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매국노/목록 (문단 편집) === [[프랑스]] === * [[모리스 파퐁]]: [[비시 프랑스]] 당시 나치 점령군 밑에서 부역하며 유대인 1,560명을 추방한[* 그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파퐁 입장에서는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전혀 몰랐고 단순히 추방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니 추방으로 표시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파퐁은 [[홀로코스트]]의 동조자였던 셈이다.] 프랑스 공무원. 나치가 패배할 기미가 보이자 [[샤를 드 골]]에게 빌붙어 [[알제리 전쟁]] 때에는 알제리 독립운동 탄압에 참여하여 훈장을 받기도 했고, 이후에는 파리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1961년에는 파리 중심부에서 열린 [[1961년 파리 학살|알제리인들의 독립운동 시위를 유혈진압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다만 레지옹 도뇌르 훈장 자체는 이 학살 3개월 전에 수여받았기에 이 학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후에는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정권에서 예산 장관까지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81년에 나치 부역 전력이 폭로되고는 1999년에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되는 굴욕을 당한 후 감옥에 갇혔다. 그 뒤 파퐁은 중병을 이유로 3년도 안 되어 사면되었고, 이후 요양생활을 하다가 2007년에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부르고뉴 공국|부르고뉴파]]☆: [[백년전쟁]] 당시의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한 지방임을 부정하고 독립하려고 했다. 심지어는 부르고뉴 독립운동이 [[백년전쟁]] 이후까지 이어져서 프랑스와 혈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프랑스 [[국수주의|국수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의 [[프랑스 왕국|프랑스 왕실]]에 대한 지지도는 크게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 시기의 [[파리(프랑스)|파리]] 시민들은 [[잔 다르크]]가 이끄는 왕당파 의용군을 보고 환영은 커녕 [[영국]]군과 협력해서 뜨거운 물까지 끼얹으면서까지, 살벌한 공성전을 벌였고 잔 다르크에게는 마녀라며 꺼지라는 둥 갖은 욕지거리까지 할 정도였다. 잔 다르크를 죽게 만든 것 때문에 욕을 먹지만 [[중세]] 시대 사람들에게 현대적인 [[민족주의]] 헤게모니를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수다.[* [[백년전쟁]]보다 훨씬 이후의 시기를 다룬 소설 [[삼총사]]에서도 주인공 [[달타냥]]이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고 지칭하지 않고, 고향인 [[가스코뉴]]를 앞세워 가스코뉴인이라고 하거나 [[리슐리외]] [[추기경]]을 포함한 나머지들도 달타냥을 가스코뉴 청년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후에도 '하나의 [[프랑스인]]'으로서의 의식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 [[알렉상드르 빌라플란]]: [[나치 독일]]에 빌붙어서 [[레지스탕스]]들을 살해한 인물. * [[자크 도리오]] *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군과 싸우고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조. 프랑스 입장에서는 매국노라 봐도 할 말 없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매국노.-- * 조세프 다르낭: 프랑스의 친나치, 반유대주의 단체인 밀리스 프랑세(Milice française)의 단장. * [[코코 샤넬]]: 나치 독일의 스파이였지만, 그나마 고국에 피해를 입힌 것은 적었기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 [[폴 투비에]] * [[페르낭 드브리농]]: 비시 프랑스의 파시스트로 그의 부역은 피에르 라발 못지 않았다. * [[피에르 라발]]: 비시 프랑스의 인물들 중 나치에게 가장 열심히 부역한 자이다. * [[피에르 코숑]]☆: '''그 [[잔 다르크]]를 화형시킨''' 보베의 주교. 랭스 태생으로 랭스 대성당의 주교 대리, 파리 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백년 전쟁]]에서 부르고뉴 공의 지지세력으로서 시종일관 영국 편에 선 인물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어거지로 잔 다르크를 화형시킨 뒤에도 헨리 6세의 프랑스 왕 대관식에 참석했다. 샤를 7세가 파리를 탈환하자 루앙으로 도망갔으며 그곳에서 1442년에 사망했다. 별표인 이유는 위 부르고뉴파 참조. 물론 이렇게 봐도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잔 다르크를 어거지 재판으로 화형시킨 것은 마땅히 욕먹는 이유이며 사후 사망 이후 교황 [[갈리스토 3세]]에 의해 잔 다르크 명예회복과 함께 [[파문]]을 당했다. * [[필리프 페탱]]☆: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에 항복하여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었다. 원래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나치와의 협력을 거부하다가 감금된 점. 그리고 실무는 피에르 라발이 중심이었다는 점(전후 전범으로 처형) 등을 감안하여 드골이 무기징역으로 형량을 낮추었으며, 일반 감옥에 가두지 않고 섬에 유배시키는 등의 배려를 했다. 1951년 유배지에서 병사했다.[* 다만 페탱 원수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적 혼란과 지도층의 무능 속에서, 1차 대전의 영웅에게 의지해보고자 하던 의도 하에 스페인에서 돌아와 수장직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비시 프랑스를 수립하였으나, 이는 프랑스의 일부라도 지켜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히틀러는 프랑스를 착복하였고, 비시 정권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나치에 의해 초토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정적을 제거하기도 했고, 나치에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크 도리오나 피에르 라발 같은 악질 매국노는 아니다. 히틀러의 프랑스 포로 살해 협박에 자신을 먼저 죽이라고 말해 무마시킨 일화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