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콴유 (문단 편집) === [[우생학]]에 기반한 인구 정책 === >우리는 한 달에 200달러도 못 벌고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시킬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두 명 이상을 갖지 말라고 격려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우리 사회를 육체적, 지적, 문화적으로 빈혈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추세를 바로잡기 위한 첫 번째 잠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후회할 것이다. >---- >리콴유가 1969년에 남긴 말.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높은 출산율이 개발도상국 경제에 부작용을 줄 것이라며 저출산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정책은 [[우생학]] 성향을 갖고 있었다.[* 사실 리콴유는 "사람의 지능은 유전의 영향이 80%고 양육의 영향이 20%다"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리콴유는 [[1970년]]부터 'Stop at Two' 캠페인을 개최해 둘째를 낳은 여성에게 [[불임]] 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셋째와 넷째 자녀는 교육 과정에서도 차별을 받았으며, 자녀가 셋 이상인 부모도 혜택이 준 데다가 둘째 이상을 출사한 공무원들에게는 출산 휴가를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고,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병원에서 청구하는 비용도 의도적으로 상승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리콴유는 불임 수술을 받은 여성들에게는 1만 [[싱가포르 달러|달러]]의 보조금을 주는 나름의 [[채찍과 당근|당근]] 전략도 내세웠다. 불임 수술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행해졌는데, 리콴유는 이 정책들이 '무책임한 사회적 불량자들'이 더 많은 자녀를 낳으면 정부가 제공하는 더 많은 사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이 정책으로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972년의 3.04에서 1975년의 2.07로 대폭 낮아졌지만, 이후에도 리콴유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결혼하고 출산할 가능성이 낮다'는 추세를 더 심각하게 여기고 '대졸 남성이 교육 수준이 낮은 아내를 선호한다'는 것을 우려한 리콴유는[* 중국계가 75% 이상이어서 유교적 가치가 강한 70 - 80년대의 싱가포르는 고학력 남성이 저학력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83년부터 '남자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자기보다 지적인 여성들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싱가포르 남성들에게 대졸 여성들과 결혼할 것을 장려했고, 리콴유 본인도, 그리고 아들인 리셴룽 총리도 굉장한 엘리트와 결혼했다. 또한 대졸 여성에게 자녀를 3~4명 이상을 낳을 것을 권장하며 이 기준을 충족하면 주거와 교육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의 지성을 교육으로 극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어렵다는 사고에 근거해 결국 '''유전자를 잘 만나야한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진행한 것이었으나, 이 정책이 싱가포르 내에서도 큰 비판을 받자 1985년에 이 정책에서 특히 논란이 된 부분들은 폐기되거나 수정되었고, 1986년에 이 캠페인은 취소되었다.[* 다만 적어도 이 정책은 단순 우생학적인 배경으로만 실시한 것은 아니고, 보통 자식들의 교육은 어머니가 담당하니 자식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들어있었다. 완전 동일한 예는 아니지만 [[유대인]]들은 비슷한 이유로 어머니가 유대인이여야 선천적 유대인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자식 교육은 보통 어머니가 담당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 정책은 훗날 저출산의 요인으로 평가받는 교육열을 건드리기 보다는 오히려 장려하는 정책이었기에 인적자원 투자의 효용성은 높인 대신 저출산 해결 정책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었던 데다가 정부가 가정이 해야 할 일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가족주의적 철학을 동아시아가 서구에 앞선 부분으로 평가하여 가정의 부담을 정부가 제대로 덜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이 제도는 전술한 것처럼 오히려 대졸 이상의 여성, 다자녀를 둔 고학력 어머니들 사이에서 반발을 일으켰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들은 리콴유 재임 당시 꽤나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아시아에서 엘리트들의 집약도로만 놓고 보면 손꼽을 만한 나라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리콴유의 정책을 무시할 수 없다. 이후 바로 다음 해인 1987년에 리콴유는 'Have Three or More(당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캠페인을 실시하며 세번째 자녀를 둔 부모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셋째 아이의 병원비도 낮추는 등 규제를 완화하며 출산율을 늘리고자 했고, 이에 따라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986년의 1.43에서 1988년의 1.96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이후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낮아져 [[2019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14에 불과하다. [[https://countryeconomy.com/countries/compare/japan/singapore?sc=XE26|싱가포르 출산율에 대한 참고자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