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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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Renaiss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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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ngtree-florence-s-historic-buildings-at-sunset-image_2902845.jpg

아테네 학당피렌체의 모습
14세기 ~ 17세기
지역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

언어별 명칭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영어
Renaissance
스페인어
Renacimiento

1. 개요
2. 배경 : 왜 하필 이탈리아인가?
3. 역사
3.1. 배경
3.2. 르네상스의 시작
3.3. 메디치 가문
3.4. 전이탈리아로의 확산
3.5.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4. 건축
4.1. 초기 르네상스 건축
4.2. 하이 르네상스 건축
4.3. 매너리즘 건축
4.4. 유럽으로의 확산
5. 조각
6. 과학
7. 회화
7.1. 초기
7.2. 전성기
7.3. 외전 북유럽
9. 르네상스 개념에 대한 비판
10. 같이보기



1. 개요[편집]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계의 큰 변화라고 믿어지는 것.[1] 각 세기별에 따라 이탈리아어트레첸토(trecento, 300), 콰트로첸토(quattrocento, 400), 친퀘첸토(cinquecento, 500)라 부른다.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 흔히 문예 부흥으로 번역된다. 용어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그 어원은 조르조 바사리의 책 "예술가 열전(1550)"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이탈리아어로 리나시타(rinascita, 부활)이라한 것이다.

이것을 프랑스의 역사가였던 쥘 미슐레(1798~1874)가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re, 다시 + naissance, 탄생)으로 번역하고, 스위스의 역사가였던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확실하게 정의 내린 것이다(1860). 부르크하르트는 인문주의자들이 신이 모든 것의 중심인 그리스도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 한 운동, 즉 인문주의(humanism)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르네상스식 인문주의가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해석에는 오늘날 많은 반론이 쌓여있다.

현대에는 전성기(특히 중흥기) 또는 큼지막한 문화 프로젝트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서유럽의 문화가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기에 부흥한 것을 카롤루스 르네상스라 칭한 것이 대표 예시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중세시대동안 "암흑시대"를 보냈던 유럽인들을 자연스럽게 계몽시키고 유럽을 문화적으로 크게 부흥시킨 희대의 혁명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장인들을 사회에서 우대하며 후대에 유럽산 명품 브랜드를 탄생시키는데도 간접적인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중세적인 문화가 쇠퇴하고 근세적인 문화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교황권이 약화(1309~77, 1517, 1527)되고 중세 흑사병(1353) 등과 도시의 발달 등으로 봉건 제도가 붕괴(1336~1453, 1648)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화 변화로, 그렇게 중세적 문화를 부정하고 근세적 문화를 성립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오늘날에는 르네상스와 중세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애초에 고대, 중세, 근대라는 3시대 구분법은 14세기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는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르며 잊힌 고전 문명이 자신들의 시대에 부활했다고 선언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14세기는 오늘날에는 완전히 중세로 분류되는 시기다. 중세의 끝이 언제인지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1453) 혹은 루터교회의 출현(1521)으로 잡으며 페트라르카의 시대(1304~1374)가 중세라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그리고 14세기 이전에도 중세인들은 그리스-로마 고전을 굉장히 사랑했고, 르네상스인들이 반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니다. 가끔 르네상스 문인들이 반그리스도교적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는 계몽주의자들과 19세기 일부 학자들의 프로파간다에 의한 것이고, 단테의 사례에서 보듯 이들은 매우 그리스도교적이었다. 물론 교황과 멱살 잡는 일이야 있었지만, 그 정도는 중세에도 아주 흔한 일이었다(1077). 흔히 중세는 교황권이 강했으나 시대가 흐르며 추락했다는 인식이 강하고 크게는 맞는 말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세의 교황은 교권이 현대 교황보다 훨씬 약했고 대신 속권이 강했다.


2. 배경 : 왜 하필 이탈리아인가?[편집]



파일:Florence-wallpaper-1920x1200-51009.jpg

르네상스가 시작된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14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는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지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찬란하게 르네상스를 맞이한 지방은 바로 이탈리아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탈리아 반도였을까? 이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들이 있지만 크게 아래 5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다.

1. 기존 로마 제국의 유산과 동로마 제국 학자들의 지식 전파

2. 봉건제의 부재와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3. 지중해 중계무역으로 쌓은 막대한 부

4. 교황을 포함한 수많은 경제적 후원자들의 존재

5. 흑사병의 창궐로 인한 세계관 변화

첫째,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고, 그 전통이 그리스도교 세계로 편입된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로마 유적만 봐도 알 수 있듯 고대 로마의 문화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 서방으로 피난한 동로마 예술가 기술자 등 지식인 대부분이 이탈리아로 향했다.[2]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가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동로마 제국의 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과의 교류를 통해 동로마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망명하는 동로마 그리스 학자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연구를 도와 학문의 진작에 큰 역할을 했다는것이 대표적인 예시.[3]

둘째,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 교황령의 존재도 이탈리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가르는데 영향을 주었다.[4] 한편 유럽 중심지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1337~1453), 산간 도서 밀라노 지역을 제외한 유럽본토의 중세 흑사병(1346~1353) 등으로 인해 문화부흥이 주춤한 상태였다.[5]

셋째,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인들은 특유의 이해타산적 계산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등 종교의 꼬드김, 상업에 방해가 되는 윤리적 규범에도 넘어가지 않았고(심지어는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아군을 패며 한 몫 두둑히 챙기기도 하였다.), 자신들과 비슷한 속성(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의 직종들인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 수학자들에게 큰 후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이 여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넷째, 아비뇽 유수(1309~1377)[6]가 끝나고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교권을 다시 세우고[7], 황폐화 된 로마를 재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의 이탈리아 전쟁(1494~)으로 북부 이탈리아가 털리기 시작할 즈음 율리오 2세(1503~)는 교황령 확대를 꾀하며 전쟁에 나선다(...)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므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막대한 헌금(면죄부[8])을 끌어들였으며, 또한 이 돈으로 이탈리아 각지의 유명한 르네상스 기술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천지창조, 아테네 학당 등이 제작되었으며, 더 나아가 성 베드로 대성당(공사기간: 1506~1626) 등을 재건하기에 이른다. 중세의 끝에 논란이 있고, 중세가 끝났는데 교회의 권력이 오히려 더 강해 보이는 이유, 그리고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9]을 추구한다면서 역설적으로 가톨릭 분위기가 풍기는 르네상스 작품들이 다수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코 디 로마(1527)가 터지면서 다 날려먹었지만(...)[10]

다섯째,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유럽 전체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은 유난히 이탈리아에서 더 잔혹했다.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어있었던 이탈리아는 흑사병에 대단히 취약했고 1347년 피렌체는 흑사병으로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흑사병이 유행할 때에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일반인은 30% 정도의 사망률을 나타냈지만 정작 신이 보호한다는 사제들은 사망률이 40% 중반이 넘어갈 정도로 훨씬 높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은 신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죽음에 익숙해진 이탈리아인들은 사후의 영성보다는 현세의 삶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농부와 노동자들이 픽픽 쓰러져죽어나가면서 노동자들의 가치는 급상승했다. 봉건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고 임금 노동자가 출현하며 귀족이 아닌 새로운 계급이 자본을 축적해나갔다. 초기적인 자본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은 결국 하나로 모여 르네상스의 서막을 열어젖히게 된다.

