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춘 (문단 편집) === [[호법전쟁]]과 [[안직전쟁]] ===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부총통 [[리위안훙]]이 계임하여 구국회와 약법을 회복시킴으로 호국전쟁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워졌는데 1917년 5월 돤치루이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막무가내로 요구하며 깡패들을 풀어 국회의원을 두들겨패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국무총리에서 면직되자 돤치루이는 분노하여 내전을 준비했다. 겁이 난 리위안훙이 중재를 청하며 부른 장쉰은 난데없이 국회를 해산하고 [[선통제]]를 복위시켜 청조의 부활을 선언했다가 환계, 직계, 서남군벌들이 대동단결해서 토벌하는 바람에 12일 만에 망했다. 1917년, 7월 [[장훈복벽]]으로 리위안훙이 사퇴하면서 대총통에 계임한 부총통 펑궈장이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견제하기 위해 진광원을 강서독군으로 승진시킨 다음 리춘을 강소독군에 이임시켰다.[* 돤치루이도 이에 맞서 [[푸량쭤]]를 호남독군으로, [[우광신]]을 사천사판사 겸 장강상류경비총사령으로 임명했다.] 이후 [[쑨원]]이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여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진광원과 함께 대총통 [[펑궈장]]의 평화통일정책에 호응하여 [[호법전쟁]]에 반대, 적극적으로 평화를 주장했다. 11월 리춘은 [[차오쿤]], [[왕잔위안]], [[진광원]]과 연명으로 내전 정지를 통전하여 돤치루이 내각의 하야와 [[왕스전]] 내각의 출범, 일시적인 정전령을 끌어내는데 성공했으며 1월 31일 쑨원에게 통전을 보내 자신이 무력통일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안휘파의 대표적 주전론자 [[쉬수정]]이 [[장쭤린]]의 [[봉천군벌]]을 끌어들여 주전론을 강화하자 사직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허지만 쉬수정의 선동에 [[옌시산]] 등이 연명으로 토벌을 주장하고 차오쿤도 주화론에서 이탈하면서 더 이상 무력통일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고 [[돤치루이]] 내각이 부활했다. 1918년 10월 [[쉬스창]] 총통의 당선으로 11월에 정전령이 선포, 1919년 2월에 상하이에서 남북평화회의가 개최되자 남방과 실무접촉을 맡았고 화의가 결렬된 후에도 화의 재개를 위해 노력했다. 1920년 [[쉬수정]], [[취퉁펑]] 등 환계 주전파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에 대항하여 [[차오쿤]], [[장쭤린]], 손열신, 진광원, [[왕잔위안]], 포귀경 등과 함께 환계에 대항하는 8성 동맹을 체결했다. 환계와 직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자 대총통 [[쉬스창]]으로부터 정치적 중재에 나서달란 부탁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1920년 7월 3일 [[장쭤린]], [[차오쿤]]과 연명으로 쉬수정 토벌을 통전하여 [[안직전쟁]]에 임했고, 안휘군벌을 크게 무찔러 승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