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한 (문단 편집) == 백제와의 관계 및 정복 과정 == 종전에는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백제 [[온조왕]] 때 맹주국인 천안 [[목지국]]을 정벌해 경기도와 충청도를 제패하고,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대에 해남 [[침미다례|신미국]]을 정벌함으로써 마한 전 지역을 완전히 병합해 직접 통치를 시행한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연구 결과 온조왕은 커녕 그보다 훨씬 후인 3세기 중반, 즉 [[고이왕]] 대에 들어서면서 목지국 세력이 약화되었고, [[책계왕]] 혹은 [[분서왕]] 시대가 되어야 그 세력이 크게 꺾이면서 경기도 지역을 제패하게 되었으며, [[목지국]]의 저항 여력이 완전히 없어진 건 [[4세기]] 초 [[비류왕]] 대였다고 드러났다.[* 사실 이 부분은 기존 사서 중 마한의 맹주를 백제가 아닌 목지국으로 기록하고 백제를 별로 부각하지 않은 《[[삼국지(정사)|삼국지]]》 〈동이전〉이 3세기 중반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목지국의 저항 역량이 없어지기 전까지 충청도 서북부에 백제의 영향력이 제대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점은 목지국이 그렇게 순순히 패권을 내놓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근초고왕]] 대에도 금강 유역권, 영산강 유역권, 섬진강 유역권의 소국들은 여전히 목지국 시절처럼 자체적인 국력과 자치성을 보존하고 있었고, 영산강 유역권은 한성이 함락되는 475년 이후 백제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타 오히려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후 백제 [[동성왕]] 대에 [[탐라]] 정벌을 시도했으며, [[무령왕]] 대에 상차리, 하차리, 사타, 모루 네 현을 합병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마한 전역을 복속해 직접 지배지로 편성한 것은 6세기 초인 무령왕 대이고, 전 지역을 일원적인 지배 체제로 편성해 행정망을 완비한 것은 538년 사비 천도를 전후한 [[성왕(백제)|성왕]] 시기로 보인다. 즉, 웅진백제 이전의 백제사는 마한 전역을 자치 세력에서 간접 지배지로, 그리고 간접 지배지를 직접 지배지로 전환하는 긴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과정이 무령왕 대에 종결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이 부분에서 대중에게 퍼진 큰 오해는 마한 전체가 마치 제대로 된 하나의 고대 국가로서 백제와 맞서면서 영토를 점점 잃어가며 저항하다가 전남까지 밀렸다는 것인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백제는 마한과 별개의 정치체로 공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백제는 [[고구려]]계 유이민과 한강 토착 세력[* 고고학적으로는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의 토돈분구묘제를 쓰는 해양 세력이다. 다만 이들이 목지국을 비롯한 고조선계 마한 주도 세력과는 계통이 같다고 보기 어렵기에, '마한'이라고 하는 건 바르지 않다. 그들 또한 마한 목지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세력이었음은 같지만 그렇게 따지면 임진강의 고구려 혹은 예족 계열도 마한으로 봐야 한다.]이 융합한 [[백제국]]으로 시작했으며, 마한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세력을 키워서 기존 종주국이었던 목지국을 타도한 후 목지국 대신 마한의 종주국이 된 것이었다. 다만 백제는 기존의 연맹국가 단계였던 [[목지국]] 체제와 달리, 고구려계 유이민의 선진 문물을 기반으로 한 백제국이 그 구성국들을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입시키겠다는 확고한 장기적인 목표 아래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마한 소국들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확대 양상은 시기별로 백제의 국력과 거리, 대외 상황, 그리고 각 소국의 자체 역량에 따라 달라졌던 것이지, 마한 전체가 하나의 국가로서 백제에게 차례차례 영토를 잃어가며 정복당했던 것은 아니다. [[한성백제]], 웅진백제 시기의 소위 "잔여 마한 세력"이라고 잘못 이해되는 전라도 일대 소국들도 백제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단일 고대국가도 아니었다. 근초고왕 시절부터 백제가 힘을 투사해오던 전북 군산 일대 및 익산, 전주, 완주 지역은 웅진 천도 무렵의 5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으며, 동진강 이남의 전북 지역과 전남 영산강 지역, 남해안 지역, 섬진강 지역의 소국들은 그 이후 6세기 초까지 유지됐었는데 이들은 저마다 세력 규모나 문화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금동관, 금동신발 등의 금동 위세품이 전라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서울 풍납토성에서 영산강 토기가 출토된 점을 통해 직접 통치 시기가 아니었더라도 백제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중에서 영산강 세력이 자리한 전남 서남부는 나름대로 세력이 강성했기에 남해안과 전남 동부보다도 약간 늦게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때문에 전남 서남부 영산강 유역은 마치 백제 유민 의식이 없었던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래봐야 전남 서남부 지역이 백제에 완전히 편입되는 시기는 다른 전라도 지역과 30~50년밖에 차이나지 않으며, 직접 지배 시기에만 지배 하에 있었다고 보는 것도 합리적인 견해는 아니다. 