유독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도 피렌체의 발전은 독보적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메디치 가문의 존재였다. 오랫동안 은행업으로 재력을 쌓아온 메디치 가문이 예술을 크게 장려하고 사랑했던 덕분에 전 유럽의 예술가들이 피렌체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특히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경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산드로 보티첼리 같은 역사에 길이남을 예술가들을 모두 후원했고 수많은 작품들을 의뢰하며 일감을 몰아줬다. 일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가 메디치 가문 등장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점, 그리고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이 모두 피렌체와 가까운 토스카나 태생이었던 점을 강조하며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된 것은 행운의 일치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3. 역사[편집]



3.1. 배경[편집]



파일:main-qimg-26f1f4648ec97d4bbeb22113790cd626-lq.jpg


파일:1348-e1473365825560.jpg

북이탈리아 중심의 중세 교역로
1348년 당시 베네치아의 정경
1300년대 이탈리아는 이미 남북 간의 빈부 격차가 완연히 드러나던 상태였다. 한때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라티움과 남부 지방은 북부에 비해서 가난했고 세계의 수도로 불리던 로마는 폐허로 가득한 유적 도시였다. 교황은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해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는 굴욕을 겪었고 교황령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남쪽의 시칠리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시칠리아 토후국, 시칠리아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약 350여 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지만 중세 후기 들어서는 교역 주도권을 북부 상업도시들에게 빼앗기며 날로 쇠퇴하고 있었다.

반면 북부 도시들은 활기가 넘쳤다. 아예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써 동로마 제국아랍 등지와 거래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쌓았던 것. 향신료, 염료, 비단 같은 동방의 값비싼 특산물들이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을 거쳐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특히 항구도시들의 발전이 두드러졌는데, 베네치아는 무려 5,00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운용하며 동방항로를 틀어쥐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는 못미치지만 역시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내륙 도시들도 번창한건 마찬가지였다. 피렌체밀라노 같은 도시국가들은 포 계곡의 비옥한 농경지에서 엄청난 부를 창출했고 프랑스, 독일, 저지대 국가들에게서 양모나 밀, 귀금속 따위를 수입했다. 특히 피렌체는 모직 직물 생산으로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로 급부상하기까지 했다.

북이탈리아의 경제 발전은 날로 눈부셨다. 동방과 서방을 잇는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의 젖줄을 거머쥐고 얼마 가지 않아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할 정도로 강대해졌다. 복식부기, 합자회사, 금융시스템, 외환 시장, 보험, 정부 부채와 같은 개념들이 속속 등장했다. 피렌체에서 발행한 금화 '플로린'은 국제 공용화폐가 되었고 피렌체는 국제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경제 발전으로 인해 상인 계급들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는데, 상인들의 부상과 기존 귀족층들의 쇠퇴로 인해 초기적인 자본주의가 시작된다. 상인들은 본인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치를 과시했고 이는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또한 상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고리대금, 비기독교인들과의 교역 금지, 군주의 자의적인 재산 몰수처럼 자본주의를 억압하는 법률들이 하나하나 철폐되며 북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다만 1300년대에 소빙기가 찾아오며 유럽 경제는 잠시간 침체로 들어갔다. 기후변화로 인해 농업생산량이 크게 악화되었으며 기근, 인구 감소가 이어졌다. 특히 영프 사이간에 발발한 백년 전쟁은 유럽 전체의 경제를 교란시켜버렸고 1345년 에드워드 3세의 빚 탕감 때문에 피렌체에서 가장 거대한 두 은행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이 붕괴되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동유럽의 경제 교역로가 올스톱 상태로 빠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흑사병의 창궐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흑사병은 인구 밀도가 높던 북이탈리아에 치명적이었고, 피렌체는 50년 동안 25~50%에 가까운 인구 감소를 경험했으며 1378년에는 직물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3.2. 르네상스의 시작[편집]



파일:Egyptian_plague_of_boils_in_the_Toggenburg_Bible_0.jpg

흑사병의 창궐은 역설적이게도 르네상스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혼란이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했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으면서 노동력의 가치가 크게 뛰었고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의 재산을 물려받아 훨씬 부유해졌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갔고 인구 감소로 인해 부가 재분배되었다. 15세기 초 흑사병 사망률이 감소하자 사회는 다시 안정세로 돌아갔다. 사치에 소비할 잉여 재산이 많아지자 경제에 다시 활기가 돌았고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수요는 장인 계급과 상인 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앞서 일어난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의 붕괴로 인해 메디치 가문이 그 공백을 틈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14세기의 침체기 시절에 부유층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멈추고 대신 예술과 문화에 더 투자를 하면서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시기가 바로 단테 알리기에리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활동기이기도 하며, 르네상스의 첫 물결이 이탈리아를 적신 시기라고 평가받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라틴 문학과 철학, 서적 등은 실전되지 않은 채 이미 서유럽 세계에서도 꾸준히 연구되고 읽히던 대상이었다. 서유럽에서 잊혀진 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 시절의 문학과 사서들이었다. 그리스의 과학, 수학, 철학은 잊혀지지 않았으나 호메로스, 데모스테네스, 투키디데스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오직 동로마 제국의 학자들만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며 수많은 동로마 학자들이 이 서적들을 들쳐매고 서유럽으로 유입됐다. 수 백년간 잊혔던 옛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이 다시 서유럽에서 부활한 것이다.

밀라노 공국피렌체 공화국 간의 잔인한 전쟁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발전에 한 몫 했다. 북이탈리아의 도시 밀라노는 14세기 후반 들어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이끄는 비스콘티 가문의 지배에 놓인다. 잔인하고 유능했던 지도자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북이탈리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그에게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게 바로 또다른 강국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연합군을 구성, 밀라노와 전쟁을 벌였는데 1402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급사하기 직전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다. 피렌체 공화국은 전제군주적인 밀라노와 싸우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주의적인 이상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공화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르네상스의 확산에 맞물리며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에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는 구조였다. 수 백여개의 도시가 있었으나 가장 강한 건 밀라노, 피렌체, 피사, 시에나, 페라라, 만토바, 베로나, 베네치아였다. 중세 후기 북이탈리아는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들었는데, 각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교황파 세력 '구엘프', 황제파 세력 '기벨린' 둘 중 하나에 소속되어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 도시국가 내부적으로도 파가 갈려서 구엘프와 기벨린은 정말 서로 죽일 듯이 싸워댔다. 무력의 필요성이 부각되며 도시들은 서로 앞다퉈 용병을 고용하기 시작했고, 15세기 들어서는 강한 도시들이 인근 도시들을 무릎꿇리며 어느 정도 교통 정리가 된다. 피렌체는 1406년 피사를 정복했고, 베네치아는 파도바와 베로나를 점령했으며 밀라노는 파비아와 파르마 등지를 복속시켜 세력화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이 도시국가들이 미친 듯이 싸워댔다. 이탈리아인 대장이 이끄는 독일계, 스위스계 용병 무리인 '콘도티에리(condottieri)'가 돈을 받고 대신 전투를 치렀다.[11] 해상에서는 제노바와 피사, 베네치아 3국이 경쟁을 벌였다. 제노바는 피사의 세력을 줄이는 데에 성공했지만 15세기 세력이 쇠퇴하며 베네치아에게 해상 패권을 넘겨줬다. 육상에서는 피렌체와 밀라노, 베네치아 3국이 패권을 나눠가졌다. 1454년에는 '로디 조약'으로 40년 동안 3국 사이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베네치아가 해상 패권을 꽉 휘어잡고 있었던 덕분에, 이같은 평화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인들은 저멀리 동남아시아까지 원정을 나가며 세계로 뻗어나갔다.


