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일전쟁 (문단 편집) === 일본 제국 === 일본은 이때 열강인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다른 열강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한반도에 대한 실질적인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번 모험 삼아 걸어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대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카미카제|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나라이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 보여도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뛰어들면 어떻게든 된다." 등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사실 일본군은 이후 전후 복기에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인지했으나 일본의 당시 국력과 기술력이 도저히 단시간 내에 서양 열강을 따라잡지 못 한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사상이 본격화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9%81%BC%E6%9D%B1%E5%8D%8A%E5%B3%B6%E4%B8%8A%E9%99%B8%E8%BB%8D%E7%86%8A%E5%B2%B3%E5%9F%8E%E5%8D%A0%E9%A0%98%E3%81%AE%E5%9B%B3.jpg]] 오른쪽부터 '요동반도 상륙군 웅악성 점령지도'라고 적혀있다 이 전쟁은 또한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고양해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와 같은 삽화가 매 전투마다 수백 장, 수천 장 출판되어서 각 도시와 마을의 중심가에 걸려 모든 국민에게 일본군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지를 상세히 보여주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가를 연주, 녹음하였다. [[군함행진곡(일본)|군함행진곡]], [[눈의 진군]], [[히로세 중좌]]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비록 청일전쟁 시에 작곡되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대규모로 이용되었다.] 일본은 '비유럽 국가 자력의 군대에 의한 유럽 주류 강대국에 대한 첫 승리.' 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으며[* 사실 유럽 강대국도 비유럽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패배를 겪었고 그 중에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등 전쟁 자체를 패배한 사례도 많으므로 첫 승리는 아니다.] 이는 [[대동아 공영권]]으로 이어진다.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서양에게 한 방 먹였으니, 니들은 우리를 도와서 함께 싸워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일본 외에도 열강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중에 일본이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일본의 이런 사상에 잠깐이나마 동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는 실익이었다.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포츠머스 조약에는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배상금 지불 의무가 명시되지 않아 [[배상금]]도 없었고 영토라고 할양받은 [[남사할린]]도 당시로서 큰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고 또 당연히 받아내야 한다고 믿었다. 일본 국민들은 분노가 폭발했고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대표젹인 사건이 [[히비야 방화 사건]]으로 1905년 9월 5일, 일본 도쿄에 위치한 히비야공원에서 일어난 폭동이다. 집회는 러일전쟁에 대한 보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집회 도중 흥분한 민중들이 폭도로 돌변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도들은 내무대신 관저, 어용 신문이었던 고쿠민 신문사, 파출소 등에 불을 질렀다. 다음 날인 9월 6일 일본 정부는 긴급 칙령에 따른 행정 계엄 형태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소동을 진압한 후, 11월 29일 계엄령을 해제했다. 이 사건으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다쳤으며, 2천 명 이상이 검거되고 검거자 중 87명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한편 도쿄대학 '7인의 교수회' 같은 국수주의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30억 엔을 배상하고 연해주 및 캄차카 반도까지 모두 일본에 내놓으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만약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러시아와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포츠머스 조약이 러시아에게 딱히 불리하지 않은 내용으로 체결된 이유가 당시 전황이 일본에도 딱히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일본정부는 불리한 내용은 숨기고 자국에게 유리한 것만 국민들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승전국인데 배상금도 없는 이상한 결과였고, 때문에 루즈벨트가 일본을 속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결과가 폭동으로 이어졌다. 포츠머스 조약의 결과에 대한 불만과 일본 국민들의 불만은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원이 되었다.[*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 세르게이 비테는 러시아에게 큰 불이익 없이 조약을 체결하여 니콜라이 2세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큰 칭찬을 들었을 정도였다. 일본의 폭동은 언론 통제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국의 어려운 사정을 숨긴 일본 정부의 자업자득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에서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열강으로의 인정이었고 이후 일본은 강대국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라고 불릴 정도의 위신을 얻게 된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든 다음 최종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요동]] 등 남만주도 사실상 영향권 내에 편입시켰다. 