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킬라 (문단 편집) === 후계자 콤모두스의 등장 === 175년 이전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 시기부터 루킬라의 영향력은 사실상 유일무이한 아우구스타나 다름없어 로마 사회 곳곳에 미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시기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편치 못한 몸으로 병사들과 함께 다뉴브(도나우, 다누비우스) 강 전선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킬라는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 동안, 재판과 행정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인사 이동 역시 루킬라의 의중이 반영되었다. 이런 가운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를 걱정해 일찌감치 여러가지 대비를 했다. 이는 모후 파우스티나 역시 비슷했는데, 그녀는 로마 안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며 어린 콤모두스의 안위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콤모두스는 성품이 착하고 유순한데다가, 이 무렵 즈음 콤모두스의 한 살 아래의 남동생으로 형 콤모두스와 함께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열두 번째 자녀였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169년 10월, 귀에 난 악성종양 제거 수술 후 합병증으로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군부와 원로원에게 두루 신망을 받고 있었던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를 일찌감치 유일한 후계자 콤모두스를 도울 인물로 지목했다. 이는 루킬라와 폼페이아누스 사이의 결혼을 마르쿠스 황제가 강하게 밀어붙일 당시부터 예상된 일이었는데, 사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콤모두스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의 나이를 생각해 폼페이아누스를 예전의 [[아그리파]] 혹은 [[대 드루수스]] 생전의 [[티베리우스]] 같은 위치의 섭정 같은 자리를 부여하려고 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예 폼페이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고, 이름까지 폼페이아누스 카이사르로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장인의 결정에 대해 폼페이아누스는 어린 콤모두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결정이라며, 이 조치를 한사코 거절했다. 따라서 카이사르 칭호 결정은 실제 결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런 조치 외에도 황제와 황후는 자신들이 부재할 경우, 나이가 어리고 천성이 착한 콤모두스를 걱정해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진심으로 아들을 위해 헌신할 이를 선정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폼페이아누스는 카이사르 칭호도 가지고 있지 않고, 클라우디우스 1세 시절 시민권을 받은 시리아 속주 출신 그리스계이자 심지어 신참자인 탓에 단점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부 모두 상당히 신뢰한 장군이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콤모두스의 또 다른 조력자로 염두에 뒀다. 그런데 175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이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소 파우스티나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일의 오해를 차단할 목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해 콤모두스와 소 파우스티나를 급히 자신의 곁으로 오게 했다. 다행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은 몇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때의 일은 로마를 떠나 동방 순행에 나선 황후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따라서 175년 루킬라와 콤모두스의 모후였던 소 파우스티나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로마군 동방기지가 있었던 할랄라에서 사망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내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는데, 콤모두스 역시 사춘기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그래서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누나와 매부들에게 의지했는데, 이때 폼페이아누스를 포함한 안토니누스 황족들은 여린 성격의 콤모두스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폼페이아누스는 장인의 생전부터 늘 콤모두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로 도움을 줬고, 둘째 누나 부부도 콤모두스를 위해 사저에서 황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물심양면으로 지켜줬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황제와 콤모두스 등 황실 수행원들은 동방 순행을 마치고 176년 가을,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를 공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이어서 그는 콤모두스가 16살이 되던 해인 178년 콤모두스의 혼처를 구해 곧바로 결혼시켰다. 신부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함께 도나우 강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과의 전투에 참전했던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의 딸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였다. 그런데 이 결혼과 후계자 선정은 공교롭게도 루킬라의 황후 지위가 사실상 박탈되는 결과를 초래해, 동생의 공동황제 등극으로 위기감을 느낀 루킬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