3.3. 메디치 가문[편집]



파일:Cosimo_di_Medici_(Bronzino).jpg


파일:Lorenzo_de_Medici.jpg


파일:medici riccardi palace.jpg

코시모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
메디치 가문의 궁전
13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피렌체의 지배 가문은 '알비치 가문'이었다. 그러나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메디치 가문이 힘을 키우더니 알비치 가문의 아성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라 불리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세를 불려나갔다. 그 다음에는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가 대를 이어 메디치 은행을 당대 유럽 최대 규모 은행으로 발돋움시켰다. 1433년 알비치 가문이 수작을 부려 코시모를 피렌체에서 쫒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바로 다음 해에 친 메디치 성향의 시뇨리아가 당선되며 즉각 귀환했다. 알비치 가문과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한 메디치는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피렌체의 지배 가문이 되었고 사실상 피렌체를 상징하는 가문으로 떠올랐다.

당시 피렌체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를 잇는 거대한 상품 무역로를 장악한 상태였다. 워낙 중요한 도시였기에 1439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직접 피렌체를 찾아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을 정도. 동로마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자 수많은 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려왔고 메디치 가문이 세운 아카데미아는 신플라톤주의 사상 연구의 산실이 되었다.

피렌체는 1532년까지 공화국으로 남아있었다. 이 공화정 시기의 피렌체는 명실상부한 르네상스의 중심이자 대표였는데 이 1490년과 1520년 정도 사이의 몇 십년에 달하는 짧은 기간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라고 부른다.[12]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와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이 두 형제는 예술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으며 르네상스 발전에 전념했고 생애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음에도 대중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사실상 피렌체의 군주로 군림했다. 특히 코시모의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는데, 1454년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 로디 조약을 맺어 밀라노와의 길고긴 전쟁을 끝내 북이탈리아에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한편 예술과 문화 진흥에 힘써 피렌체를 유럽 최고의 문화 강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시모가 죽자 유약한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의 뒤를 이었으나 5년 만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피렌체는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장악했다. 로렌초는 '대인 로렌초(Lorenzo Magnifico)'라고 불릴 정도로 코시모의 뒤를 잇는 역대급 위인이었다. 가문에서 어릴 적부터 교양 교육을 받아 예술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뛰어났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피렌체의 100인 위원회를 70명으로 줄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 다만 사업상에서는 코시모만큼 성공적이지 못해서, 그의 임기 하의 메디치 은행은 서서히 기울어갔다. 밀라노와의 관계는 여전히 우호적이었지만 반대로 교황과의 관계는 악화하여 교황이 그를 죽이려 시도한 적까지 있다. 암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대신 그의 남동생 지울리아노가 죽었고, 로렌초는 이를 빌미로 교황과의 전쟁을 일으켜 메디치의 피렌체 장악력을 강화했다.


3.4. 전이탈리아로의 확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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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경당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피렌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르네상스는 점차 시에나, 루카 등 인근 토스카나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토스카나 문화는 얼마가지 않아 곧 북이탈리아 전체의 지배 문화가 되었고, 특히 문학 분야에서는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토스카나 방언이 1타 언어였다. 또다른 강국 밀라노 역시 1447년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권력을 잡은 이후로 빠르게 변모했다. 스포르차 가문도 메디치를 따라 예술에 막대한 투자를 퍼부었고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들 중 하나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끌어들이는 등 피렌체 못지않은 북이탈리아의 문화 강국으로 성장했다.

아드리아 해를 장악하고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던 베네치아 역시 르네상스의 물결에 빠르게 동참했다. 특히 베네치아에서 발흥한 르네상스는 아예 '베네치아 르네상스'라고 따로 부를 정도로 번영을 누렸는데,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인근 페라라, 만토바, 우르비노 등의 도시들에도 전파됐다. 북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도 르네상스에 휩쓸렸다. 1443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나폴리를 정복하고 남부 일대를 안정화시켰는데, 이 알폰소 5세 역시 당대 유행하던 르네상스 기풍을 받아들여 프란체스코 라우라나, 안토넬로 데 메시나, 시인 야코포 산 나자로, 인문주의 학자 안젤로 폴리치아노 등을 후원하는 등 나폴리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한때 세계의 수도라는 명성을 자랑하던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417년에 이미 교황이 아비뇽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왔지만, 르네상스 초기까지만 해도 로마는 여전히 폐허 유적 도시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1447년 새롭게 교황에 즉위한 니콜라오 5세가 로마를 새롭게 단장시키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에 착수하며 로마 르네상스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인문주의 학자 출신 실비우스 피콜로미니는 1458년 비오 2세로 즉위하기까지 했다. 교황들은 메디치 가문과 보르지아 가문 등 부유한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면서 자연스레 르네상스에 큰 관심을 가졌다. 식스토 4세는 니콜라오 5세의 유지를 이어 시스티나 경당 건설을 명령했고 바티칸 도서관 건립 등 로마 전체를 아름다운 르네상스풍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식스토 4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데르 6세는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산탄젤로 성으로 요새화했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을 시켜 교황 사도궁 '보르지아 아파트'를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수많은 교회와 성당들을 개축했다. 비오 3세의 짧은 통치 이후 즉위한 율리오 2세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석을 놓았고,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 역시 이 율리오 2세 시대에 그려졌다. 전사 교황이라 불리던 율리오 2세는 프랑스의 입김을 걷어내고 교황령을 재건했는데 이 국력을 토대로 막대한 예술 투자를 했던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 역시 예술광이었다. 르네상스 시기 최고로 많은 후원을 퍼부은 교황으로 라파엘로를 대폭 밀어주는 등 그림을 매우 장려했다.[13] 다만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을 위해 율리오 2세가 모아둔 돈을 죄다 탕진하다가 면죄부를 팔아치워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치는 등 훗날 종교개혁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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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정수 성 베드로 대성당
르네상스가 전 이탈리아로 확산되면서 르네상스의 성격도 조금씩 변해갔다. 1400년대 후반 들어서는 지배 계급과 귀족들이 르네상스의 이상을 완전히 독점하기 이르렀다.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무명에다가 돈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많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귀족들의 금전적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버렸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점점 취향이 귀족적, 세속적으로 변해갔으며 르네상스 예술은 갈수록 사회 권력층의 입김이 강해졌다.

또한 문화 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게만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이었으나 인구의 4분의 3은 여전히 시골에 살며 농업에 종사했다. 이 농부들의 삶은 르네상스 시대나 중세 시대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봉건제가 발달하지 못한 북이탈리아의 경우 대부분이 자영농이거나 소작농이었지만, 이들은 르네상스가 오든말든 딱히 신경 쓰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일상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다만 도시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도시는 점차 귀족들만큼이나 배타적인 상인 계급들이 장악해나갔다. 이 상인들은 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가지고 도시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이 부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에 아낌없이 뿌렸다. 그 아래에는 상인들의 비호를 받는 예술가와 장인들이 있어 높은 대접을 받았다. 장인이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다른 유럽 지방들에 비하면 확연히 차이가 있는 부분. 이 상인, 예술가, 장인 트리오가 함께 르네상스의 발전을 이끌어나갔던 것이다. 다만 도시의 비식자층인 하류층들, 빈곤층은 르네상스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들 역시 농민들처럼 르네상스의 영향을 딱히 받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당시 북이탈리아의 빈부격차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는데, 압도적인 부를 홀로 독차지한 몇몇의 막대한 후원 덕분에 오히려 르네상스가 발전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3.5.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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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년의 사코 디 로마
분명 유럽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고 지중해 무역이 성행하던 15세기까지는 나름대로의 군사력과 재력, 정보망을 틀어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에 있었다. 도시국가의 군주들이 무식한 힘싸움보다는 문화와 부의 과시를 통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도 한몫했다.