그당시 일본의 경제규모는 러시아의 30%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러시아가 러일전쟁 전비로 최대 1억 7,100만 파운드 정도 썼는데 일본도 러시아와 거의 비슷한 1억 8,800만 파운드를 지출했다. 그당시 일본정부의 금보유가 1,200만 파운드이고 연간세수가 1,900만 파운드였다. 19개월의 전쟁기간 발행한 엔화 국채는 총 7,200만 파운드, 영국과 미국에 외화국채가 8,200만 파운드. 즉 전비의 83%가 국채로 충당되었다. 그동안 일본의 국방비가 GDP의 16.6%로 치솟고 정부 부채 비율도 무려 40-50% 포인트가 늘어 전후에 일본 정부는 8년치 정부 세입을 넘는 부채를 졌다. 이런 큰 재정적 압박을 받자 일본정부는 이를 상환하기위해 정부지출을 축소하는 긴축재정과 여러 영리사업에 나서서 그 후 10~15년이나 걸려서야 부채 비율을 겨우 회복했다. 1895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대만 섬의 개척에 돈이 많이 드니 외국(프랑스)에 팔자는 주장도 나왔고 그 후에도 대만의 특산수출품인 [[장뇌]]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등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 [[군국주의]]의 발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 육군과 해군의 군사사상은 유연성을 잃은 상태로 경직되었고 이 같은 상태가 40년 뒤인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두고두고 이어졌다. 우선 [[일본군 육군|일본 육군]]은 위의 [[정신력]] [[의지드립|우월주의]]와 함께 봉천 전투, 203고지 전투 등을 겪으면서 [[반자이 어택]] 같은 보병의 [[총검 돌격]]을 통한 [[엘랑 비탈|공세로만 일관된 전술]]에 집착하게 되었다. [[일본 해군]]의 경우 쓰시마 해전의 승리와 같은 예외적인 사례[* 연속적인 교전이 아닌 한 번의 결전으로 적국의 해군력이 무력화된 사태는 세계 해전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힐 만큼 드물다. 서양에서는 쓰시마 해전을 [[트라팔가 해전]] 이후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대사건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유틀란트 해전]]이나 태평양 전쟁 전체에서 진행경과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해군도 상대적으로 열세한 해군을 일거에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다. 문제는 쓰시마 해전 이후 일본해군이 이 이례적인 함대결전을 재현하는 데에만 몰두하며 전략, 전술사상이 교조화되었다는 데에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쓰시마 해전]] 문서 참조.]를 통해서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에 뼛속까지 중독되어 버렸다. 이렇게 [[일본군]]에 박힌 악영향이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다. 러일전쟁하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사이에는 30년의 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유럽,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들이 1차대전의 전훈을 달달 암기만 해서 [[제2차 세계 대전|2차 대전]] 때 이를 경직적으로 복붙한 국가는 일본 이외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나라 군대에서 특정 전쟁을 이리 신화화하고 그 전쟁 전훈을 그 권위적으로 주입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일본 특유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적 사회나 군대 분위기와, 본질적으로 [[강대국]]과 총력전을 벌일 역량이 없는 일본의 국력과 맞물려 영일동맹의 전성기에 전수받은 군사기술,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선진 군사학 유학도 무위로 끝나고 이후에는 오히려 정신력 제일주의로 퇴보하는 모습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할힌골 전투|장고봉 사건/노몬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육군의 대 [[소련]]전 준비는 현실을 도피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이후 일본 육군의 보병조전은 대동아전쟁 종전까지 개정되지 않았다. - 일본 위키백과 [[https://ja.wikipedia.org/wiki/%E6%AD%A9%E5%85%B5%E6%93%8D%E5%85%B8|보병조전 문서]] > 그러나 지대장은 이 자리에 오기 전 육군보병학교의 재료창장으로서 '보병조전'을 편찬하고 오로지 보병을 중시하는 전법을 창도한 터라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에서 저 육탄 전법을 밀고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중략)...나는 오카다의 이 말이 '과달카날전 해명'의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일본군의 전통적인 전법의 잘못을 알아버린 이치키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자살한 것이 아닐까? -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https://books.google.co.kr/books?id=4t9xDQAAQBAJ&pg=PT1018&lpg=PT1018&dq=%EB%B3%B4%EB%B3%91%EC%A1%B0%EC%A0%84&source=bl&ots=AKrARyadet&sig=jMSbejPkVcuKVMZZUJcXJ5N0564&hl=ko&sa=X&ved=0ahUKEwjWu-vP3ajUAhXFHJQKHXlaCbEQ6AEIUTAO#v=onepage&q=%EB%B3%B4%EB%B3%91%EC%A1%B0%EC%A0%84&f=false|#]] > 일본 해군 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 되돌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명백한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 그들 계획의 복잡성과 그들의 가상적(미해군)의 배치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이 그것이다. 비록 전간기 다른 국가의 해군들도 정교한 전술 계획을 준비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일본 해군의 그것은 복잡성 측면에서 타 국가들의 계획을 능가했다. 일본의 계획 입안자들은 그들의 함대가 일련의 복잡한 작전을 완수하기 위한 정확한 시간계획과 함대 운동 조정의 희망사항들에 탐닉했음에 틀림없다. > 게다가 참모 본부의 전술가들은 일본 함대가 자신들의 전술을 전개하는 동안 미 함대는 수동적으로 그들이 예상한 대로 움직인다는 너무나 순진한 가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실상 미 해군의 전열은 일본이 파 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인]]들의 조심성은 일본 함대가 사전에 정확한 위치에 배치되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예를 들어 1930년대 미 해군의 작전 계획은 피켓함들을 함대 중심에서 75~100 마일까지 떨어진 동심원상에 배치하도록 상정하고 있었다. > 오직 소수의 일본 장교들만이 그들의 전략 및 전술 입안과정의 자기기만적 형식주의를 비난했다. 