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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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러시아어: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일본어: 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
영어: Russo-Japanese War

파일:러일전쟁의 전개.jpg

러일전쟁의 전개도.
기간
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실질적)[1]
장소
대한제국, 청나라 만주 남부[2], 요동, 동해, 사할린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포츠머스 조약 체결
영향
청나라의 만주지방 수복
피의 일요일 사건 발발
러시아 제국의 멸망 가속화
을사조약 체결
교전국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제국
파일:몬테네그로 공국 국기.svg 몬테네그로 공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러시아 국기.svg 니콜라이 2세
파일:러시아 국기.svg 알렉세이 쿠로팟킨
파일:러시아 국기.svg 스테판 마카로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파일:러시아 국기.svg 로버트 비렌
파일:러시아 국기.svg 아나톨리 미하일로바치 스테셀
파일:러시아 국기.svg 빌헬름 비트게프트
파일:러시아 국기.svg 예브게니 이바노바치 알렉세예프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메이지 덴노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오야마 이와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도고 헤이하치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노기 마레스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가쓰라 다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고다마 겐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구로키 다메모토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오쿠 야스카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이토 스케유키
병력
1,365,000명
제1, 2태평양함대
발트함대
1,200,000명
연합함대
피해 규모
52,623명 전사
18,830명 병사
146,032명 부상
74,369명 포로
전함 8척 침몰
전함 2척 나포
58,576~58,900명 전사
21,802~27,200명 병사
157,432명 부상
전함 2척 침몰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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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일전쟁 풍자화 컬러.jpg
파일:일본과 러시아에 압사당하는 한국.jpg
러일전쟁 풍자화[3]

1. 개요
2. 배경
5. 러시아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 원인
6. 영향
6.1. 러시아 제국
6.2. 일본 제국
6.3. 대한제국
6.3.1. 일부 한국인의 교전 참여
6.4.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
7. 여담
8. 관련 문서
8.1. 관련 사건
8.2. 관련 인물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러일전쟁 러시아화.jpg


파일:러일전쟁 일본화.jpg


우리대한제국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1901년 니콜라이 2세독일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4]

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皇国の興廃この一戦にあ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

도고 헤이하치로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대한제국, 만주와 인근 해역에서 벌인 전쟁.

영어: Russo-Japanese War

러시아어: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루스코-이폰스카야 바이나)

일본어: 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니치로 센소)

전쟁 초기에는 열강들이 대체적으로 러시아의 승리를 예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인해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을 강제당하고, 5년 후에 결국 멸망하여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 배경[편집]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 2억 냥이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 영토까지 할양해야 했는데 그중에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했다. 부동항으로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자, 일본의 세력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러시아는 독일 제국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을 반환하도록 압박했다.[5]

이를 주시하던 조선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와 외교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청일전쟁으로 경복궁을 점령했던 일본이 세운 친일내각을 실각시키고 친러파가 대두한다. 이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조선 조정에 다시 친일 내각을 집권시킨다.

1896년 2월 고종아관파천으로 일본이 세운 친일내각을 몰아내고 다시 친러내각을 수립하자 일본은 러시아와 줄곧 협상을 벌였다.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6] 1896년 6월의 러청 비밀협정[7], 그리고 3일 뒤 야마가타는 39도선에서 한국을 분할하자고 제안했으나 로바노프외상는 반대하였고, 대신 비밀조항에서 소요 시 양국 군대를 파견할 수 있고 충돌을 막기 위해 중립지대를 설정할 수 있다는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를 채택하였다.[8] 이 사이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하였고 러시아는 1898년 3월, 청나라에게서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다롄을 조차 받아 이곳을 포트 아르투르로 칭하며 해군 기지 및 요새를 건설한다.[9] 이후 한반도 방면에 자원을 투입할 여유가 사라진 러시아가 일본에게 한발 양보하여 성립한 것이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맺어진 로젠-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양국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내정 간섭을 자제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상업 관계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 경제권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10]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는 150,000명의 대군을 만주로 보내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 및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가졌고, 특히 만주에서 중국과 무역거래를 원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11] 러시아는 일시 만주 철군을 발표했으나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망명하고 조선 정부에 친러내각이 집권하는 등 러시아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철회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대립이 심화되면서도 정작 러시아는 충분한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일례로 뤼순 요새도 선전만 난공불락이었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당시 구축한 중국제 요새를 수복하고 약간 강화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상당 부분이 미완성이라 무늬만 요새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으며 수송능력도 매우 낮았다. 결정적으로 바이칼 호 근방 노선의 경우 호수 자체의 거대한 크기와 근방 지역의 절벽을 포함한 험준한 지형 덕분에 수십 km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유사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다. 덕분에 나중에 가면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12] 물자 문제도 심각해서 석탄, 식량, 탄환[13],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는 군대를 팽창시키긴 했으나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인 극동 지역은 모든 게 부족한 상태였다. 항구의 경우 전함을 수리하기조차 어려웠다.

니콜라이 2세가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을 보면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일본에 내주면 만주와 연해주가 위협받는다는 로젠의 의견에 따라 전쟁 시 철군 계획을 철회하고, 1903년 압록강 국경지대의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일본과 영국의 반대로 철폐한다.

1903년 8월 12일 주러공사 쿠리노 신이치로(粟野愼一郞)가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일본 세력하에 둘 것을 요구하고,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권한을 철도경영에 한정시키려고 하였다. 10월 3일 대안에서 러시아정부는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일본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한반도와 만주를 분할하고 남북 각 50km의 중립지대를 설정할 것을 제의하였고 이러한 러·일간의 교섭은 1904년초까지 계속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세밀히 관찰해서,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군이 약 100,000명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 데도 40여 일이나 걸렸다.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고작 100,000명 정도였는데 반해 일본군은 약 250,000명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했지만 7,000km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반면 일본은 무엇보다 전장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며, 1904년 1월 21일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군대를 상륙하고 이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요충지를 차지했다.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하였다.

일본은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과 아시아주의 라는 이념무장, 만주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다. 러시아가 전쟁준비가 안 된 것을 간파한 일본은 1904년 2월에 전쟁을 시작하였다.


3. 과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러일전쟁/과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포츠머스 조약[편집]


전쟁 중에 미국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나서서 중재했다. 이 중재를 통해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러시아와 일본 모두 전쟁을 계속했다간 재정이 파탄나게 생길 것이기 때문에 반 강제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종전 협정이 열렸던 포츠머스에서는 매년 포츠머스 조약체결일에 축제를 여는데, 자신들이 중재하여 전쟁을 멈추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평화'의 결과로 한반도는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 만에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지극히 열강에 치우친 발상이다.[14]

포츠머스 조약 협상에서 일본 측 대표였던 고무라 주타로 전권대사는 자신들이 승리했으므로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 측 대표였던 비테는 지금 국내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뿐이지,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며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맞섰다.