15세기 말까지는 백년전쟁 등으로 대륙의 사정이 혼잡해서 외침의 걱정은 없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백년전쟁을 마무리한 후 이탈리아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고,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을 비롯 거의 전 유럽을 한 손에 틀어쥔 합스부르크의 강대한 황제 카를 5세의 출현으로 이탈리아는 강대한 영토 국가들의 영향하에 놓이기 시작한다. 이제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영토 국가는 이탈리아 개별 도시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군사력이 강해진 것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땅따먹기의 현장으로 변하고 특히 1525년 이탈리아를 둘러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카를 5세에게 박살나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이에 당황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떻게든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코냑 동맹을 결성해 발버둥쳤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카를 5세는 교황의 비열함을 비난하면서 가톨릭 군대로 하여금 교황령을 털어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14] 이 전쟁에서 시원하게 털린 교황이 6개월이나 유폐에 가까운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고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 건물은 개박살나서 현재 로마 시내에서는 르네상스풍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사코 디 로마는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종결지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이탈리아의 부는 고갈되고 문화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한편[15] 대부분 지역이 외세의 지배에 놓이고 만다. 이 시점을 흔히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분기점'이라 칭한다. 이후 결국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카를 5세 밑에 굴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는 지난 세기의 영화를 대륙에 내준 채 3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대륙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그 나름대로 각국의 토양에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철학자, 인문학자, 예술가, 건축가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이탈리아 못잖게 상공업과 개방성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의 경우 자체적으로 회화 예술이 붐을 일으켰다. 당시에 확산된 금속 활자 인쇄술 덕분에 15세기말부터 유럽 널리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전파되지만, 유럽 전체가 균일하게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었고, 군주론이라든가 인문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계약설은 훗날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 체제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적어도 계몽주의의 새로운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각국 귀족과 군주들의 후원 하에서 다방면의 발전이 계속될 수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음에도 이탈리아 내부에서 전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전쟁 이전까지 이탈리아가 여러 군소 도시국가로 나누어있었던 탓이 크다. 오히려 이탈리아 외부 국가들에서 연구가 활발했는데 19세기까지 이탈리아는 외지인들에게 경이의 땅이자 관심의 대상이었고 당연히 그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조르조 바사리 등 이탈리아인의 시각에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도 존재한다.


4. 건축[편집]



4.1. 초기 르네상스 건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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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탄드레아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두오모의 돔
아이러니하게도 르네상스 시기 이전의 이탈리아 건축은 기술적으로 고딕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로마 제국 문명의 본류는 이미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으로 떠나가 버렸고, 그렇게 이탈리아 땅이 버려진 사이 북쪽의 '야만인'들은 자신들이 멸망시킨 로마의 건축 유산을 잘 이어받아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모방을 넘어 고딕이라는 대담하고도 놀라운 구조의 건축양식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딕건축으로 지어진 높은 성당과 거기에 들어간 기술 - 플라잉 버트레스, 리브볼트 등은 이탈리아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신기술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자존심이나 미학적인 취향의 다름으로 인해 고딕의 새로운 구조를 높이에만 집착해 추한 덧댐으로 마무리된 불완전한 구조로 규정했다.[16]따라서 르네상스 건축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을 모색하게 된다. "높이"에 집착하던 고딕과 다르게 건축물의 높이는 좀 낮더라도 건축의 "질서"에 집중한 것. 기둥과 창의 엄격한 배치와 구성,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례를 가진 장식을 강조하였다. 물론 기술적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11세기 즈음부터 토스카나 지방에서 주로 보이던, 십자형 로마네스크 교회의 중심에 팔각형 혹은 둥근 작은 이 올라가던 양식[17]도 계속 계승되어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러 성당들이 인상적인 거대한 을 구현하며 기술적인 성취도 이루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8]의 역작인 피렌체두오모가 거대한 돔을 얹은 성당들의 대표적인 예이다.[19] 다만 이 두오모를 비롯한 이 시기의 많은 돔을 얹은 건물들은 완성된 르네상스 양식과는 좀 다른 과도기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오늘날에 와서는 이탈리안 고딕 양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20]

이렇게 르네상스가 건축에 적용되기 시작한 시기의 건축을 '초기 르네상스 건축'이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미켈로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이 이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대가로 꼽힌다. 최초의 르네상스 건축가로도 평가받는 브루넬레스키는 수학적 비율에 대단히 신경을 많이 썼다. 수학적 비율에는 별 관심이 없던 고딕과는 달리,[21] 고대 로마의 건축은 반원형 아치의 너비가 높이의 정확히 2배 만큼 넓은 규칙을 따르는 등 단순한 수학적 비율을 정확히 지키고 있었다. 이에 경탄한 브루넬레스키는 건물 전체의 구성과 비율, 그 대칭성에 매료되어 고대 로마의 건축을 모방한 건물들을 차차 설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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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두오모 돔 내부 모습
브루넬레스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자 최초의 업적은 바로 피렌체 두오모의 돔 설계였다. 당시 두오모는 고딕적인 요소를 상당히 차용하고 있어서 뾰족한 고딕 아치와 고딕식 골조를 사용한 건물이었는데, 여기다가 고대 로마의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은 거대한 벽돌 돔을 올려버린 것이다. 판테온의 거대한 콘크리트 돔에는 수직 골조가 무게를 분산하여 돔이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있으며 꼭대기의 종석이 없이 8m 가량의 구멍이 뚫려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에 영감을 받아 8개의 외부 리브와 16개의 내부 리브로 돔의 하중을 지탱, 수평 골조로 보강한 다음 훨씬 가벼운 충전재로 속을 채우고 꼭대기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 놔두었다. 이렇게 하면 돔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고, 르네상스 초기 건축의 대작이라고 부를만한 작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미켈로초 역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여러 예술가들 중 하나였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 1444년 코시모 데 메디치의 의뢰를 받아 완성했고 이후 메디치 가문의 정궁으로 사용됐다. 소박한 취향이던 메디치의 뜻을 따라 외부는 투박한 돌로 장식하고 로마식 기둥도 세우지 않았으나 내부는 엄청나게 화려하다. 이후에도 산 마르코 수도원의 도서관, 피에솔레의 빌라 메디치를 지었고, 나중에는 라구사에 궁전을 짓는 등 이탈리아 국외에서 르네상스 건축을 선보인 최초의 건축가들 중 하나로 이름을 남겼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그리스-로마 건축으로의 회귀를 내세우며 산탄드레아(Sant'Andrea) 성당을 건축했고 이렇게 르네상스의 표준적인 양식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브루넬레스키의 산토 스피리토 성당 등 기둥과 보를 이용한 경쾌한 모습과는 달리 엄청나게 두꺼운 벽 구조와 둥근 드럼 천장 등으로 무거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어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로마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장중한 분위기의 파사드가 핵심. 산탄드레아 성당은 이후 궁극적인 성당 건축이라 할 수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원근법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남겼고, 건축과 조각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수학적 비례를 제시하고 정립하였다. 그가 남긴 다른 업적에는 루첼라이 궁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등이 있다.


4.2. 하이 르네상스 건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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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파르네세 궁전
판돌피니 궁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는 1490년, 혹은 1500년 즈음에 시작되어 1520년 라파엘로의 죽음으로 끝난 짧은 시절을 가리킨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메디치 가문이 있는 피렌체 등 북중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가장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시기로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의 이미지가 바로 이 '하이 르네상스'의 것이다. 이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바로 르네상스의 대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토 브라만테 등이다.

