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네상스 (문단 편집) == 조각 == [include(틀:미술사/서양)]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2.bp.blogspot.com/la-piedad-basilica-de-san-pedro-ciudad-del-vaticano-roma-italia1.jpg|height=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2px-David_von_Michelangelo.jpg|height=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3.bp.blogspot.com/michelangelo+moses.jpg|height=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Parco_di_pratolino,_appennino_del_giambologna_05.jpg|height=260]]}}} || || '''{{{#F5F0C5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 '''{{{#F5F0C5 다비드상}}}''' || '''{{{#F5F0C5 모세 상}}}''' || '''{{{#F5F0C5 아펜니노 거상}}}'''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분야들 중 하나. 고대 로마의 조각품들을 모방한 조각품들이 우수수 쏟아져나왔다. 특히 당대 르네상스 조각의 중심지는 북부의 [[피렌체]]로, 특히 15세기 유럽 조각의 중심부는 그냥 피렌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시대 피렌체의 주요 조각가에는 오르카냐, 난니 디 반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난니 디 바르톨로, 로렌초 기베르티, [[도나텔로]],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안토니오 로셀리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자코포 산소비노 등이 있다. 이는 피렌체에서 출생한 거물 조각가들만 나열한 것으로, 실제로 이 당시 이탈리아는 수많은 거장 조각가들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르네상스 조각사 역시 초기 르네상스, 하이 르네상스, 매너리즘, 후기 르네상스 이렇게 구분된다. 1400년 만들어진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기점으로 초기 르네상스가 시작됐다고 보고, 1499년에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그리고 1501년에 시작된 대작 다비드상의 제작을 하이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본다. 1527년 [[사코 디 로마]]로 인해 로마 르네상스가 절단난 시점을 매너리즘의 시작으로 보며 이후 매너리즘은 후기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까지 이어진다. 르네상스 조각이 언제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1600년대 즈음에 로마에서 바로크 양식이 르네상스 양식을 완전히 몰아내는 걸 기점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나눈다. 당시 조각가들은 여러 가지 재료들을 사용해서 작품들을 깎아냈다. [[대리석]]이 가장 일반적이고 선호되는 재료였는데 특히 토스카나 북부의 알프스에서 산출되는 순백색의 카라라 대리석을 최고급으로 쳤다. 혹은 아드리아 해 건너 이스트리아 지방에서만 나는 색색의 대리석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동은 매우 비싼 재료였다. 같은 양의 최고급 대리석과 비교해도 10배 가량 더 값비쌌을 뿐더러 함부로 구하기도 어려웠다. 부유한 사람들은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에다가 금박을 입혀 부를 과시했다. 나무도 많이 썼다. 물론 값어치나 품질은 재료들 중에 가장 떨어졌지만, 무게가 제일 가볍다는 특성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조각할 때 나무를 많이 사용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걸린 '브루넬레스키의 십자가'도 나무로 제작했다. 또한 매우 부드러워 조각하기 쉬웠기 때문에 성가대석처럼 매우 정교한 장식이 필요한 곳에도 나무를 이용해 장식했다. 성당들이 값비싼 석상이나 청동상을 구매할 여력이 없어 주석 유약을 바르고 구운 [[테라코타]]로 만든 조각들을 전시해놓는 경우도 흔했고 [[석고]]나 회반죽에 조각을 새기기도 했다. 르네상스 조각품의 주요 발주처는 바로 교회였다. 성당들은 수백 수천 개의 조각들을 발주했고 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북이탈리아는 유난히 조각상들을 건물 외부보다는 내부에 전시해놓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 몇 안되는 예외가 [[밀라노 대성당]]이다. 수 백개의 조각상들을 외부로 노출된 벽감 안에 세워놨는데 대부분은 너무 높은 데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고. 이 외에도 여러 조각상들이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역시 처음에는 피렌체 대성당 동쪽 지붕 쪽에 놓으려고 했는데 만들어놓고 보니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따로 전시하고 있는 것 뿐이다. 교회 내부에는 부자와 유력자들의 무덤이 자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묘지를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중세식으로 우리가 아는, 관뚜껑 위에 누워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양식의 무덤을 선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살아서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서 무덤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무덤이 이런 양식이다. [[레오 10세]]의 사례 이후부터는 어떤 인물이던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앉아있는 모습을 조각해서 무덤 뒤에 안치하는 모습의 무덤이 일반화되었다. 공공장소에도 조각품들이 넘쳐났다. 피렌체인들은 공공 조각품들을 도시의 자랑거리로 여겼고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앞에 수많은 조각상들을 전시해놨다. 물을 공급하는 [[분수]]도 중요한 조각품이었다. 분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귀중한 물 공급원이었는데, 이같은 실용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도시 미관 장식 목적으로도 사욛됐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볼로냐의 넵튠 분수나 피렌체의 넵튠 분수 등이 있다. 무덤 위에 세울 조각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승마상도 유행했다. 고대 로마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권력자 찬양 목적이었다. 가장 유명한 승마상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완성작 '스포르차 말'이다.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그의 아들을 위해 발주한 실물 규모의 승마상이다. 다 빈치는 1489년에 이 프로젝트를 맡았고 1492년 겨울에 점토 모형을 완성했다. 이 모형은 당시 밀라노에서도 대호평을 받아 이제 청동으로 만드는 일만이 남았지만, 하필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대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청동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승마상 제작 프로젝트는 무위로 돌아갔다. 게다가 만들어놓은 점토 모형마저도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점령했을 때 궁수들이 표적으로 삼고 사격 연습을 하면서 파손당했다. 현재 남아있는건 점토 모형을 묘사한 그림 몇 점과 작은 밀랍 모형 몇 개 뿐이다. 초기 르네상스에는 [[기베르티 로렌초]]에 의해 새로운 기법이 탄생했으며, [[도나텔로]]는 조각이라는 장르를 건축으로부터 독립시켰다. 르네상스 특유의 개성적인 표현과 사실주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작품인 [[가타멜라타 장군의 기마상]]도 그의 작품, 더불어 실물크기의 누드상인 [[다비드상]]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과는 다르다. 도나텔로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모양도 다르다. 천재적인 건축가,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이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완벽함의 상징이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에 비견될만한 걸작들을 쏟아낸다. 당시 발굴된 고대 조각의 최고 걸작인 [[라오콘]] 군상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후 파묻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