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한 (문단 편집) === 묘제 === >그들의 장례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와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와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소와 말 등의 가축을 장례에 사용했다는 부분은 사실일 수 있으나, 원삼국시대의 유적지인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말이 끄는 수레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바퀴통과 바퀴살, 바퀴축 등의 부속품이 대거 출토되었으므로 소와 말을 탈 줄 몰랐다는 기록은 장례 문화와 관련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비단 조각도 발견되었다.[[https://news.v.daum.net/v/20121212010007982|#]]]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의 기록은 마한의 무덤 양식이 특별히 외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 토광묘제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로 마한의 주 묘제는 매장주체부 주위에 도랑[* 도랑이라고는 하나 경사면에 입지하고 있고, 담수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흙을 채취하고 묘역을 구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을 두르는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인데, 그 형식은 크게 매장부를 먼저 만들고 그 주변에 눈썹 모양, 혹은 'ㄷ'형의 도랑을 두르는 청당동형[*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청당동형이라 명명되었다.] 주구토광묘와 무덤의 사방을 전부 도랑으로 두르고 도랑에서 파낸 흙으로 성토부를 만든 다음 그 위에 매장주체부를 만드는 관창리형[* [[보령시]] 주교면 관창리에서 발견되었다하여 관창리형이라 명명.] 주구토광묘로 구분된다. 전자는 내륙 지역에 분포하고 주로 완만한 구릉의 경사면에 입지하고 있으며,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5716382|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와 [[http://okdangmuseum.net/home/content/%EC%8B%AC%EB%B0%9C%ED%98%95-%ED%86%A0%EA%B8%B0|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를 부장하는 경우가 많다. 후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서해안 지역에 분포하고, 대개 낮은 구릉이나 대지 위에서 군집을 이루며 성토부는 낮다. [[분구묘]]라고도 부른다. 한성백제 시기의 [[석촌동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묘제이기도 하며, 이 묘제를 쓰는 집단이 고구려식 묘제를 쓰는 집단과 연합하여 백제국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자체 발생설과 일본과의 교류 관계(야요이시대 분구묘)나 중국 동해안 일대(강소성, 절강성, 산동성) 오월 지역과의 교류 관계가 거론되기도 한다. 관창리형은 4세기 이후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총으로 발전한다.[* 출처: 한국고고학회, 《한국 고고학 강의》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http://ko.cbnucop.wikidok.net/wp-d/5b463734004745376a59c489/View|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COP 고고학사전 '주구토광묘' 문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