발언의 가부를 일일이 밝혀보자면 아래와 같다.

  • 우선 뤼순 요새의 함락으로 러시아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사실 일본군의 타격도 그에 못지않았다. 뤼순을 공략하면서 일본군은 병력을 무려 3만 명이나 잃었기 때문이다. 개전 당시 일본이 확보한 군대는 20만에 불과했는데 그중 15%에 가까운 전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점점 확대되었고, 봉천전투에서 약 7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군도 상당한 출혈을 강요받았다. 러시아 제국군도 많은 손실을 입었고, 시베리안 철도로 병력수송, 보급한다는 계획은 무산으로 돌아간지 오래이기에 유럽 전선의 병력을 수송하기엔 턱없이 무리였을뿐더러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전장이 격화되던 시점에선 유럽전선의 병력의 수를 아득히 넘은게 만주전역 러시아군의 병력수다.

  • 만주에서의 전쟁은 겉으로 보면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보다 단지 격전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나는 양상에 가까웠으며 일본군 역시 지속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최대한 활용해서 유럽에 주둔 중인 주력 병력을 수송하고 만주 일대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병력은 이를 위한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15]. 애초에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철도 타고 여유롭게 뒤로 빠지면 이를 추격할 여건이 전혀 안 되는 일본군은 무작정 추격하다간 자멸하거나 반격당해서 괴멸되는 관계로 뒤를 도모해야 하는, 전혀 우선권이 없는 행동밖에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러시아군의 기본 작전술이 빠르게 후퇴한 뒤에 따라오면서 힘이 빠진 적을 친다는 전략이니 대륙전을 해본 적이 없는 일본군이 그걸 따라갈 수 없었다.[16]

그 후 러시아군이 집결하자 일본군이 이를 공격한 봉천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그러나 전면 수세 방어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러시아군에 대한 포위 계획은 결국 러시아군의 신속한 퇴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31만 러시아군과 25만 일본군이 맞붙었던 봉천전투는 러시아군 9만에(개중 2만 명은 미처 퇴각하지 못한 포로) 일본군 7만 5천이라는 사상자 숫자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으며, 일본군으로서도 역시 더 이상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할 명분이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봉천을 격퇴시키며 발트 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하였지만 인명 피해는 일본 측이 더 컸던 것이다.
러시아군은 비록 스스로 봉천 전투에서 물러난 것을 전투의 패배로 인식하였고 쓰시마전투 이후로 독선적인 니콜라이 2세조차 전쟁에서 패하였음을 시인하고 미국 중재하의 종전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지속적인 병력 수송으로 최대 40만까지 북만주로 이동시켜 추후 공세를 노리나 이는 일본의 속전속결 공세로 애써 요세화시킨 만주전역을 빼앗겨 공든탑이 무너졋기에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며, 이전에 겪었던 몇 차례의 육전 패배와 짙어진 패색으로 일어난 민중소요 때문에 강력한 공세로 나서지는 못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신속한 철도개설과 여러 갈래의 보급선 확보 등 보급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적인 국력 부족으로 인해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그 결과 식량 공급도 부족했고 방한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일본군은 만주의 추위에 떨며 주먹밥으로 연명하느라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었다.[17] 이렇게 너무 춥다보니 유행한 노래가 눈의 진군이다 [18]

  • 일본의 재정도 이미 파탄 상태였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국채를 발행했지만 그 액수가 너무 늘어나자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이나 우호국이었던 미국도 더이상의 매입을 거부하게 되어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당시 일본의 1년 세입이 2억 엔에 못 미쳤는데 러일전쟁 총전비는 이미 19억 8,400만 엔에 육박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의 사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러일 전쟁이 있었던 1905년 총군사비 / GDP가 23.69%......여기서 12억 엔을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긴 했지만 만약 1~2개월만 더 전쟁이 지속되거나 러시아가 일본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론으로 나간다면 일본은 국가 파산에 처할 위기였다. 물론 러시아도 만만찮은 전비를 지출하여 파산 위기에 있었으므로 피차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휴전 협상에서 일본은 반드시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러시아 전권대사 세르게이 비테[19]배상금 지불을 강력히 거부했다. 일본 전권대사 고무라는 어떤 식으로든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으나 국제여론에게 돈만 밝히는 신흥열강이란 이미지를 우려한 일본 정부는 모든 상황을 재점검한 후 도저히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협정을 진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협정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결국 일본은 최우선 목표인 한반도 영유후 다음 목적으로 요구했던 사할린 전체 할양도 남사할린 할양으로, 하얼빈-여순의 동청절도 이득권도 장춘-여순선의 권리 획득으로 바꿔 전쟁발단의 목표에는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이권을 획득했다.

  • 당시 러시아가 전쟁 수행 의지를 잃어버리고 휴전협정에 나선 것은, 연전연패로 인한 사기 하락으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이 고갈되었고 여기에 일본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도 큰 이유로 작용했으며 전략의 미흡함으로 인해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중에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도 들 수 있다. 러시아에 있던 주러 일본 공사관은 유럽의 공산주의 혁명가과 좌익분자들과 접촉해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고 선동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 러일전쟁의 패배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이미 유럽은 자유주의 열풍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불만이 터져나왔다. [20][21][22]
그리고 1903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 사건, 상세히 설명하면 한 어린 소녀가 강간되어 임신당한 사건을 단지 소문으로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게 퍼지면서 유대교 회당을 비롯하여 유대인이라는 게 드러나면 사람들이 그냥 죽였다. 그런데 그 사건이 소녀의 친척이 저지른 걸로 드러났음에도 학살은 멈추지 않았고 이 와중에 수천에서 수만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및 폴란드 소수민족들이 학살 및 약탈, 강간을 당했고 결국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고, 이를 갈던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유대인 부호 제이콥 쉬프가 일본을 강하게 지지하여 하루만에 500만 파운드의 공채를 맡아줬고, 공채 2억 달러도 융자해줘 일본을 강력하게 자금 지원했다. 이에 쉬프는 1906년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쉬프는 제정 러시아를 격렬하게 증오하여 1차 대전 때도 협상국 중 유독 제정 러시아에 대해서만은 자금지원을 하지 않았고, 볼셰비키에게 자금 지원을 해줬다.