이탈리아의 건축은 초기 르네상스를 거쳐 날로 발전했고 하이 르네상스 건축 시기에 더더욱 발전했다.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가들은 도나토 브라만테, 안토니오 다 상갈로 등이 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건축을 본땄다지만 하이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은 이미 그 시대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전에 비해서 훨씬 장식적이고 형식적인 요소가 강해졌고, 조각상, 돔, 큐폴라의 모습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시대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는 도나토 브라만테는 1444년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밀라노 공작 아래에서 20년 동안 일하다가 밀라노가 프랑스에 패배해 함락당하자 로마로 향해 교황 아래에서 일했다. 밀라노에서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에 지은 십자형 성당. 벽돌로 만들었고 화려한 테라코타로 장식한 북이탈리아식 전통 건축법을 따랐다. 부지 문제 때문에 신랑이 익랑보다 더 멀리 뻗어있는걸 제외하면 거의 대칭이다. 팔각형의 드럼 내부에 숨겨져서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무려 직경 20m에 달하는 거대한 반구형 돔을 천장으로 이고 있는 건물이다. 그 외에 옛 베스타 신전의 외양을 본딴 '템피에토'를 지어 '건축학적으로 완벽한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특히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을 받아 1506년 성 베드로 대성당, 벨베데레 정원 등 역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들을 설계했다.[22]

안토니오 다 상갈로는 군사 기술자의 가족으로 태어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이유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 참여한 것보다는 '파르네세 궁전'의 건축에 있다. 파르네세 궁전은 1530년대에 지어져 '이 시대의 가장 웅장한 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넓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부지에 지어진 파르네세 궁전은 그 규모급의 건축물에는 드물게도 석조 외벽이 아닌 부드러운 치장 벽토를 사용했고 부드러운 분홍빛 벽을 배경으로 소박한 창문, 정교한 틀의 반복 등으로 우아한 느낌을 선사한다. 여담이지만 3층은 원래 설계안에 없었는데 미켈란젤로가 따로 설계해서 덧붙여넣은 것이고, 여기에 사용된 석회는 콜로세움에서 뜯어왔다.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 산치오 역시 화가 뿐만 아니라 건축가로서 유명한 편이다. 페루자에서 설계법을 배우고 한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활약했고 안토니오 상갈로와 함께 대성당 건설에 참여했다. 라파엘로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은 '판돌피니 궁전'. 고대 로마에서 모티브를 얻은 2층 배열의 창문을 달아 장중한 느낌을 주었다.

'하이 르네상스 양식'과 고딕 성당과 비교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뾰족하고 높은 첨탑과 외부로 나와있는 기둥들, 넓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높은 천장을 가진 성당은 고딕양식이다. 반면 네모와 같은 도형과 그리스, 로마식 기둥과 창으로 장식된 벽면, 그리고 건물 가운데의 거대한 돔과 그 아래의 큰 공간을 가진 성당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다만 이후 시대로 가면서 점점 위의 특징들이 섞이게 된다는 점은 유의하자. 이 특징들은 고대 로마의 건축을 응용한 것으로 레온 알베르티에 의해 로마 고전주의의 부활과 함께 등장했으며 그동안 서유럽의 건축 구조에서 등한시되어왔던 돔이 다시 건축구조로 나타나게 된다.


4.3. 매너리즘 건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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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시아 도서관의 계단
빌라 카프라
마시모 알레 콜로네 팔라초
그러다가 16세기에 고전적인 균형미와 조화에 집착한 르네상스 양식에 대한 반발심으로 매너리즘 건축이 등장했다. 매너리즘[23]은 일반명사로는 '습관적 반복, 상투적인 모방, 진부한 기교' 등을 일컫는 말로 새로운 창조력이 상실되었다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있지만, 고유명사가 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인공적인 기교를 통해서 구성의 긴장과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예술 사조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사조나 화풍을 뜻한다.

초기 ~ 하이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점차 지나치게 균형과 조화에 집착하는 예술에 대한 반감이 생겨났다. 이미 다 빈치, 미켈란젤로, 바사리 등 천재적인 선배 예술가들이 앞서 모든 것을 정립해놓았으니 해부학, 빛, 관상학, 인간이 표현과 몸짓에서 감정을 등록하는 방식, 비유적 구성에서 인간 형태의 혁신적인 사용, 미묘한 톤 그라데이션 사용 등 이미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달성된 것처럼 보였다. 젊은 예술가들은 기존 르네상스 예술 내부에서는 더이상 예술적인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매너리즘이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려 새로움을 찾고자 했다. 위태로운 포즈와 비대칭을 통한 긴장감의 인위적인 조성, 무너진 원근감과 비합리적인 비율 등이 바로 이 매너리즘의 상징인 것이다.

오직 고대 로마의 조화와 비율만을 중시하던 르네상스 건축계에서도 매너리즘의 돌풍이 몰아닥쳤다. 대표적인 매너리즘 건축가들은 '발다사레 페루치', '줄리오 로마노', 미켈란젤로, 안드레아 팔라디오 등이 있다. 이들이 남긴 매너리즘 사조는 훗날 바로크 양식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이어진다.

발다사레 페루치는 1481년 시에나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활동했다. 대표작은 로마에 세워진 '마시모 알레 콜로네 팔라초'. 거리를 향해서 약간 둥글게 튀어나온 파사드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줄리오 로마노 역시 유명하다. 그 유명한 라파엘로의 제자인데 '팔라조 테'가 대표작이다. 거대한 프레스코화와 정원 동굴을 활용했는데 다소 불균형하고 정렬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일부러 긴장감을 유발하도록 만들었기에 그가 지은 건축물들의 전체적인 느낌은 혼란스럽다고. 놀랍게도 말년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역시 매너리즘 건축가들 중 하나다. 그가 남긴 최고의 매너리즘 양식 건물은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과 로렌시아 도서관. 특히 메디치 가문의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로렌시아 도서관의 현관은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세 방향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계단 때문에 위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르네상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라는 평을 듣는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전주의 건축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기존의 건축가들은 콜로세움이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처럼 특정 유적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팔라디오는 특정 건물이 아닌 일반적인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영감을 찾았다. 그가 지은 건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빌라 카프라'라고 하는데 돔이 얹힌 중앙 홀과 4개의 동일한 현관이 모든 면에 지어진 빌라로 마치 옛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케 한다.


4.4. 유럽으로의 확산[편집]



파일:샹보르 프랑스 성채 인도.jpg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의 대표작인 샹보르 성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건축은 알프스 이북으로 넘어가 독일, 프랑스 등으로 퍼져나갔다. 알프스 이북 너머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은 프랑스였다. 이탈리아와도 지리, 인종,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이미 고대 로마 시대부터 전 국토가 속주에 편입되어 로마 건축 양식을 경험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었다. 또한 롬바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기 때문에 교황청이 주도하던 르네상스 표준 고전주의를 적극 수입할 수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가 르네상스 애호가였기에 지도층의 반발도 적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했고, 그중에 1541년 이주한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는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부분적으로 프랑스 전통 양식을 혼합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을 지으면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피에르 레스코와 필리베르 들로름를 거쳐 세르소 가문에 이르러서는 점차 이탈리아 르네상스 표준 양식과도 거리가 먼 프랑스만의 르네상스 건축이 발전한다.

영국은 1세기가 지난 16세기 들어서야 뒤늦게 르네상스 건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와 먼 것은 물론 종교개혁의 여파 때문에 1534년에 교황청과 단절되는 등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로마와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권력층의 성채나 생활환경 등에서 이탈리아 풍이 유행하는 형식으로 르네상스 건축이 단편적으로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양식 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가 지나서였다.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은 프랑스와 달리 자연스러운 예술운동이 아니라 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는 특징이 있다. 스튜어트 왕조개신교와 연합하면서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상징할 새로운 건축양식을 원했다. 이때 바로 중세 가톨릭을 이끌던 고딕을 밀어내고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선택된 것이다.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은 대체적으로 '이니고 존스'[24] 한 개인에 의해 선도되었고, 따라서 독창성도 부족했다.