오히려 사비백제의 백제계 유물은 영산강 유역에서도 풍부하게 발굴되고 있는 형편이다.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국가 정체성이 없었다고 보는 견해도 사실과 다르다.[* 군사력으로 멸망한 직후 반란을 일으켜야만 유민 의식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은 그 어느 학계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반란 자체가 유민 의식의 강렬한 흔적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마한과 백제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 국가의 행정 특성을 알아야 한다.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삼국시대의 지방 행정력은 조선시대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일례로 삼국 중 가장 발전 속도가 빠르고 선진적이었던 고구려만 보더라도 기록상 한사군을 정벌한 시점은 4세기 초인 314년이었는데, 정작 이 시기 이후에도 한동안 고구려와 차별화되는 한사군계 토착 유적이 4세기 중·후반 무렵까지 발견된다. [[옥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 고대 국가의 행정이 정교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둘째로 행정의 변화가 토착민 생활 양식의 즉각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한에서 6세기 초까지 백제 조정과 차별화되는 흔적이 드러난다는 것이 마한과 백제의 무관계성을 담보하지는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6세기 초 이전에는 백제의 직접 지배지로 완전히 전환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 고고학적 성과를 놓고 [[미천왕]]의 한사군 정벌 기록을 부정하며 소수림왕이나 광개토대왕 대에 와서야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먼 훗날인 후삼국시대에 전남 나주 일대의 영산강 유역 호족들이 [[견훤]]의 [[후백제]] 대신 바다 건너에 있는 [[고려]]의 편에 서서 후삼국시대 내내 후백제의 배후를 노리는 형국이 되었는데, 이것이 삼국시대 백제와 전남 '마한'의 대립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영산강 유역, 즉 [[침미다례]]는 가장 잘 나갈 때도 전남 중부 및 동부 해안 일대에는 발도 뻗치지 못했기에 '전남 마한'이라 칭할 수조차 없으며 백제와 그다지 척질 일도 없었다.[* 정작 백제 왕실에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 마한 구성국은 백제의 옛 상전인 천안 [[목지국]]이었다.] 이건 그보다는 이전 마한 시기부터 있었던 광주와 나주의 대립 구도에서 비롯된 일이다. 견훤이 세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순천의 [[박영규]]와 [[김총]], 광주의 [[지훤]] 등 전남 내륙 호족들을 규합하게 되는데, 영산강 유역 호족들이 전남 내륙 및 남해안 일대 호족들과 이해관계가 더 가까웠던 견훤에게 냉소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왕건]]의 집안이 경기만 일대의 해양 호족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영산강 일대의 해양 호족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https://news.v.daum.net/v/20200628082802600|#]] 나말여초 서남해 일대는 동아시아 문물 교류의 중심지인 청해진의 근거지일 정도로 해상세력이 융성했던 곳으로, 이 지역을 두고 왕건과 견훤이 얽혀 후삼국시대 내내 [[나주 공방전]]이 일어나며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후삼국통일 주도권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왕건은 2대 [[혜종(고려)|혜종]]을 낳은 장화왕후의 고장인 나주를 특별구역으로 편제해 특별기구인 나주도대행대를 설치하고 시중(국무총리급)을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으며, [[현종(고려)|현종]]은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하던 국제행사인 [[팔관회]]를 나주에서도 개최하게 하였다. [[https://news.v.daum.net/v/20171109030824873|#]] 2014년에는 5~6세기에 조성된 [[경상북도|경북]] [[의성군|의성]] 지역 고분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 백제식 금동관은 경기 화성, 충남 천안, 서산, 공주, 전북 익산, 전남 고흥에서 출토되었으며, 수도 지역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지방세력 포섭을 위한 하사품으로 추정된다. [[https://blog.naver.com/dndudwp99/221357895428|#]] 백제 중앙세력의 경우 금동관이 아닌 오라관을 쓰고 금제, 은제 장식을 부착했다.]