가? (...)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나의 온 집안을 송두리째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다. (...)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랴오중카이의 혁명정신을 배우고 힘써 선열들의 뜻을 계승하여 힘껏 나아가야만 한다." 암살 사건의 배후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담평산,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원들은 랴오중카이의 원수를 갚을 것을 호소했고 왕징웨이와 미하일 보로딘 등은 이 사건이 후한민의 사촌동생 후이성, 혁명기념회와 문화당의 지도자 임직면, 주탁문 등의 소행으로 간주하여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다. 또한 외교부장 [[후한민]], 군사부장 [[쉬충즈]] 등에게 관련이 있다는 혐의를 씌워 숙청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광저우 위수사령관에 취임하여 우파 숙청에 활약한 것이 [[장제스]]다.] [[린썬]], [[쩌우루]]를 비롯한 원로들도 화북으로 추방했다. 이에 분노한 [[서산회의파|국민당 우파]]들은 1925년 11월 [[서산회의]]를 개최하여 국공합작 종식을 요구했고 상하이 당부를 접수, 상하이 당중앙을 창설함에 따라 국민당은 둘로 갈라지게 된다. 자세한 것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문서 참조. 이후 허샹닝은 남편의 죽음에 국민당 극좌 노선으로 기울어져 국공합작 노선을 추종했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