어쨌든 러시아나 일본이나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휴전협정에 비교적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23]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만 파악하고 있었을 뿐, 국민들에게는 일본군의 승리만이 선전되었으므로 막대한 배상금은 물론이고 당시 일본의 일각에서는 배상금뿐만 아니라 연해주캄차카 반도도 할양받자는 일본인들은 포츠머스 협정 내용에 빡쳐서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히비야 방화 사건 같은 반정부 폭동까지 일어났다. 당시 일본 측 대표는 일본 정부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몰려서 경호를 붙여야 하는 지경이었다. 또한 휴전협정을 주선한 미국에 대한 비난도 이어져 강렬한 반미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대해서 미국 언론에서도 일본 측의 황당무계한 행동을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5. 러시아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 원인[편집]


일본군은 러일전쟁 발발 이틀 전인 2월 6일 부산, 마산, 울산 등지에 상륙해 대한제국 내 항구들을 선점하였고 대한제국 전신국을 점령하고 근해에 정박 중인 러시아 상선을 나포하는 등 철저히 전쟁 초기 기습이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인천과 뤼순의 기습 성공으로 인천항과 서울을 장악하고 뤼순항에서 러시아 해군을 일정기간 고립시켰다.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난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부 러시아에서 지원이 오려면 무려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한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 본인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간 벌인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다가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어떻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크로파토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봉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면서 그저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해 후퇴시키기만 했다. 이러는 동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이 문제가 되었다.[24] 앞선 청일전쟁이야 상대가 상대였으니만큼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의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좀 달랐고, 훗날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덕분에 전쟁은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어도 함대를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은 있었다.

가장 유능했던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 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며,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 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살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의 행동은 소극적이기만 했다. 그동안 일본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 러시아군을 압박했다.

지독한 뤼순 공방전 이후, 1905년 뤼순까지 내주고, 봉천전투 패전으로 패색이 짙어지던 러시아는 국내외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고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고 온 발트 함대는 이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25]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게 전멸되었고,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며 전쟁을 끝내게 된다.

러시아의 패배 요인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에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병참과 후방 기지 역할을 하는 한반도 지역을 습격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고, 일본군과의 전투도 방어만 하다가 불리하면 철수하는 식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만 임했다. 물론 이를 두고 일본군을 유인하려는 전술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문제는 그렇게 후퇴만 거듭하다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본국에서 반전 여론이 일어나 결국 전쟁 자체를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26].

러일전쟁 내내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보급이나 병참을 끊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당시 러시아의 세력권이던 만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한반도 내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또한 러시아군은 일본군과의 교전 내내 수동적인 방어전으로만 일관했으며,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거나 하는 식의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아울러 러일전쟁의 주무대인 만주에 주둔 중이던 러시아군은 고작 수가 8만 명 내외였고, 그래서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20만 명 가량의 일본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독일 국경에 주둔 중인 100만 명 가량의 주력 부대를 보내지 않고 새로 모병한 병사들 40만 명을 훈련시키느라 바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러시아 본국인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에서 머나먼 극동인 만주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맡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일전쟁이 벌어지던 1904년에는 아직 완공조차 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러시아는 일본보다 많은 병력을 극동으로 보내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심지어 전쟁 무렵 러시아군 병사들은 사용할 총탄조차 무려 2800만 발이나 모자랐을 만큼 물자가 부족했다. 반면 일본은 전장인 만주와 본국의 거리가 러시아보다 상대적으로 가까웠는데다, 전쟁 초기부터 제해권을 잡았기 때문에 배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면 되는 상황이라 보급이 수월했다. 또한 교통 이전에 러불동맹의 존재로 동맹국인 프랑스가 러시아의 주전력이 동아시아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반대했다.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도에서 빚어진 차이도 있었다. 러일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군은 일반 병사들 중 상당수를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로 충당했다. 헌데 이들 중 많은 수는 러시아의 전제정치에 불만을 품은 정치범들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왜 머나먼 극동에 가서 싸우다 죽어야 하느냐?"는 불만을 품었고 따라서 사기 또한 낮았다. 한 예로 러시아 발틱 함대의 수병들은 러시아 본토에서 극동으로 가는 사이에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만큼 군기가 엉망진창이었고, 지휘관들도 이 수병들을 가리켜 "똑같은 명령을 5번이나 계속해서 전달해야 겨우 알아 듣는다."라고 한탄했을 만큼 훈련도도 낮았다.

반면 일본군은 러시아군보다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도가 높았고, 그래서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대부분 우세를 점유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지면 일본은 망하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온 나라가 총력전 체제에 들어갔으며, 러시아군의 진지나 요새를 상대로 한 뤼순 공방전 같은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계속 추가로 병력을 보내는 식의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여 러일전쟁 내내 시종일관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또한 전쟁 중 일본은 러시아 내 좌익 및 공산주의자들에게 거금을 주어 피의 일요일 사건 일어나도록 도왔다. 이는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국제적인 외교 상황도 러시아에 불리했다. 러일전쟁 내내 러시아는 국제 외교에서 고립된 상태였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영국과 그에 버금가는 강대국인 미국은 잠재적 적국인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일본한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영국과 미국은 언론을 통해 일본을 찬양하고 러시아를 폄하하는 식으로 여론전을 폈으며[27],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에 자금을 지원하려 하자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만약 당신들이 러시아를 돕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압박을 넣어 중단시켰다.

6. 영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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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러시아 제국[편집]


러시아 제국은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부코베츠키(А. И. Буковецкий(2006))의 계산에 따르면, 대일 전쟁의 직접 지출액만 23억 4,690만 루블에 달했다. 여기에 간접지출(전투행위로 인한 파괴, 채무이행, 유족 및 상이자 보상금)까지 고려하면 총지출액은 30-4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으며, 여기에 만일 볼셰비키의 혁명으로 채권이 무효화되지 않았을 경우 1950년까지 지출해야 할 총액은 90-10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참고로 1904년 러시아 제국 세입이 20억 1,800만 루블이었으니 5년치 세금을 지불해야 할 판이었다.

다만 경제적 손실은 당시 재무장관이던 블라디미르 코콥초프가 프랑스에 대규모 차관을 받아내는데 성공함으로서 급한 불을 끈다.[28]

그러나 경제적 손실보다 끔찍한 것은 군사적 손실이었다. 러시아는 대일전쟁에서 29만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포로 7만 4천을 제외해도 21만 6천 명의 병력 손실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러시아가 자랑하던 발트함대와 태평양함대의 전멸이었다. 러시아의 해군력은 세계 3위에서 6위로 추락했다.[29] 한때는 태평양까지 넘보던 러시아 해군이었지만, 러일전쟁 직후에는 독일을 상대로 발트해 연안을 지키는 것으로 대외전략을 전면 수정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타격.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대립하고, 국내의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격화하는 시점에서 대일전쟁 패배는 반황실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패전한 러시아 제국은 1905년 혁명이란 대격변을 겪었으며, 국민들은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마지막 기대와 신뢰를 거두었다.

세계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패배를 생각하고 거문도를 점령해 해군기지화 하는 등 러시아군과 맞설 계획을 하고 있던 영국은 1세기간 이어졌던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했다. 이는 영러 협상으로 이어져 러불 동맹, 영불 협상과 함께 유럽 대륙에서 삼국협상이 탄생하고 이에 대응한 삼국 동맹이 상호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

또한 10년 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어 세계 공산화에 큰 족적을 남긴 소련 탄생의 배경도 됐다. 러시아 제국은 삼국 협상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붕괴와 식량난을 견디지 못한 러시아인들의 분노로 붕괴되고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들어서게 되고, 1945년 만주 작전으로 러일전쟁의 굴욕을 되갚아주게 된다.


