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한 (문단 편집) ===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정벌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근초고왕/생애, 문단=4)]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 [[비지국|비자발]](比自㶱), [[금관국|남가라]](南加羅), [[탁기탄|탁국]](㖨國), [[안라국|안라]](安羅), [[다라국|다라]](多羅), [[탁순국|탁순]](卓淳), [[반파국|가라]](加羅) 7개국[* [[변한]], 즉 [[가야]]계 국가들이다.]을 평정하였다. 이에 병사를 서쪽으로 이동시켜 [[구해국|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근초고왕|초고]](肖古)와 왕자 [[근구수왕|귀수]](貴須)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때 [[벽비리국|비리]](比利), [[벽비리국|벽중]](辟中), [[불미국|포미]](布彌), [[지반국|지반]](支半), [[구소국|고사]](古四)의 읍[*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4읍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삼국지(정사)|삼국지]]》에서 마한 54국을 열거할 때 '벽비리국 - 불미국 - 지반국 - 구소국'의 순서를 따랐음을 고려한다면 읍이 5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한편 일각에서는 고사읍(古四邑) 부분을 지명이 아닌 "옛 4개의 읍"으로 풀이하여 비리, 벽중, 포미, 지반의 4읍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에 고사주(古四州)라는 지명이 기록되었음을 고려하면 고사읍 역시 지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 >《[[일본서기]]》 9권 [[진구황후]] 섭정 49년[* 《일본서기》 기년 상으로는 서기 249년이다. 물론 [[근초고왕]]과 왕자 [[근구수왕|귀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실제 연대는 [[이주갑인상]]을 적용한 서기 369년으로 추정된다.] 3월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근초고왕]] 대에 마한을 완전히 멸망시켰다고 추정했으나, 여기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사실 근초고왕의 마한 경략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근초고왕이 실제 마한을 공격했는지조차도 불확실한 점이 있다. 다만 정황상 근초고왕 시절에 마한 지역의 대부분을 정복해 직할지로 삼았으리라 추정했을 뿐이다. 명확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설은 2000년 무렵까지는 정설로 취급했으나, 이후 문헌 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이러한 결론은 현재 부정되고 있다. 일단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설에 대해 문헌 사학자들의 잇따른 반론이 제기되었다. 기존의 문헌 사학자들은 상술한 《일본서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침미다례가 '[[남만]](南蠻)'이라 표현된 것은 당시 왜(倭)의 입장에서 남쪽이 한반도일 수 없으니 해당 기사가 본래 백제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즉 주어를 왜에서 백제로 바꿔서 신공 49년(서기 369년) 백제 장군 [[목라근자]]가 남쪽에 위치한 마한을 정복했다고 본 것이다. 위의 주장이 근거로 한 논거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침미다례가 '''마한 전체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 적이 없다'''는 점, 남쪽에는 마한뿐만 아니라 가야도 있으니 침미다례를 마한의 한 국가인 [[신미국]](新彌國)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진구 황후]]의 실존 여부 자체에 대한 논란, 고고학적 성과와의 불일치 등을 들어 일본서기의 기사는 단순히 마한 남부의 잔여 세력을 간접 지배했다는 의미일 뿐,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 정복하여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침미다례의 위치조차 불확실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기도 하나, 일본서기에서 묘사된 침미다례 인근 고해진의 위치가 가야 서쪽 나루터라는 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전라남도 해안가에 위치했음은 확실하다.] 일각에서는 위의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에서 정벌의 주체로 기록된 '왜(倭)'가 '예(濊)', 즉 [[예맥]]을 음차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우선 해당 가설의 근거 중 "조선시대까지 왜(倭)의 발음은 '예'였다"는 부분은 단지 일본을 지칭하는 [[한국어]] 고유어를 한자음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하며[* 왜나라 문서의 [[왜나라#s-6|6번 문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5~17세기의 한글 문헌에서 왜국에 해당하는 단어가 한글로 '예'라 기록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고음에 맞춘 인위적 음운체계를 지향한 《[[동국정운]]》뿐만 아니라 16세기 당시 현실 한자음을 반영한 《[[훈몽자회]]》에서조차 한자 왜(倭)의 음은 '와'로 기록되었으며, 오히려 '예'는 주로 고유어가 들어가는 훈(새김)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6~7세기 신라의 향가 [[혜성가]]에서는 '倭理'라는 [[말음첨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이 단어가 본래 '여리'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는 예(濊)의 후기 고대 중국어 발음인 /*ʔwajs/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왜라는 한자가 예맥을 지칭하는 경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3세기의 《[[삼국지(정사)|삼국지]]》에서도 예(濊)와 왜(倭)라는 표현은 각각 [[동예]]와 일본 열도의 열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명확히 구별된다. 