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콴유 (문단 편집) === 청년기 === [[1923년]] 부유한 [[한족]]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중국계 싱가포르인]] 4세다. 그의 집안은 [[광동성]] 대포현(大埔縣)에 본적을 둔 [[객가]]였다.[* 리콴유 본인은 평생 본적지에 가본 적도 없지만, 현재 대포(다부)현이 속해있는 광둥성 [[메이저우시]](梅州市) 탕지천 정부에서는 리콴유 기념관을 세워 싱가포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관광지를 만들었다.] 집안은 사업을 통해 꽤 성공했는데 그 덕분에 리콴유도 좋은 교육과 좋은 가정환경 아래에서 자랐다. 본인도 열심히 공부했는지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 칼리지에 수석 입학했고, 1940년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를 통괄(영국령 말레이 연방)해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영국 식민통치 기간에 형성된 일종의 현지 엘리트 집단의 일원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수석은 그의 아내이고, 리콴유는 차석이었다. 졸업 직후 한창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시기인 10대 후반인 1941년,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싱가포르 전투|싱가포르를 침공]], 영국 대신 몇 년간 [[일본령 싱가포르|싱가포르의 주인 행세]]를 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리콴유는 영국 식민지 시절 [[친영|친영주의]]적인 가족 밑에서 자랐고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컸기에, 리콴유 역시 영어가 모어였고 영국의 싱가포르 통치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백인이 아시아인을 지배하는 상황은 자연적 이치와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자서전의 표현을 인용하면 '못생기고 이상하게 생긴' [[일본인]]들이 무적이어야 할 [[영국군]]을 무찌르면서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백인이 항상 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에서야 깨달았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 시절 일본 군정의 억압으로 인해[* 일본의 동남아에 대한 군정은 대체로 가혹했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특히 화교들은 더 크게 탄압받았다.] 그는 선임장관이 된 이후 쓴 자서전들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드러냈으며, 일본의 극단주의 세력들을 청산하고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임기 내내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해왔다.[* 일본을 향한 리콴유의 감정은 서양인들을 무찌른 유일한 아시아인이라는 경외감과 동시에, 싱가포르인, 중국인 및 동남아시아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던 일본인의 야만성에 대한 혐오감이 동시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감정은 [[수카르노]] 등 일본의 군정을 겪은 동남아 민족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 영국군이 싱가포르로 돌아왔지만 싱가포르인들이 영국인을 존경하는 감정은 더이상 전쟁 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결국 이 경험이 싱가포르가 더이상 영국에 의지할 수 없고,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소회했다. 일본이 싱가포르를 지배하는 동안엔 대학을 다니는 것은 미룬 채 [[타피오카]]를 이용해 만든 스틱파스라는 [[접착제]]를 암거래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리콴유 자서전 1권 76페이지부터 일본군 보도부에서 복무하던 시절의 일화가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으로 유학, 1946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에 입학했다가 194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과로 편입했다. 리콴유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 법학과를 졸업할 당시 Double Starred First-Class Honours를 받았다. 영국 대학은 졸업시 학위를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 성적이 높을 경우 따로 우등 표창(Honours)을 주고, 세부적으로 그 표창은 First - Class, Upper - Second, Lower - Second, Third - Class Honours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잘난 학생에겐 "Starred First"라는 세부 표창을 주고, 중간 성적, 최종 성적 모두 "Starred First"로 졸업했을 때를 "Double Starred" 라고 한다. 한 마디로 두 개의(Double) 특(Starred) - 특(First-class) - 우등 표창(Honours).[* 구체적으로는 케임브리지 학부 시스템의 Tripos를 알면 이해가 쉽다. Law Tripos는 3년 과정인데, 1년차 Part IA, 2년차 Part IB, 3년차 PartII로 나뉜다. 매 학년 말에 시험을 봐서 성적을 받게 되는데, 1년차와 2년차 성적을 합산해 Part I 성적이, 3년차 성적이 Part II 성적이 되는 것이다. 이 때, Part I과 Part II 성적이 모두 First면 Double First, Starred First면 Double Starred First가 되는 것이다. 법학 단일 전공이고 중간 성적과 최종 성적이 모두 Starred First였단 얘기다.] 식민지 출신이 이 정도 성적을 받고 졸업하는데 식민당국이 주목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한편 이 시기에 부인인 콰걱추(柯玉芝, 1920~2010)를 만나기도 했다. 콰걱추는 싱가포르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문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유학까지 함께 했으며 1950년 결혼하였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하던 시절 리콴유는 최고 영재였는데 자신보다 공부를 잘해서 자신을 2등으로 만든 유일한 학생이 콰걱추였다고 한다. 리콴유는 졸업 후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조, 학생운동과 연관된 소송 업무를 맡게된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소송 합의와 중재를 위해 발로 뛰며 좋은 성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1950년대]]에 이미 세간에서 유명해져 싱가포르는 물론 말레이시아에도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영국 식민당국도 리콴유를 주목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