전후 호리 테이키치 제독은 미국을 상대로하는 도상 연습과 계획은 언제나 미 함대가 미리 결정된 가정에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일부 일본의 작전입안자들은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제쳐둔 채 대규모 해상 결전의 성공에 대한 확률에 대하여 거의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 아마도 그들은 [[쓰시마 해전|영광스러웠던 과거처럼 다시 한 번 천운(天運)이 승리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여줄 것이라고 가정했는지도 모른다. - Kaigun: Strategy, Tactics, and Technology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273~280 p, 288 p 번역: [[http://note100.egloos.com/4836531|일 해군의 야전 계획]] > '백발백중의 포 1문은,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이긴다'란, 러일전쟁 종결 후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해산사라고 말했습니다만, 다이쇼 전반기까지 연합함대는 전시 등에 임시로 편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이라는 전시가 종료된 것에 의해 해산되게 된 것입니다....(중략)...토고 사령장관의 말은 일본 해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자군의 전함의 명중정밀도를 올려 백발백중으로 만들면,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명중정밀도는 뒤처지는 적 함대에 이길 수 있다는 의미가 붙게 되었습니다. 즉 전함 척수의 열세는, 훈련으로 보충하면 된다는 결론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월월화수목금금]]'이라는 휴일도 없이 맹훈련을 하는 일본해군의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중략)...이런 요인에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모험이라고 여겨졌던 '토고 턴'을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나온 말은, 정신론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전경험과 냉철한 현상 파악에서 도출된 것이 되지는 않을까요...(중략)...토고 사령장관이 남긴 말의 배후에는, 이렇듯 제대로 된 동맹관계에 의해 지탱되는 기술적 우위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감안하면 토고 사령장관의 말에는 당초 정신적 요소는 없고, 극도로 합리적인 배경에 기반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와 배경에서 나온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말이 나온 배경이 간단히 잊혀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들의 귀에 들어오는 경구로 남아있는 말도, 어쩌면 말한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또한, 이것은 러일전쟁에서 기술적 우위나 동맹관계의 뒷받침에 의해 합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일본 해군이, 그 40년 후 이것들 대신 정신론을 전면에 내세워서 대전쟁을 수행하다가 패배한 것과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해군은, [[함대결전사상|'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 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된다. 이리하여 해군은 자신들의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 그 주적은 전함이었습니다만, 미드웨이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아,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태평양전쟁에 있어서 항공운용의 실상, 운용이론과 실제 운용의 차이' [[http://www.nids.mod.go.jp/publication/senshi/201203.html|#]] 의 저자 유라 후지오가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날개회]]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http://www.tsubasakai.org/Senshi_Kiji_283HP_000.htm|#]] [[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31186|번역]] [[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739611|번역]] ]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 같은 경우는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점으로 근대 일본이 차츰 맛이 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시바 료타로는 <이 나라의 형태(この国のかたち)>[* 직설적으로 번역해서 ''''이 나라의 꼬라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라는 글에서 쇼와 시대를 '귀태(鬼胎)"의 시대' 즉 일본사에서도 특이한 '비연속의 시대'라고 평했으며[* 즉, 뭔가 잘못돼서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그 전의 다른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서술했음에도 불과하고 오직 쇼와의 이 시기만큼은 "귀태"라는 단 한 마디로 어물쩍, 일본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본 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귀태의 시대의 시작이 러일전쟁의 승리에 있었다고 했다. 러일전쟁 직후에 일본은 해군을 축소하고 주변국과 협조하면서 국가를 발전시켰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러일전쟁의 승리라는 것도 미국이 개입해서 배상금도 못 받고 영토 할양이라고 받은 것도 별 볼일 없었던 말 그대로 '피로스의 승리'였을 뿐인데도 그 실상을 일본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비뚤어진 애국심[* 시바의 표현으로는 내셔널리즘이다. 시바는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을 내셔널리즘(비뚤어진 애국심)과 패트리어티즘(애국심)으로 구분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내셔널리즘은 그저 집안 자랑이나 하고, 다른 집안을 업신여기고 깔본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쩌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계속 존경받을 수 있는 집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감정을 국가적 규모로 행하는 것이 내셔널리즘과 패트리어티즘이라는 것이 시바의 설명이다.]만 자극하여 [[태평양 전쟁]] 때에도 똑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다가 패망했다는 지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