6.2. 일본 제국[편집]


일본은 이때 열강인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다른 열강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한반도에 대한 실질적인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번 모험 삼아 걸어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대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나라이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 보여도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뛰어들면 어떻게든 된다." 등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사실 일본군은 이후 전후 복기에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인지했으나 일본의 당시 국력과 기술력이 도저히 단시간 내에 서양 열강을 따라잡지 못 한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정신력으로 버틴다는 사상이 본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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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요동반도 상륙군 웅악성 점령지도'라고 적혀있다

이 전쟁은 또한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고양해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와 같은 삽화가 매 전투마다 수백 장, 수천 장 출판되어서 각 도시와 마을의 중심가에 걸려 모든 국민에게 일본군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지를 상세히 보여주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가를 연주, 녹음하였다. 군함행진곡, 눈의 진군, 히로세 중좌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30]

일본은 '비유럽 국가 자력의 군대에 의한 유럽 주류 강대국에 대한 첫 승리.' 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으며[31] 이는 대동아 공영권으로 이어진다.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서양에게 한 방 먹였으니, 니들은 우리를 도와서 함께 싸워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일본 외에도 열강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각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중에 일본이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일본의 이런 사상에 잠깐이나마 동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제는 실익이었다.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포츠머스 조약에는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배상금 지불 의무가 명시되지 않아 배상금도 없었고 영토라고 할양받은 남사할린도 당시로서 큰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고 또 당연히 받아내야 한다고 믿었다. 일본 국민들은 분노가 폭발했고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대표젹인 사건이 히비야 방화 사건으로 1905년 9월 5일, 일본 도쿄에 위치한 히비야공원에서 일어난 폭동이다. 집회는 러일전쟁에 대한 보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집회 도중 흥분한 민중들이 폭도로 돌변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도들은 내무대신 관저, 어용 신문이었던 고쿠민 신문사, 파출소 등에 불을 질렀다. 다음 날인 9월 6일 일본 정부는 긴급 칙령에 따른 행정 계엄 형태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소동을 진압한 후, 11월 29일 계엄령을 해제했다. 이 사건으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다쳤으며, 2천 명 이상이 검거되고 검거자 중 87명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한편 도쿄대학 '7인의 교수회' 같은 국수주의 지식인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30억 엔을 배상하고 연해주 및 캄차카 반도까지 모두 일본에 내놓으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만약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러시아와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포츠머스 조약이 러시아에게 딱히 불리하지 않은 내용으로 체결된 이유가 당시 전황이 일본에도 딱히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일본정부는 불리한 내용은 숨기고 자국에게 유리한 것만 국민들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승전국인데 배상금도 없는 이상한 결과였고, 때문에 루즈벨트가 일본을 속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결과가 폭동으로 이어졌다.

포츠머스 조약의 결과에 대한 불만과 일본 국민들의 불만은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원이 되었다.[32]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에서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열강으로의 인정이었고 이후 일본은 강대국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라고 불릴 정도의 위신을 얻게 된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든 다음 최종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요동 등 남만주도 사실상 영향권 내에 편입시켰다.

그당시 일본의 경제규모는 러시아의 30%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러시아가 러일전쟁 전비로 최대 1억 7,100만 파운드 정도 썼는데 일본도 러시아와 거의 비슷한 1억 8,800만 파운드를 지출했다. 그당시 일본정부의 금보유가 1,200만 파운드이고 연간세수가 1,900만 파운드였다. 19개월의 전쟁기간 발행한 엔화 국채는 총 7,200만 파운드, 영국과 미국에 외화국채가 8,200만 파운드. 즉 전비의 83%가 국채로 충당되었다. 그동안 일본의 국방비가 GDP의 16.6%로 치솟고 정부 부채 비율도 무려 40-50% 포인트가 늘어 전후에 일본 정부는 8년치 정부 세입을 넘는 부채를 졌다. 이런 큰 재정적 압박을 받자 일본정부는 이를 상환하기위해 정부지출을 축소하는 긴축재정과 여러 영리사업에 나서서 그 후 10~15년이나 걸려서야 부채 비율을 겨우 회복했다. 1895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대만 섬의 개척에 돈이 많이 드니 외국(프랑스)에 팔자는 주장도 나왔고 그 후에도 대만의 특산수출품인 장뇌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등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

군국주의의 발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 육군과 해군의 군사사상은 유연성을 잃은 상태로 경직되었고 이 같은 상태가 40년 뒤인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두고두고 이어졌다. 우선 일본 육군은 위의 정신력 우월주의와 함께 봉천 전투, 203고지 전투 등을 겪으면서 반자이 어택 같은 보병의 총검 돌격을 통한 공세로만 일관된 전술에 집착하게 되었다. 일본 해군의 경우 쓰시마 해전의 승리와 같은 예외적인 사례[33]를 통해서 함대결전사상점감요격작전에 뼛속까지 중독되어 버렸다.

이렇게 일본군에 박힌 악영향이 이후 중일전쟁태평양 전쟁 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다. 러일전쟁하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사이에는 30년의 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유럽,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들이 1차대전의 전훈을 달달 암기만 해서 2차 대전 때 이를 경직적으로 복붙한 국가는 일본 이외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나라 군대에서 특정 전쟁을 이리 신화화하고 그 전쟁 전훈을 그 권위적으로 주입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일본 특유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적 사회나 군대 분위기와, 본질적으로 강대국과 총력전을 벌일 역량이 없는 일본의 국력과 맞물려 영일동맹의 전성기에 전수받은 군사기술,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선진 군사학 유학도 무위로 끝나고 이후에는 오히려 정신력 제일주의로 퇴보하는 모습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고봉 사건/노몬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육군의 대 소련전 준비는 현실을 도피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이후 일본 육군의 보병조전은 대동아전쟁 종전까지 개정되지 않았다. - 일본 위키백과 보병조전 문서


그러나 지대장은 이 자리에 오기 전 육군보병학교의 재료창장으로서 '보병조전'을 편찬하고 오로지 보병을 중시하는 전법을 창도한 터라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에서 저 육탄 전법을 밀고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중략)...나는 오카다의 이 말이 '과달카날전 해명'의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일본군의 전통적인 전법의 잘못을 알아버린 이치키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자살한 것이 아닐까? -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


일본 해군 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 되돌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명백한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 계획의 복잡성과 그들의 가상적(미해군)의 배치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이 그것이다. 비록 전간기 다른 국가의 해군들도 정교한 전술 계획을 준비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일본 해군의 그것은 복잡성 측면에서 타 국가들의 계획을 능가했다. 일본의 계획 입안자들은 그들의 함대가 일련의 복잡한 작전을 완수하기 위한 정확한 시간계획과 함대 운동 조정의 희망사항들에 탐닉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참모 본부의 전술가들은 일본 함대가 자신들의 전술을 전개하는 동안 미 함대는 수동적으로 그들이 예상한 대로 움직인다는 너무나 순진한 가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실상 미 해군의 전열은 일본이 파 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인들의 조심성은 일본 함대가 사전에 정확한 위치에 배치되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예를 들어 1930년대 미 해군의 작전 계획은 피켓함들을 함대 중심에서 75~100 마일까지 떨어진 동심원상에 배치하도록 상정하고 있었다.