독일의 경우 영국보다도 더욱 침체된 상태였다. 개별 건물에 부분적으로 르네상스 건축을 사용하는 정도였고, 정식 양식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미진한 상태였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부터 불거진 가톨릭·개신교 간 갈등이 폭발한 30년 전쟁과 같은 외부 요인 탓이 컸다. 15세기 독일과 네덜란드의 미술을 '북유럽 르네상스'로 지칭할지, '후기 고딕'으로 지칭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북유럽 르네상스의 의미를 긍정하는 편이다.[25]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서야 등장한 '고딕 매너리즘'은,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달리 분산적 장식을 이용한 흥겨운 율동이 주요 특징이었다.

다만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 당시 문명 발전의 최전으로 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식의 역사관에 기초한 윗 문단은 다소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다. 같은 시대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을 단순비교하는 것이 맞는 문제인지 생각해보자. 우선 본문에서 언급되는 독일에서 유행한 '매너리즘'은 '국제 고딕양식'이라고 부르는 '고딕 매너리즘'이지, 르네상스 이후의 '매너리즘'와는 다르다.

독일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다른 양식이 유지되었던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던 고전주의적인 양식이 독일인들의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전주의적인 양식 외에는 독일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같은 관심사들을 공유하고 창작에 활용했다.[26] 실제로, 독일인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달리 매우 쉽게 유입되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에폴로 등이 독일 내에서도 활동하고, 많은 독일인 건축가들과 화가, 조각가들이 바로크 시대에 활동하게 된다. 이는 비슷한 사정이었던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5. 조각[편집]


서양 미술사의 시대 ·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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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align=center><width=130><colbgcolor=#777,#888888> 원시 미술
~ 기원전 12세기
|| 선사 미술 | 메소포타미아 미술 | 이집트 미술 ||
||<-2><bgcolor=#fff,#191919>

||
|| 고대 미술
기원전 12세기 ~ 서기 4세기
|| 그리스 고졸기 미술 | 그리스 고전기 미술 | 헬레니즘 미술 | 로마 미술 ||
||<-2><bgcolor=#fff,#191919>

||
|| 중세 미술
4세기 ~ 14세기
|| 비잔틴 미술 | 로마네스크 | 고딕 ||
||<-2><bgcolor=#fff,#191919>

||
|| 근세 미술
14세기 ~ 19세기
|| 르네상스 | 매너리즘 | 바로크 | 로코코 |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 아카데미즘 ||
||<-2><bgcolor=#fff,#191919>

||
|| 근대 미술
19세기 ~ 20세기
|| 모더니즘 | 리얼리즘 | 인상주의 | 탈인상주의 | 라파엘 전파 | 미술공예운동 | 보자르 | 아르누보 | 아르데코 | 탐미주의 | 분리파 | 표현주의 | 다리파 | 청기사파 | 더 스테일 | 바우하우스 | 추상회화 | 야수파 | 미래주의 | 다다이즘 | 초현실주의 | 기하학적 추상 | 아방가르드 | 구축주의 | 구조주의 | 절대주의 | 상징주의 | 입체주의 | 구성주의 | 퇴폐미술 | 권위주의 예술 |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
||<-2><bgcolor=#fff,#191919>

||
|| 현대 미술
탈근대 미술
20세기 ~
|| 포스트모더니즘 | 행위예술 | 대지 예술 | 개념미술 | 설치예술 | 추상표현주의 | 미니멀리즘 | 스큐어모피즘 | 팝 아트 | 옵아트 | 키네틱 아트 | 해프닝 | 서정적 추상 | 앵포르멜 | 아르테 포베라 | 상황주의 | 제도비평 | 페미니즘 미술 | 소수자 미술 | 탈식민주의 미술 | 신표현주의 | 전유미술 | 극사실주의 | 플럭서스 | 비디오 아트 | 사운드 아트 | 미디어 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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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800px-Parco_di_pratolino,_appennino_del_giambologna_05.jpg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다비드상
모세 상
아펜니노 거상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분야들 중 하나. 고대 로마의 조각품들을 모방한 조각품들이 우수수 쏟아져나왔다. 특히 당대 르네상스 조각의 중심지는 북부의 피렌체로, 특히 15세기 유럽 조각의 중심부는 그냥 피렌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시대 피렌체의 주요 조각가에는 오르카냐, 난니 디 반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난니 디 바르톨로, 로렌초 기베르티, 도나텔로,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안토니오 로셀리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자코포 산소비노 등이 있다. 이는 피렌체에서 출생한 거물 조각가들만 나열한 것으로, 실제로 이 당시 이탈리아는 수많은 거장 조각가들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르네상스 조각사 역시 초기 르네상스, 하이 르네상스, 매너리즘, 후기 르네상스 이렇게 구분된다. 1400년 만들어진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기점으로 초기 르네상스가 시작됐다고 보고, 1499년에 완성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그리고 1501년에 시작된 대작 다비드상의 제작을 하이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본다. 1527년 사코 디 로마로 인해 로마 르네상스가 절단난 시점을 매너리즘의 시작으로 보며 이후 매너리즘은 후기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까지 이어진다. 르네상스 조각이 언제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1600년대 즈음에 로마에서 바로크 양식이 르네상스 양식을 완전히 몰아내는 걸 기점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나눈다.

당시 조각가들은 여러 가지 재료들을 사용해서 작품들을 깎아냈다. 대리석이 가장 일반적이고 선호되는 재료였는데 특히 토스카나 북부의 알프스에서 산출되는 순백색의 카라라 대리석을 최고급으로 쳤다. 혹은 아드리아 해 건너 이스트리아 지방에서만 나는 색색의 대리석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동은 매우 비싼 재료였다. 같은 양의 최고급 대리석과 비교해도 10배 가량 더 값비쌌을 뿐더러 함부로 구하기도 어려웠다. 부유한 사람들은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에다가 금박을 입혀 부를 과시했다. 나무도 많이 썼다. 물론 값어치나 품질은 재료들 중에 가장 떨어졌지만, 무게가 제일 가볍다는 특성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조각할 때 나무를 많이 사용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걸린 '브루넬레스키의 십자가'도 나무로 제작했다. 또한 매우 부드러워 조각하기 쉬웠기 때문에 성가대석처럼 매우 정교한 장식이 필요한 곳에도 나무를 이용해 장식했다. 성당들이 값비싼 석상이나 청동상을 구매할 여력이 없어 주석 유약을 바르고 구운 테라코타로 만든 조각들을 전시해놓는 경우도 흔했고 석고나 회반죽에 조각을 새기기도 했다.

르네상스 조각품의 주요 발주처는 바로 교회였다. 성당들은 수백 수천 개의 조각들을 발주했고 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북이탈리아는 유난히 조각상들을 건물 외부보다는 내부에 전시해놓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 몇 안되는 예외가 밀라노 대성당이다. 수 백개의 조각상들을 외부로 노출된 벽감 안에 세워놨는데 대부분은 너무 높은 데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고. 이 외에도 여러 조각상들이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역시 처음에는 피렌체 대성당 동쪽 지붕 쪽에 놓으려고 했는데 만들어놓고 보니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따로 전시하고 있는 것 뿐이다.