아무튼 백제의 영향력은 영산강 일대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에 4세기 후반부터 침투하는 모습이 나타고 있어[* 최성락,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에 의한 통합과정〉, 《지방사와 지방문화》20-1, 2017 및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형성과정 연구》, 주류성, 2018] 이를 근거로 문헌사학계에서는 5세기 경에 영향력이 미치거나 간접 지배가 실시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후 [[동성왕]] 시절의 탐라 지역에 대한 무력 시위 기록에 주목하여 동성왕이 [[탐라]], 다시 말해 제주도를 정벌하러 가는 과정에 무진주에서 탐라의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라 직접 통치까지는 아니라도 전남 지역이 이미 백제의 지배력은 미치고 있는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이 주장은 이병도가 탐라는 제주도라고 주장해서 나온 설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에 탐라를 언급하면서 '탐라는 곧 탐모라'라는 대목이 있으므로 여기서 탐라가 제주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침라'로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무령왕 시기인 508년, 남해 가운데 있는 탐라가 처음으로 백제국과 교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섬인 탐라가 등장하므로 이 탐라가 제주도로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무덕 이래(618~625년) 탐라국이 백제에 속하게 됐다는 기록도 있으니 이병도의 학설은 이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 적어도 동성왕 시기에 이르러야 지배력 강화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본다. 일부 문헌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성왕이 여러 나라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마한으로 해석하여 성왕 대에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석한다. 일단 현재 주류 문헌사학계는 늦어도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전남 지역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가 이뤄졌다고 보며, 무령왕이 상차리(上哆唎), 하차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등 4현을 합병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이 지역들을 [[섬진강]] 유역이나 가야 일부 지역으로 해석해 간접 통치하에 있었던 영산강 일대와 달리 별개의 독립 세력으로 있다가 무령왕 대에 섬진강 유역을 합병했다고 보기도 한다. 최근 전라남도 지역에서 발견된 여러 고고학적 성과들, 특히 전라남도 남해안과 내륙 지방에서 마한의 독자적인 고분 축조가 6세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등은 남해안 소국들이 6세기까지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다는 주장에 결정적인 힘을 실어줬다. 2015년과 2016년에는 전라남도 내륙 지역인 나주시와 화순군의 발굴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나주 복암리 고분 발굴 결과 적어도 5세기까지 나주 지역에 마한의 독자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단, 이들이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반독립세력인지 완전히 별개의 세력인지는 논란거리다.] 2016년에는 전라남도 내륙 지역인 화순군 회덕 고분군 발굴 결과가 새로 발표되었는데 6세기에 대규모의 독자적인 세력이 이 지역에 존재했으며, 이 세력은 백제, 왜, 대가야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0/30/0200000000AKR20161030018300054.HTML?input=1195m|기사]] 2018년 발표된 [[전라북도]] [[정읍시]] 지역의 고고학 연구 결과는 [[동진강]] 이남의 전라북도 지역에도 역시 6세기초까지 강력한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들 세력이 몰락한 것은 전라남도 소국 세력의 직접 지배 기반 해체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진강 이북의 [[익산시]], [[전주시]], [[완주군]] 지역에도 오랫 동안 여러 소국들이 유지되었으나 한성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몰락하게 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 '''고고학계'''[* 어디까지나 고고학계의 의견이지 문헌사학계는 의견이 또 다르다.]에서는 6세기까지 전라남도 지방에 독자적 소국 세력들이 여전히 온존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 다만 오해하면 안 되는게, 나주 일대 소국 세력과 정읍-광주 축선의 전남 중동부 내륙 세력, 남해안 일대 세력은 각기 계통과 세력권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전남 전체와 전북 일대에 마치 독자적이고 단일한 마한 세력이 백제와는 별도로 존재한 걸로 오해하는 의견이 있는데, 문헌 사학은 물론이고 고고학적으로도 지지받을 수는 없는 의견이다.] 한편 2000년대 들어 [[풍납토성]] 발굴로 온조왕 대에 이미 백제의 국력이 상당했지 않느냐는 추정이 나오면서, 온조왕 대의 마한 정벌도 사실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풍납토성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고학 자료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며 풍납토성은 온조왕대에는 현재 발굴된 상태에 훨씬 못 미친다. 또한 이는 2010년대 이후 밝혀진 충청도와 전라남도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들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 해외와도 무역을 했는데, 함평에서 일본의 스에키 도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3&sid2=245&oid=020&aid=0003189291|#]] 위치나 영역에 대한 것들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토대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목지국]]을 중심으로 소국 연맹 형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