오직 소수의 일본 장교들만이 그들의 전략 및 전술 입안과정의 자기기만적 형식주의를 비난했다. 전후 호리 테이키치 제독은 미국을 상대로하는 도상 연습과 계획은 언제나 미 함대가 미리 결정된 가정에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일부 일본의 작전입안자들은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제쳐둔 채 대규모 해상 결전의 성공에 대한 확률에 대하여 거의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영광스러웠던 과거처럼 다시 한 번 천운(天運)이 승리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여줄 것이라고 가정했는지도 모른다. - Kaigun: Strategy, Tactics, and Technology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273~280 p, 288 p 번역: 일 해군의 야전 계획


'백발백중의 포 1문은,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이긴다'란, 러일전쟁 종결 후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해산사라고 말했습니다만, 다이쇼 전반기까지 연합함대는 전시 등에 임시로 편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이라는 전시가 종료된 것에 의해 해산되게 된 것입니다....(중략)...토고 사령장관의 말은 일본 해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자군의 전함의 명중정밀도를 올려 백발백중으로 만들면,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명중정밀도는 뒤처지는 적 함대에 이길 수 있다는 의미가 붙게 되었습니다. 즉 전함 척수의 열세는, 훈련으로 보충하면 된다는 결론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월월화수목금금'이라는 휴일도 없이 맹훈련을 하는 일본해군의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중략)...이런 요인에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모험이라고 여겨졌던 '토고 턴'을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나온 말은, 정신론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전경험과 냉철한 현상 파악에서 도출된 것이 되지는 않을까요...(중략)...토고 사령장관이 남긴 말의 배후에는, 이렇듯 제대로 된 동맹관계에 의해 지탱되는 기술적 우위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감안하면 토고 사령장관의 말에는 당초 정신적 요소는 없고, 극도로 합리적인 배경에 기반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와 배경에서 나온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말이 나온 배경이 간단히 잊혀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들의 귀에 들어오는 경구로 남아있는 말도, 어쩌면 말한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또한, 이것은 러일전쟁에서 기술적 우위나 동맹관계의 뒷받침에 의해 합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일본 해군이, 그 40년 후 이것들 대신 정신론을 전면에 내세워서 대전쟁을 수행하다가 패배한 것과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 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된다. 이리하여 해군은 자신들의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 그 주적은 전함이었습니다만, 미드웨이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아,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34]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 같은 경우는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점으로 근대 일본이 차츰 맛이 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시바 료타로는 <이 나라의 형태(この国のかたち)>[35]라는 글에서 쇼와 시대를 '귀태(鬼胎)"의 시대' 즉 일본사에서도 특이한 '비연속의 시대'라고 평했으며[36] 귀태의 시대의 시작이 러일전쟁의 승리에 있었다고 했다. 러일전쟁 직후에 일본은 해군을 축소하고 주변국과 협조하면서 국가를 발전시켰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러일전쟁의 승리라는 것도 미국이 개입해서 배상금도 못 받고 영토 할양이라고 받은 것도 별 볼일 없었던 말 그대로 '피로스의 승리'였을 뿐인데도 그 실상을 일본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비뚤어진 애국심[37]만 자극하여 태평양 전쟁 때에도 똑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다가 패망했다는 지적이다.


6.3. 대한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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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의 내면[38]

대한제국에는 그야말로 국권 상실의 전조가 되어버린 전쟁. 이 전쟁으로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던 세력 균형마저 깨졌다. 당장 한국의 입장에서는 둘이 계속 대립하다가 그 과정에서 완충지대로서 중립국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39] 그러나 러일전쟁 종전 후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고 얼마 안 가 1910년에 일본에 강제병합되고 말았다. 결국 일본 제국은 사실상 러일전쟁의 유일한 전리품이었던 한반도를 있는대로 쥐어짜내 그간의 지출을 만회해야 했으며 그 결과 식민지배 10년도 안 되어 전국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패전국 러시아보다 훨씬 더 불행해진 것은 대한제국인데, 만약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한반도는 세계 열강이 부딪히는 경계선으로 작동하여 동시기의 태국이나 에티오피아같이 중립국 위상을 유지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국제사회는 한반도를 완전한 일본의 영향권이라고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가 본격적인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이 전쟁으로 인하여 고종이 평양부를 제 2의 수도로 육성하려던 계획이 무너졌다.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조약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체결되었던 조약이었고, 경부선경의선의 건설도 매우 수탈적으로 이루어졌다. 명백히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었음에도 을사조약과 같은 반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하고는 러시아로부터 한국을 지켜주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미 중립을 유지할 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립협회 등의 활동처럼 한국 내에는 러시아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고종의 탄압으로 이미 독립협회는 소멸되고 러시아 편을 들 뿐, 소수 친일파만이 일본을 믿고 지지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야멸치게 한국을 배신했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중에서

이토 등 일본의 선전으로 당시 한국 내에 한중일이 연합해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열강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론이 널리 퍼진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일본의 이런 기만술은 성공적이었다.

한때 친미파, 친러파였던 것으로 알려졌던 매국노 이완용은 이 때를 계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여 을사조약의 주역이자 악역이 되어서 을사오적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친러파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배척하던 성향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의 주도권이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여기에 미일 간카츠라-태프트 밀약까지 더해지자 앞으로 일본 편에 서는 게 자신에게 더 유리할거란 판단이 섰던 것인지 이때를 기점으로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앞장서고 5년 후에는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게 넘겨버리는 주역이 됨으로써 평생 친일 매국노가 되었다.


