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콴유 (문단 편집) === 개인적인 일면 === 사후에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도록 한 것도 묘지 만든답시고 국토라고는 도시 하나뿐인 싱가포르의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고.[* 그러나 아들 [[리셴룽]] 수상은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추모열기를 이용하여 같은 해(2015년)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선전한다.] 본디 [[영어]]가 모어(제1언어)인 리콴유인지라 공석/사석 할거 없이 영어를 주로 사용했으나, 어릴 때 [[말레이어]]를 배워서 말레이어를 [[https://youtu.be/eF1xDkuUBTw|할 줄 알았고]], [[표준중국어]]도 [[https://www.youtube.com/watch?v=Y5dYTzOuGzE|할 줄 알았다.]][* 해당 동영상 1분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표준중국어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 중 제3언어(제2외국어)이고, 그래서 본인은 그렇게 썩 유창하게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sdvTDQsXOzI|다른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8QXoajV6p9c|보러가기]]] 약간 어눌하지만 표준중국어가 그에게 있어서 제2언어(제1외국어)도 아닌 제3언어(제2외국어)였던 점을 감안하면 열심히 학습한 것이다.[* 과장 좀 보태서 리콴유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고 중국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링크된 동영상들을 보면 그냥 중국인 할아버지가 중국어 하는 동영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본인 말로는 표준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해 왔다고 한다.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특성상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국의 인재를 데려오든지 외국의 기업을 들여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총리 재임 시절 '''영어 공용어'''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는데 2009년에는 [[http://edpolicy.kedi.re.kr/EpnicForum/Epnic/EpnicForum02Viw.php?PageNum=16&S_Key=&S_Menu=&Ac_Code=D0010201&Ac_Num0=6435|한계성을 언급하며 일부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2006년 방한 강연에서는 한국 대학생들에게 [[http://www.rig.or.kr/modules/board/bd_view.html?id=aog&no=24|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 만큼 외국어 교육 그 자체를 부정한건 아니며,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시행착오를 일부 인정한 것이라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할 듯. [youtube(znjx6P11gRM)] 1956년의 기자회견 영상. 중간중간 싱가포르 특유의 억양이 약간씩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발음을 보여준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였던 리콴유는 완벽한 영국식 보수적 [[용인발음]](Conservative RP)을 구사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민들 역시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잘 하게 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영어 공용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첫 세대에서는 힘들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가 공용어로 자리를 잡으면 세 번째나 네 번째 세대쯤에서는 완벽한 영어 사용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무참히 빗나갔다. 물론 싱가포르의 영어 사용능력은 아시아에서는 대적할 나라가 없고 어지간한 유럽 국가들과 비견할만한 수준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와 같은 영국계가 주류인 국가만큼의 수준은 아니다. 이는 인종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이 너무 심해 공용어로는 영어를 써도 중국인들끼리는 중국어를 쓰고 각자 집에 가서는 자기네들 방언을 쓰는 등 중구난방으로 생활 언어의 통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owlswellblog.files.wordpress.com/lee-kuan-yew-memoirs.png]] 생전에 2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98년의 첫 자서전인 <싱가포르 스토리>[* 한국어판은 '리콴유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나왔다.]는 청년기와 1965년의 분리독립 관련 내용이고, 2000년에 출간된 후속편 격인 <일류국가로의 길>은 건국 이후 싱가포르 초대 총리이자 국부로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둘 다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정보에 의하면 [[이슬람]]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고 하며, 이슬람은 [[해로운 새다|해로운 종교]]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리콴유도 쿨하게 인정했다. 동남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 나온 비판 중에 나온 말이라고 했으며, 모든 종교가 극단적으로 가면 신념을 지킨답시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슬람이 그 빈도가 매우 높아서 동남아시아[* 실제로 싱가포르 바로 옆의 인구대국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모두 이슬람 국가이다.]의 대표격으로 예를 든 것 뿐이라고 했다. 거기다가 사실 그렇게 비밀스러운 내용도 아닌 것이, '리콴유와의 대화'라는 책을 보면 리콴유가 이슬람 세계에 대해 비판을 하는 부분이 한 챕터에서 나온다. 하지만 리콴유는 극단주의를 싫어하는 것이지 이슬람 신자를 싫어한 것은 아니어서, 싱가포르도 온전한 중국계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말레이계에 대해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정치나 경제 요직에 이슬람 신자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리콴유가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 주 총리였던 시절의 싱가포르는 인종폭동이 빈발하던 나라였으니 다인종 공존이 필수 과제였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소수자인 말레이계, 인도계 등에 대한 배려이다.] 항상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은 리콴유 개인의 특성이고 이는 싱가포르에서도 현재 통용되는 뿌리깊은 바탕이다. 반대파의 새싹이 될 비판적 젊은이들을 정부에 참여시켜서 옹호자로 길들이지 않았다면 싱가포르의 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토가 작은 나라의 중국계 지도자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리콴유는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이었다. 부인 콰걱추 여사 또한 170cm가 넘어 그의 가족 대부분은 장신이다. 리콴유가 독재를 해도 폭력을 거의 쓰지 않은 것은 아버지 리친쿤의 영향이 컸는데, 정확히는 4살이던 리콴유가 아버지가 가지던 값비싼 병을 깨자 아버지한테 우물로 끌려나간 후 귀가 잡아당겨진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리콴유는 자신의 세 자녀가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폭력보다는 엄한 질책을 하는 방식을 썼다고 한다. 리친쿤은 아들이 집권한 후에도 고물상 수선공으로 일했다고 하는데, 한 기자가 “왜 수상의 아버지가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까? 편안하게 사실 수 있을 텐데.”라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원래 직업에 충실할 따름이오. '''내 아들이 수상이지 나는 수상이 아니지 않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