가 출토되어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이 지역은 [[진한]] 소국 중 하나인 [[소문국|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백제식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양식 [[토기]]'[* 경북 북부 지역인 의성, 군위, 상주, 예천, 안동, 영주, 봉화, 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경주시|경주]]지역 토기와는 다르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21414&cid=51938&categoryId=54602|#]]]와 규두대도, 삼엽문 [[환두대도]] 등의 최상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지역 사학자들은 이 유물들을 두고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 세력이 《[[삼국사기]]》의 기록[* 조문국이 서기 185년 2월 신라의 [[벌휴왕]]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과 달리 [[신라]]에 합병되지 않고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51202.010100736120001|#]] 이후 후삼국시대에는 경북 [[상주시]] 지역 호족인 아자개와 경북 [[의성군]] 지역 호족 홍술(洪術)이 고려에 귀부하는 일이 있었고, 경북 [[안동시]] 지역 호족들이 고려의 편에 서서 고려 개국공신(안동 삼태사)이 된 사례도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 있었던 [[신라부흥운동]]이 경주, 운문(경북 청도), 초전(울산)으로 주로 경북 남부에 편중되었던 것을 보면 전남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북 일대 전체에 맹주국 신라의 강력한 직접지배가 미치진 않았으며, 통합 이후에도 행정력이 열악해 소국들의 사회공동체가 해체되기 힘들어 거의 그대로 계승되었기 때문에 당연했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후백제]]왕 [[견훤]]이 경북 상주 출신이었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광주 북촌(현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다만 마한-백제 관계와 진한-신라 관계는 몇 가지 비슷하지만 전제 조건은 크게 다름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테면 진한의 [[사로국]]은 마한의 [[목지국]]과 비슷한 존재였지만, 목지국과는 달리 그 휘하 소국에게 당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압독국]]이나 조문국 정도의 소국이 갑자기 세력을 키워서 그 상전인 사로국을 힘으로 무너뜨린 것인데, 사로국이 처음부터 착실하게 힘을 키운 덕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목지국은 불행히도 한군현과 보다 가깝다는 이점을 충분히 살려 한강-임진강 일대를 통합한 백제국에게 하극상을 당해 갑자기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래도 마한과 진한이 비슷한 점은 맹주국 휘하 소국들이 자체적인 외교력을 한번에 전부 잃지는 않았다는 점이며, 이는 백제국 또한 경험했던 현상이다. 마한의 영역은 단순히 비교해도 진한의 2~3배에 달했고, 진한은 문화권이 하나였으나 마한은 독자적인 수계만 따져도 무려 여섯 계였으니, 통합의 과정은 비슷한 면도 있었지만 난이도나 전개 양상은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목지국이 능력이 모자라서 마한을 통합하지 못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드는 부장품만 봐도, 백제가 마한의 맹주국 지위를 확고히 한 4세기 전반에마저 생활 양식이 백제와 같지만 묘제는 다른 지역, 묘제는 비슷해져도 생활 양식은 달랐던 지역, 혹은 무기나 위세품은 많이 출토되어도 금은 장신구는 크게 적은 지역 등 중앙과의 관계가 다양했는데, 이는 백제의 마한 통합이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방증한다. 흥미로운 점은 [[변한]]과 형세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변한의 경우 함안의 [[안라국]]이나 고성의 [[고자국]]이 마한 백제국과 비슷한 포지션에 있었고, 안라국 또한 백제국이 목지국에게 그랬듯 대놓고 금관국을 무력으로 꺾기 위해 [[포상팔국의 난]]을 통해 고자국과 연합하여 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국은 신라를 끌어들여 방어에 성공했지만, 목지국은 백제와의 국력 차가 이미 너무 벌어졌던데다 백제의 기습이 워낙에 급작스러웠고, 지원해줄 수 있었을 대방군마저 백제 왕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며 도움을 요청할 경로 자체를 백제가 완전히 다 장악한 상태라 도무지 막아낼 수가 없었다. 안라국은 이후 금관국이나 [[반파국|반로국]]과 쓸데없는 다툼은 피하면서 그들의 우위는 인정했지만, 실력이 워낙 만만찮아 정말 다루기 힘든 동맹국이었다. 부하가 상전을 완전히 격파해서 자리를 빼앗는 데 성공한 후 나머지 거수국들을 흡수하여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한 마한의 상황, 맹주국이 휘하 거수국들을 잘 추스리며 흡수하여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난 진한의 상황, 마한과 진한의 상황이 섞여 이도저도 아니게 된 변한의 상황이 묘하게 대조된다. 한편 [[전라남도]] [[해남군]] 군곡리 패총에서 마한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 뿔을 깎아 만든 [[투창기]]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https://cafe.daum.net/shogun/4rf3/2873|#]] 바로 이 군곡리 일대가 신미국이 위치했던 곳이다.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발굴된 봉덕리 고분은 고창의 마한세력이 백제식 묘제를 도입한 고분으로 파악되고 있다.[[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3110701000194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