6.3.1. 일부 한국인의 교전 참여[편집]


2011년 6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러시아 정부의 기밀 문서들을 번역하여 출판한 책인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40]에 의하면, 고종을 비롯하여 일부 한국인들이 러시아군과 협력하거나 혹은 아예 러시아군에 가담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한 예로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이던 김인수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로 탈출하였고, 러시아군에 들어가 대령까지 올랐다. 그는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을 만큼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링크

그 밖에도 함경도 출신 한국인 포수들 17,000명은 러시아군에 소속된 별도의 부대인 선견한국분견대를 만들어서 러시아군과 함께 일본군의 연해주 침입을 격퇴시키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41] 구한말에 한국의 정규군은 무기력했으나[42], 민간인 포수들 특히 함경도 출신 포수들은 그 사격솜씨와 용맹함이 매우 출중하여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그들을 높게 평가할 정도였다.[43]

다만 극히 일부는 일본군에 입대하여 일본을 위해 싸우기도 하였다. 그 예로 윤치성이 있다.[44]

6.4.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미친 영향[편집]


물론 한국은 을사조약을 맺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는 점에서 러일전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지만, 한국과 일본 외의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러일전쟁은 상당히 큰 여파를 남겼다. 당시에는 동양인이 서양인에게 승리한 전쟁[45]이라는 점 자체가 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6.4.1. 청나라[편집]


이미 청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러일전쟁은 뒤이어 그 영향을 증폭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이 바로 쑨원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량치차오처럼 벌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돌아선 인물이 있었다.

참고로 중국 입헌 개혁에도 촉진제가 되었다.


6.4.2. 인도동남아[편집]


아시아 국가가 유럽 열강에게 승전을 거뒀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가 쓴 세계사 편력에 따르면 그는 소년시절에 일본의 승전 소식을 듣고 수많은 아시아의 소년소녀와 어른들이 감격했다고 얘기했다. 유럽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놓였던 아시아에서 일본이 유럽 군대를 이겼다는 소식은 그들이 유럽의 지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줘 '아시아인의 아시아' 구호가 퍼지게 된 계기라는 것이다. 인도가 당장 위험에 처한 동아시아의 입장을 고려하기 어려웠듯이, 일본의 침략에 정면으로 노출되고 서양 열강과 대치한 시간이 길지 않은 한국과는 일본을 본 시각이 달랐다. 물론 네루는 같은 저서에서 일본 역시 다른 열강과 다를 바 없으니 주의하라고 했지만, 인도는 동남아시아와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과의 무력충돌이 없었으며 찬드라 보스같이 일본과 협력해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사람도 등장하는 등 인도와 일본은 전쟁 끝까지 큰 마찰없이 우호적이었다. 결국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아시아주의에 경도된 인도 판사[46] 라다비노드 팔에 의해 일본 전범의 양형이 독일에 비해 비교적 낮아지는 계기가 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던 베트남에서도 일본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아졌다. 일례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축이 된 인물 중 한 명인 판쩌우찐은 러일전쟁을 위해 베트남 근해를 지나가는 발트 함대의 위용을 지켜보았고, 그 발트 함대가 일본군에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베트남 민족 운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는 동유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본딴 통킹 의숙이 세워지는 등 한동안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이후 태평양 전쟁의 일환으로 일본군이 진주했을 때는 해방군으로써 기쁘게 맞이했다. 이러한 우호적인 시각은 진주한 일본군이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 유지되었다.


6.4.3. 오스만 제국[편집]


러일전쟁 때문에 아예 나라가 운명이 바뀌었다. 터키의 민족주의 운동가였던 무스타파 카밀 파샤는 일본의 승리를 '차리즘 독재에 대한 헌정주의의 승리'라면서 튀르크계 민족에게 동네방네 홍보했으며, 민족주의자 할리데 에디프 아드와르는 아예 아들 이름을 도고 헤이하치로의 이름을 따서 토고라고 지었을 지경이다. 이런 지경에야 당장 오스만 제국의 정치 판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안 줄 수가 없었는데, 러시아에게 패배해 불리한 협정을 맺었던 오스만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러시아의 심기를 건들만한 일본에 대한 협조적인 언론을 통제했고, 일본의 승전 후엔 "러시아가 문제가 아니라 내 자리가 위험하다"면서 러시아의 패배가 터키의 전제정을 흔들까봐 여론을 통제했지만, 곧 '근동의 일본'을 자처한 청년 튀르크당의 급진 봉기가 일어나며 술탄을 폐위하고 입헌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출처] 그러나 잘못된 선택을 연달아 하던 청년 튀르크당 정권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4.4. 에티오피아 제국[편집]


러일전쟁 이후 에티오피아 제국 내에선 에티오피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유사성을 비교하고 일본 제국의 성공적인 근대화를 인정하면서, 일본 제국을 롤모델로 삼아 에티오피아 제국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일본화주의자(Japanizer)"라는 지식인 집단이 나타났다.[47] 대표적으로 1930년대 에티오피아 제국 외무장관인 "Heruy wolde selassie"가 있으며 하일레 셀라시에 역시 이런 일본 모델 개혁에 호의적이어서 일본화주의자 테클 하바리아트 테클 마리얌(Tekle Hawariat Tekle, 1884 ~ 1977)에게 헌법 제정을 지시했고, 그는 메이지 헌법을 참고해 에티오피아 제국의 헌법을 작성한다. 더 나아가, 일본 제국과의 우호 관계를 통해 이탈리아의 침략 야욕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만주 사변 후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과정에서 몇 안 되는 우호국인 이탈리아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했기에 에티오피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우호 관계는 지속되지 못했다.


7. 여담[편집]


  •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을 배경으로 한 '짜르의 마지막 함대'라는 역사 교양서를 보면, 발트 함대 사령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북해에서 동북아까지 오는 긴 여정 중에 함대 전투함들의 바닥에 따개비가 붙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분을 염려하는 장면이 있다. 군함에서는 따개비가 들러붙으면 기동력을 깎아먹기에 큰 문제가 생긴다.

  • 일본 정부는 아카시 모토지로를 통해 전쟁기간 러시아 안팎의 반체제주의자들을 접촉하고 거금을 지원하였다. 주러 일본공사관들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스톡홀룸으로 거처를 옮기고 '러시아 내란 공작' 을 실행해 거물 혁명가, 좌익 운동가, 불평분자 등과 광범위하게 접촉했고 그들에게 아낌없이 거금을 뿌렸다. 가폰 러시아 정교회 신부, 블라디미르 레닌, 아나키스트인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마르크주의자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폴란드 민족주의자 피우수트스키, 핀란드 독립운동가 실리아쿠스, 소설가 막심 고리키, 그루지아·라트비아·벨라루시 등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의 민족주의 지도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결과 1905년 1월 1일에 뤼순이 함락되자 이로부터 20일이 지난 1월 22일 일요일에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광장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 일본에서는 1899년에 태어난 쿠단이 5년 뒤에 러일전쟁이 벌어질거라는 예언을 남기고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이 일화는 10년 뒤(1909년)에야 신문기사로 나온 이야기라 신빙성은 알 수 없다. 당시 예언을 남기고 죽은 쿠단의 시체는 박제시킨 뒤, 나가사키에 있는 야히로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박물관의 폐관으로 행방이 묘연한 상태.

