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멘셰비키 (문단 편집) == 역사 == '실제로는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가 절대적으로 숫자가 적었고 ''''소수파'라는 뜻의 맨셰비키가 훨씬 숫자가 많았다.''' 둘의 이름은 결국 스스로의 세력을 과장하고자 했던 레닌의 프로파간다로 붙었을 뿐이다.' 라는 주장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문제는 아니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립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둘 사이의 분열이 절대적이지는 않았고 사회민주노동당 내에 둘 사이에 속하지 않는 제3지대의 인물들도 있었고 둘 사이를 왔다갔다한 인물들[* '''[[레프 트로츠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도 있었다. 1903년 2차 당대회에서도 처음에는 멘셰비키가 다수였으나 표결이 반복되면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었고, 4차 당대회에서는 멘셰비키가 다수파를 유지했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로 촉발된 1905년 혁명이 혁명가들의 패배로 마무리되자 멘셰비키 일부는 합법적 투쟁의 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볼셰비키 지지로 돌아서거나 아예 볼셰비키로 전향하며 세가 약해진다. 결국 [[1912년]]에 이르러 멘셰비키/볼셰비키 양파(兩派)는 정식으로 인연을 끊었다. 멘셰비키는 1차대전에서 반전파에 속했지만 당내 우파 일각은 찬전측에 서며 분열되었고 또 세가 약해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s-4|3월 혁명]](구력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공화국|임시정부]]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내각을 지지했고 케렌스키에게 끌려서 찬전론을 지지했다. 케렌스키는 대중의 지지가 높았던 멘셰비키를 끌어들여서 찬전론 때문에 나빠진 자신의 지지도를 끌어올려보려 했지만 오히려 멘셰비키의 지지율까지 낮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유일하게 전쟁 중단을 외치는 정당인 볼셰비키가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끌었고 [[러시아 혁명#s-8|11월 혁명]](구력 10월, 러시아 혁명)이 터지며 케렌스키와 함께 실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