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네상스 (문단 편집)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l-sacco-di-roma_1527.jpg|width=100%]]}}} || || '''1527년의 사코 디 로마''' || 분명 유럽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고 지중해 무역이 성행하던 15세기까지는 나름대로의 군사력과 재력, 정보망을 틀어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에 있었다. 도시국가의 군주들이 무식한 힘싸움보다는 문화와 부의 과시를 통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도 한몫했다. [[15세기]] 말까지는 [[백년전쟁]] 등으로 대륙의 사정이 혼잡해서 외침의 걱정은 없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마무리한 후 이탈리아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고,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을 비롯 거의 전 유럽을 한 손에 틀어쥔 [[합스부르크]]의 강대한 황제 [[카를 5세]]의 출현으로 이탈리아는 강대한 영토 국가들의 영향하에 놓이기 시작한다. 이제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영토 국가는 이탈리아 개별 도시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군사력이 강해진 것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땅따먹기]]의 현장으로 변하고 특히 1525년 이탈리아를 둘러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게 박살나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이에 당황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떻게든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코냑 동맹을 결성해 발버둥쳤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카를 5세]]는 교황의 비열함을 비난하면서 '''가톨릭 군대로 하여금 교황령을 털어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 다만 사코 디 로마 자체는 지휘관의 전사에 분노한 란츠크네히트들이 저지른 일탈이었고 실제로 소식을 전해 들은 카를 5세도 몹시 당혹해했다.] 이 전쟁에서 시원하게 털린 교황이 6개월이나 유폐에 가까운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고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 건물은 [[개박살]]나서 현재 로마 시내에서는 르네상스풍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사코 디 로마]]는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종결지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이탈리아의 부는 고갈되고 문화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한편[* 문화의 경우 바로크까지는 그래도 건재했다. 카라바조도 있고... 유럽에서의 이탈리아 미술의 문화 주도권 상실은 1680년 베르니니 사망을 기준으로 본다.] 대부분 지역이 외세의 지배에 놓이고 만다. 이 시점을 흔히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분기점'이라 칭한다. 이후 결국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카를 5세]] 밑에 굴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는 지난 세기의 영화를 대륙에 내준 채 3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대륙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그 나름대로 각국의 토양에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철학자, 인문학자, 예술가, 건축가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이탈리아 못잖게 상공업과 개방성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의 경우 자체적으로 회화 예술이 붐을 일으켰다. 당시에 확산된 금속 활자 인쇄술 덕분에 15세기말부터 유럽 널리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전파되지만, 유럽 전체가 균일하게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었고, [[군주론]]이라든가 인문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계약설은 훗날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 체제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적어도 계몽주의의 새로운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각국 귀족과 군주들의 후원 하에서 다방면의 발전이 계속될 수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음에도 이탈리아 내부에서 전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전쟁]] 이전까지 이탈리아가 여러 군소 도시국가로 나누어있었던 탓이 크다. 오히려 이탈리아 외부 국가들에서 연구가 활발했는데 [[19세기]]까지 이탈리아는 외지인들에게 경이의 땅이자 관심의 대상이었고 당연히 그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조르조 바사리]] 등 이탈리아인의 시각에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도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