교회 내부에는 부자와 유력자들의 무덤이 자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묘지를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중세식으로 우리가 아는, 관뚜껑 위에 누워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양식의 무덤을 선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살아서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서 무덤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무덤이 이런 양식이다. 레오 10세의 사례 이후부터는 어떤 인물이던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앉아있는 모습을 조각해서 무덤 뒤에 안치하는 모습의 무덤이 일반화되었다.

공공장소에도 조각품들이 넘쳐났다. 피렌체인들은 공공 조각품들을 도시의 자랑거리로 여겼고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앞에 수많은 조각상들을 전시해놨다. 물을 공급하는 분수도 중요한 조각품이었다. 분수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귀중한 물 공급원이었는데, 이같은 실용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도시 미관 장식 목적으로도 사욛됐던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볼로냐의 넵튠 분수나 피렌체의 넵튠 분수 등이 있다.

무덤 위에 세울 조각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승마상도 유행했다. 고대 로마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권력자 찬양 목적이었다. 가장 유명한 승마상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완성작 '스포르차 말'이다.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그의 아들을 위해 발주한 실물 규모의 승마상이다. 다 빈치는 1489년에 이 프로젝트를 맡았고 1492년 겨울에 점토 모형을 완성했다. 이 모형은 당시 밀라노에서도 대호평을 받아 이제 청동으로 만드는 일만이 남았지만, 하필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대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청동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승마상 제작 프로젝트는 무위로 돌아갔다. 게다가 만들어놓은 점토 모형마저도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점령했을 때 궁수들이 표적으로 삼고 사격 연습을 하면서 파손당했다. 현재 남아있는건 점토 모형을 묘사한 그림 몇 점과 작은 밀랍 모형 몇 개 뿐이다.

초기 르네상스에는 기베르티 로렌초에 의해 새로운 기법이 탄생했으며, 도나텔로는 조각이라는 장르를 건축으로부터 독립시켰다. 르네상스 특유의 개성적인 표현과 사실주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작품인 가타멜라타 장군의 기마상도 그의 작품, 더불어 실물크기의 누드상인 다비드상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상과는 다르다. 도나텔로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모양도 다르다.

천재적인 건축가,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이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완벽함의 상징이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에 비견될만한 걸작들을 쏟아낸다. 당시 발굴된 고대 조각의 최고 걸작인 라오콘 군상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후 파묻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6. 과학[편집]


과학혁명 문서 참조

7. 회화[편집]



파일:external/thinkzone.wlonk.com/RenaissanceArtists.png

르네상스 하면 아무래도 회화들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르네상스는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파묻혀있던 회화를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에 올려 놓았다.

7.1. 초기[편집]


초기에 활약한 화가들로는 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 프라 안젤리코, 보티첼리가 있다.

조토는 사실적인 표정의 묘사와, 투시, 명암 등으로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격 인물이었고 마사초는 최초로 선 원근법을 사용한 그림을 그렸다. 안젤리코는 수태고지를 그렸고 보티첼리는 앞서 세 화가와는 달리 그리스의 고전 신화의 주제를 그림으로 그렸다. 앞서 세 사람이 르네상스 기술의 선구자들이라고 한다면 보티첼리는 정신적인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7.2. 전성기[편집]


  •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 라파엘로 산치오[27]


7.3. 외전 북유럽[편집]


진작에 봉건제는 붕괴했는데[28] 아직 정치체제는 절대군주정으로 이행하지는 않았던 북유럽은 초기 그리스도교와 성경의 원전에 관심을 둔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뮈스토마스 모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볼 수 있다.

결국 이쪽은 아직도 종교화가 수두룩한데 비잔틴 미술과는 다르게 애들이 좀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다는 소리다.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알브레히트 뒤러, 얀 반 에이크, 히에로니무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이 있다.

뒤러는 알다시피 동판화, 종교화를 주로 제작해 판화의 대가로 불리었다. 하지만 회화실력도 웬만한 화가 뺨 친다. 보스는 약간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르네상스에선 보기 힘든 독창성을 지니고 있는데 의의를 둔다. 브뤼헐은 민간의 미신, 관습을 주로 그렸다. 덕분에 그의 그림은 시대상이 아주 잘 반영되어있다. 반 에이크는 아주 세밀한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서는 두 부부의 뒷편에 있는 거울에 맺힌 상까지 그려내었다.

8. 르네상스 음악[편집]


서양 음악사의 시대·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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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음악
(~BCE 12c)

선사 음악 메소포타미아 음악 이집트 음악
고대 음악
(BCE 12c~CE 4c)

이스라엘 음악 그리스 음악 로마 음악
중세 음악
(CE 4c~14c)

중세 음악
근세 음악
(CE 14c~18c)

르네상스 바로크 음악 고전주의
근대 음악
(CE 18c~19c)

낭만주의 국민악파
현대 음악
(CE 19c~20c)

인상주의 표현주의 신비주의 음렬주의 신고전주의
동시대 음악
(CE 20c~)

포스트모더니즘 대중음악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르네상스 음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르네상스 개념에 대한 비판[편집]


미슐레, 부르크하르트, 페이터는 르네상스를 역사의 한 시대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19세기식 개념을 만들어냈다. 예술과 문화에서의 성취가 개인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문명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는데, 15세기부터 계속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설명을 제시하기보다 그것을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향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 연구자들은 제한적인 민주주의, 교회에 대한 회의주의적인 태도, 예술과 문학의 힘, 다른 문명들에 대한 유럽 문명의 승리를 찬양했다. 이러한 가치들은 19세기 유럽 제국주의를 지탱했다.

(중략)

그린블랫이 저서 제목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제 그와 동료 연구자들은 르네상스를 설명할 때 ‘근대 초’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사회사에서 온 것으로 미슐레와 부르크하르트의 이상적인 설명보다 좀 더 회의적인 르네상스와 근대 세계의 관계를 제시한다. 이 용어는 또한 르네상스라는 개념을 19세기 저자들이 제안했던 문화적 ‘정신’으로 보기보다는 역사 속의 한 시대로 강조한다.

-제리 브로턴(Jerry Brotton), 『르네상스』


역사에서 르네상스란 없다. 다만 고대로의 복귀라는 가면 아래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변화만 있을 뿐이다. 일련의 르네상스란, 정확하게 말하면 고대에서부터 근대가 완전한 형태를 취한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적 특징이다. 서양사에서는 8~9세기 카롤루스 르네상스, 12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12~15세기에 시작되고 여타 유럽에서는 15~16세기에 꽃피운 르네상스, 예술과 문학과 신학에 국한된 18~19세기 르네상스(신고전주의, 중세가 고대를 대체한 신고딕주의, 신토마스주의 등)와 같은 여러 르네상스가 있었다. 르네상스란 중세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 항시 권위를 과거에서 찾고 황금시대를 옛날에서 추구하는 중세를 특징짓는 현상이다.

-자크 르 고프, 『서양 중세 문명』


오늘날에는 르네상스를 어떤 '정신'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더이상 지지받지 않는다. 즉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언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무언가'라기보다는 그냥 간단하게 '근대 초'라는 것.