  • 유년기의 김홍일 장군이 열 살도 되기 전 러일전쟁이 벌어졌는데, 고향인 용천군이 압록강 전투에 휘말리는 바람에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당시 러시아 군인들은 그릇뿐만 아니라 요강까지 징발해다 음식을 담아 먹어 일부 마을 사람들이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고 한다. 음식이나 집을 징발해서 민폐를 끼친 건 기본이다. 당장 김홍일의 집부터가 러시아군 사령부로 쓰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은 어린 아이들이 곁에서 자신들을 대상으로 석전을 던지면 화를 내는 대신 곁에서 구경하거나 알사탕을 주는 등 관대한 면도 있어 아이들과 친했다. 특히 러시아 기병대는 아이들이 던진 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날아가는 모습이 신기했던지, 말을 타고 쫓아가서 돌을 도로 주워 이리저리 살펴보곤 했다고.
반면 일본 군인들은 러시아군보다도 온갖 것들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인부들을 무보수로 부려대어 민심이 영 안 좋았다. 거기다 석전을 하는 아이들에게 태형을 때리고 부모까지 잡아다 갈궈댔다고 전한다. 다만 의외로 러시아군과 일본군 모두 부녀자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48] 당시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치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라 수습 못 할 일을 벌이면 곤란했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민폐를 끼쳤다가 대한제국이 적극적으로 일본 편을 들어버리면 만주의 지배권을 빼앗기기 딱 좋은 상황이라 최소한의 군기는 엄정하게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민심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 건 경쟁자 러시아가 정리되고 한반도를 독점 장악한 을사조약 이후부터다.

  • 경상남도 거제시의 취도라는 작은 섬 근처에서 일본제국 해군이 함포 표적 사격 연습을 하고 취도에는 러일전쟁 승전 기념비를 건립했다.

  •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기습 침공을 겪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선전포고 의무를 강력히 주장하여 국제법으로 성문화했다.# 하지만 일본의 기습 침공은 이후로도 여전히 이어졌다.

  • 러시아를 따라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몬테네그로 공국은 실제로는 러일전쟁에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이후 몬테네그로 공국은 세르비아에 합병되었고 2006년 독립 때까지 전쟁 중이었다. 2001년 일본을 방문한 몬테네그로의 축구선수가 종전을 명시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2006년에 공식적으로 합의했다. 실질적으로는 2001년과 2006년에 양국의 우호관계 증진을 위하여 벌어진 명목적인 퍼포먼스에 가깝다.

7.1. 대체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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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편집]



8.1. 관련 사건[편집]



8.2. 관련 인물[편집]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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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몬테네그로의 경우는 이후에도 법적으로는 명목상 계속 일본과 전쟁 중이었기에 세월이 흘러 2006년이 되어서야 명목상 종전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담에 후술되어 있으니 참고[2] 이때 청나라의 만주 남부는 러시아령 다롄이 된 상태였다.[3] 메이지 덴노가 망치, 조선 고종이 담금질하는 쇠, 니콜라이 2세가 모루 역할이다. 모루의 외견으로 인해 니콜라이 2세가 가일처럼 변했다.[4]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해군 원수. 1899년 방한하기도 했었다.[5] 이 때 독일 제국은 지구 반대 편에 있는 칭다오와 비스마르크 제도에 식민지와 거점 기지가 있을 정도로 한참 전성기였을 때라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6]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와 주조선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 사이에서 체결. 일명 경성의정서 혹은 베베르 소촌 각서. 고종의 환궁과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고 조선 주둔 러시아와 일본군을 800명으로 제한했다.[7] 이홍장-로바노프 협정. 러시아, 청나라, 조선 가운데 하나라도 공격을 받으면 서로 협력하여 요격한다는 협정. 이를 위해서 청나라는 지린성헤이룽장성을 통과하는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에 넘겨줬다. 이때 이홍장은 50만 루블의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8] 모스크바 의정서 혹은 로바노프 산현 의정서로도 불리며 이는 러시아와 일본 중 어느 한 국가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증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상호 견제 조치였다# [9] 이에 영국은 2개월 뒤, 견제 목적으로 뤼순 반대편에 있는 산둥 반도의 웨이하이를 조차받는다.[10] 이로 인해 1897년 12월 창설 예정이었던 한러은행이 일본을 지지하는 독립협회의 반대로 다음해 3월로 연기된 것이다.[11] 그래서 미국영국은 '러시아의 아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을 키워야 한다'고 봤으며,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과 여론을 견지하게 되는 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시각이 1920년대 워싱턴 회의 체제까지 지속되었다.[12] 러일전쟁 말기에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패색이 현저해진 상태였다.[13] 전쟁 이전에 이미 러시아군은 탄환이 무려 2800만 발이나 모자랐다.#[14] 포츠머스 조약 이전에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으므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특히 시어도어는 개인적으로도 일본에 굉장히 우호적이었고 한국에는 비우호적이었다.[15]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무려 1911년에야 완공되었다.[16] 만약에 전장이 주요 도시와 가까운 러시아 서부였다면 혹시 모를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의 일본군보다 몇 배는 막강했던 독일 국방군제2차 세계 대전 때 여기를 못 넘고 궤멸당한 걸 생각하면 보급에 한계가 있는 일본군이 러시아 서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육로로 돌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17] 단 일본의 의료체계는 상당히 선진적이어서 비전투 손실이 이전보다 확실히 줄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놈의 각기병 # [18] 노래의 가사를 보면 밥도 제대로 안주고 말은 얼어 죽었으며 상관은 무리한 자살돌격만 시키고 고향에서는 질바에는 죽어서 돌아오라는 현실성 없는 위문편지만 보내니, 살아있는 것 자체가 운이 없는 것이며 차라리 총 맞고 전사하고 싶다는 내용이다[19] 당시 각료평의회 의장 자리를 맡고 있었다.[20] 결과적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러시아 전제군주정 붕괴→사회주의 혁명 테크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차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시점의 사정이다. 러시아에서는 본격적으로 혁명의 열기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은 국내에 시위 때문에 진압군을 차출해야할 사정이라 더이상 외국과의 전쟁에 신경쓸 수 없게 된 것이다.[21] 하지만 1905년 러시아혁명의 결과는 헌법제정과 두마 설치로 입헌군주제화 되는 것이므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이다. 이미 유럽의 주요국가들은 전부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체제가 트랜드가 되고 자유주의가 대세를 거스르기 어려웠다. 사회주의자가 주도권을 잡는 것은 1917년 1차대전의 일이다.[22] 오히려 러일전쟁 이후로 사회주의 세력은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레닌이 스위스로 망명 갔다가 2월 혁명 때 돌아왔다. 그것도 독일정부가 러시아 내부분열을 획책하기 위해서 그를 보냈다.[23] 러시아의 경우, 비테가 선방해낸 것에 흡족해 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할 정도였다. 비테 개인 입장에서는 강경파인 베조브라조프 일파가 저질러 놓은 것을 온건파인 본인이 뒷수습한 셈이었으며 얼마 뒤에 러시아 혁명의 뒷수습까지 하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24] 이 고질병을 정확히 말하자면 보급이나 장비 등에 제한이 가해질 수밖에 없는 국력상의 문제를 일선 장병들과 중하급 지휘관들의 정신력으로 때워보려는 시도가 거의 처음 나타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25] 봉천 전투에 참전한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동생으로, 시바 료타로의 작품인 언덕 위의 구름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26] 그래서 나폴레옹도 "참호 속에 숨어서 방어만 하는 군대는 결코 이길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27]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영국과 미국 신문을 보다가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선전을 그대로 믿어버릴 만큼, 영국과 미국의 여론전은 굉장히 강력했다.[28] 러시아가 독일을 견제해주기 원했던 프랑스가 일본과의 전쟁을 러불동맹 조약 위반이라면서 크게 반발했고 때문에 러시아는 주 전력을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것에 차질이 생겼다. 그리고 전쟁 아후 러시아의 군사력의 약화를 원치 않았던 프랑스가 경제 지원을 해준다.[29]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에 따르면 이때 러시아는 아예 일시적으로 강대국에서 탈락했다고...[30] 비록 청일전쟁 시에 작곡되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대규모로 이용되었다.[31] 사실 유럽 강대국도 비유럽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패배를 겪었고 그 중에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등 전쟁 자체를 패배한 사례도 많으므로 첫 승리는 아니다.[32]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한 세르게이 비테는 러시아에게 큰 불이익 없이 조약을 체결하여 니콜라이 2세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큰 칭찬을 들었을 정도였다. 일본의 폭동은 언론 통제를 통해 국민들에게 자국의 어려운 사정을 숨긴 일본 정부의 자업자득에 가까웠다.[33] 연속적인 교전이 아닌 한 번의 결전으로 적국의 해군력이 무력화된 사태는 세계 해전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힐 만큼 드물다. 서양에서는 쓰시마 해전을 트라팔가 해전 이후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대사건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유틀란트 해전이나 태평양 전쟁 전체에서 진행경과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해군도 상대적으로 열세한 해군을 일거에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다. 문제는 쓰시마 해전 이후 일본해군이 이 이례적인 함대결전을 재현하는 데에만 몰두하며 전략, 전술사상이 교조화되었다는 데에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쓰시마 해전 문서 참조.[34]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태평양전쟁에 있어서 항공운용의 실상, 운용이론과 실제 운용의 차이' # 의 저자 유라 후지오가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날개회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 번역 번역 [35] 직설적으로 번역해서 '이 나라의 꼬라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36] 즉, 뭔가 잘못돼서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그 전의 다른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서술했음에도 불과하고 오직 쇼와의 이 시기만큼은 "귀태"라는 단 한 마디로 어물쩍, 일본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본 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37] 시바의 표현으로는 내셔널리즘이다. 시바는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을 내셔널리즘(비뚤어진 애국심)과 패트리어티즘(애국심)으로 구분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내셔널리즘은 그저 집안 자랑이나 하고, 다른 집안을 업신여기고 깔본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쩌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계속 존경받을 수 있는 집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감정을 국가적 규모로 행하는 것이 내셔널리즘과 패트리어티즘이라는 것이 시바의 설명이다.[38] 대한제국의 운명이 뒤흔들린, 한국과 만주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여기선 잘려 있는 삽화의 해설문에는 고종이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선택했다는 기사가 짧게 나온다.[39] 식민 제국주의 시대 당시의 태국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 미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식민지로 만든 프랑스,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네덜란드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독립을 유지했다. 다만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배하던 유럽이나 미국 등 열강들이 지리적으로 붙어있지 않는 먼 나라들이였던 태국과 달리 한국은 구한말 당시 한반도에 대한 이권과 세력 확장을 노리던 일본이나 청나라, 러시아 등 여러 강국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에 태국과는 상황이 달랐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40] 책이기는 하지만, 국방부가 한정 수량으로만 발간한 책이라서 교보문고 같은 일반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으며, 용산 전쟁기념관 같은 한정된 곳에서만 판매한다. 간혹 인터넷 중고서점에 판매가 되는 경우도 있다.[41] 출처: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42] 그래도 완전히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의 책에서도 정규군의 군인들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사실 무기력할수밖에 없었던 게 대부분의 출동은 국내의 의병들을 진압하는 임무였고 침략자인 일본을 상대로는 정부부터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으니 명령을 받지 못한 군인들이 적극적으로 맞선다는 것은 항명이자 반란이었다. 결국 군대 자체가 해산되는 상황이 되자, 즉 더 이상 정부의 명령 따위 기다릴 필요가 없어지고 일본이 완전한 침략자임이 확정되자 이들은 한성에서 대규모 항전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대일의병에 대거 가담했다.[43] 고종 황제도 산포수들의 사격 솜씨가 정규군인 경군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여기서 정규군은 엄청나게 빡센 훈련을 받았던 인물들이다.앞서 헤세-바르텍도 한국군 장병들을 매우 긍정적이게 평가하였다.# 장교나 사병 개인의 역량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해산된 대한제국군이 의병에 가담하고 나서는 의병을 일본군 한개소대로만 격퇴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 하지만 문제는 제정적인 한계, 규모의 한계로 강군을 만들기는 무리였던 것이다.[44] 다만 그는 친일파였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니었다. 식민지화 후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중추원 평의원을 지내는 등 애메한 행보를 보였다. 그래서인지 친일 인명 사전에도, 독립유공자들중에도, 그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없다.[45] 물론 역사를 보면 그런 사례는 많았지만, 근대는 지금보다 그런 역사적 연구나 인식이 미비했던 시기였으며 근대에 들어서 동양과 서양 국가들 사이에 큰 국력차가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였다.[46] 인도의 엘리트들은 영국의 식민지 규제 정책 때문인지 영국에서 대부분 이과 계열이 아닌 문과 계열의 법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간디, 네루 등 인도의 독립을 이끈 지도자들도 대부분 영국 변호사 출신이다.[출처] #. 터키의 국제관계학 저널을 번역한 내용이다.[47] 출처: 미국 역사학자 칼빗 클라크 3세의 논문 유색인종 동맹: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에티오피아와 일본(Ethiopia and Japan before World War II, J.Calvitt Clarke III)[48] 그러나 2011년 6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러시아 정부의 기밀 문서들을 번역하여 출판한 책인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에 의하면, 함경도 포수들이 러시아군에게 "일본군이 우리 부녀자들한테 난폭하고 무례한 짓을 저질러 분노하고 있으니, 러시아군과 협력하겠다."라는 연락을 보냈다고 언급되어 있다. 때문에 부녀자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김홍일 장군이 살던 마을 한정이었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