르네상스를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19세기식 개념인데, 여기서 제시되는 소위 '정신'이라는 것을 뜯어보면 제한적 민주주의, 교회에 대한 회의주의, 예술과 문학의 힘, 유럽 문명의 승리 등 19세기 유럽 사회의 이상형에 부합한다. 즉 소위 르네상스 '정신'이라는 것은 19세기 유럽인이 생각하던 '예쁜 그림'을 근대 초의 유럽에 투영하여 인식한 것이다. 나무위키의 이 문서에서는 르네상스를 어떤 '정신'으로 해석하는 19세기식 관점이 반영되어 있으니 이를 감안해서 읽을 것.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것들 대부분이 사실은 중세시대부터 있었고, 시간이 흐르며 발전한게 많다는 것도 밝혀져 재평가에 한 몫 하기도 했다.[29]


10. 같이보기[편집]


[1] 왜 이런 애매한 표현이 쓰였는지는 아래 '르네상스 개념에 대한 비판' 참고.[2] 그리스 학자들이 꼭 동로마 멸망을 기점으로 대거 이주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동로마가 쇠락하면서 그리스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안전한 서유럽으로 도피하고 있었다. 1396년 초청을 받아들여 피렌체에 이주한 동로마의 외교관 겸 학자 마누엘 크리솔로라스(Manuel Chrysoloras)를 시작으로 동로마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수많은 공헌을 했다.[3] 그래서인지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는 오늘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적인 지역으로 손꼽힌다.[4] 교황령로마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형태로 존재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는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이 사실상 분단 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력한 군주가 나타난들 교황령을 넘어서 반대쪽으로 군대를 보낼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게 1100년이 넘게 이어졌다는 것... 그래서 현재의 이탈리아 역시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은 서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이며 이탈리아 내에서 남북 간에 지역갈등이 심각하다. 북부지역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정당이 이탈리아 국회에 입성했을 정도이니...[5]백년전쟁이 끝나자마자, 프랑스(발루아 왕조)와 오스트리아-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탈리아 전쟁(1494~1559)이 시작되고, 피렌체메디치 가문도 전쟁에 휩쓸리고, 사코 디 로마로 중세가 완전히 끝나고만다. 르네상스는 유럽본토로 망명하고, 이탈리아 본토는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6] 유럽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프랑스왕이 교회에 과세를 부여하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을 교황으로 세움으로써 시작된 일련의 사태. 많은 경우 프랑스왕이 교황을 아비뇽으로 납치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된 일은 아니다.[7] 서방교회 대분열(~1449)로 인한 대립교황의 난립으로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으며 니콜라오 5세시기가 되어서야 그 혼란을 마무리짓고 재건을 시작한다.[8] 1502년 마인츠(프랑크푸르트)에서 활발했으며, 다량의 면죄부를 만들기 위해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이 곳 조폐공사 직원이자 금속세공업자의 아들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금속활자 참고)는 이 기술로 그리스도교와 연을 맺고 더 나아가 성경을 출판하며 전국구 스타가 된다. 인쇄술의 발달은 마르틴 루터95개조 반박문을 널리 퍼트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지만, 이는 훗날의 이야기.[9] 헷갈리는 비슷한 사조로 고전주의(Classicism, 어원:시민최상위계급), 신고전주의(by 폼페이유적발굴)가 있다.[10] 첨언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면 예술가들은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된 르네상스 시기와 달리 점점 간섭받고 억압 받으면서 소심한 반항을 담아 그림을 그리곤 했고(유럽본토의 종교개혁(1517)으로 교회 권위에 도전하는 분위기가 늘어자는 시기였다.), 또한 사코 디 로마 같은 충격과 공포를 겪으면서, 교황(=메디치 가문) 주위의 르네상스는 매너리즘(최후의 심판(1533) 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11] 다만 전투의 빈도에 비해서 인명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용병들이 애초에 제 목숨을 그렇게 내던지면서까지 격렬하게 전투에 임하지 않았으며 용병 입장에서는 최대한 전쟁을 질질 끌면서 급료를 받는게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세력이 강해진 용병들이 아예 도시들을 넘보는 상황도 많았다고.[12]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상스 양식이라는 것도 메디치가 피렌체 시의 절대권력이 된 이후에 등장한 소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혹은 '피렌체 르네상스'만에 국한된 것이다. 밀라노베네치아는 피렌체와는 다른 양식적인 특징이 있었다.[13] 반대로 조각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14] 다만 사코 디 로마 자체는 지휘관의 전사에 분노한 란츠크네히트들이 저지른 일탈이었고 실제로 소식을 전해 들은 카를 5세도 몹시 당혹해했다.[15] 문화의 경우 바로크까지는 그래도 건재했다. 카라바조도 있고... 유럽에서의 이탈리아 미술의 문화 주도권 상실은 1680년 베르니니 사망을 기준으로 본다.[16] 애초에 '고딕'이라는 단어 자체가 처음에는 이탈리아인들이 비하의 어조를 담아서 붙인 멸칭이었다.[17] 아퀴 성당이나 피사 대성당 등이 대표적. 이탈리아에만 이러한 돔이 건설된 성당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앙굴렘 성당 등에서 돔이 올라간 11세기의 로마네스크 건축물을 볼 수 있다.[18] 브루넬레스키는 건축공학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더해서 수학적 원근법을 발견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미친 셈.[19] 두오모는 돔이란 뜻이지만 대성당을 의미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성당에서 돔을 처음 올린 것은 아니지만, 당시 유럽에는 이 성당의 돔 크기를 능가하는 건축물은 없었다. 유럽 이외까지 포함하면 하기아 소피아와 Oljeitu Mausoleum이 가장 크다.[20] 실제로 두오모 성당은 고딕양식으로 계획하고 짓던 중에 여러 사정으로 공기가 연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행이 바뀌어버렸다!! 새로운 유행대로 돔을 얹으려니 이미 너무 고딕양식에 맞춰 커져버린 기틀에 맞는 돔을 얹기 난해해서 무려 51년을 다들 손가락만 빨며 바라보고 있던 중에 브루넬레스키가 해결하면서 유명해진 것. 브루넬레스키는 이전까지 그저 놀랍게도 금 세공장인이었다. 이 프로젝트 하나로 건축자로써 입지를 굳힌 것.[21] 위로 수직적으로 뻗어나가는 고딕 양식은 위치에 맞게 그때그때마다 아치나 기둥의 길이너비 비율을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건물을 지었다. 때문에 동일한 구조 내에서조차 서로 다른 각도의 아치가 존재할 정도로 수적 비율이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22]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되기 전에 이미 죽어 끝을 보진 못했다. 그의 뒤를 이은 설계사들은 마음대로 브라만테의 설계도를 변경했는데, 미켈란젤로가 다시 설계 지휘권을 잡자 브라만테의 설계안 상당수를 되살렸다고 한다.[23] 이탈리아어 : 마니에리스모 Manierismo[24] 1573~1652. 17세기 영국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르네상스 양식을 처음으로 영국에 소개한 위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하던 중 르네상스 건축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 왕실 건축가로 임용되어 큰 활약을 했다. 주요 작품에는 그리니치의 퀸스 하우스, 화이트홀 궁전의 연회궁 등이 있다.[25] 물론 북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담론이 처음 등장한 건 나치의 싹수가 보이던 1930년대(...)였었지만...[26] 독일에서 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지 않은 이유는 도시 단위로 다른 취향을 갖고 있던 독일의 상황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왕에 의해 국가 전체의 문화적 취향이 좌지우지 되는 프랑스처럼 어떤 한 취향을 가져가기 어려웠다는 것.[27] 셋 중에서는 라파엘로가 좀 대중적 인지도가 낮다. 그렇다고 작품성이 낮다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평범해서 대중적 인지도가 낮다. 각 이 셋 문서로 들어가면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다. 그래도 각각 요약을 하자면 고전 양식의 완성, 스푸마토, 공기원근법-다빈치 / 인체 표현양식 완성 및 천장화-미켈란젤로 / 짬뽕-라파엘로[28] 사실 북유럽 지역은 봉건제 시행 자체를 안했다.[29]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서 자본주의의 발달 미비를 이유로 중세 전성기로 보는 소수설도 있다. 이 시대구분법은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 체제에 따른 시대구분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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