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나라 (문단 편집) == 여담 == * 15세기 후반부터는 조세 제도의 혼란과 향촌의 해체로 국가 재정이 악화하는 한편 민간 교역이 성하였으며, 이는 [[필리핀]]을 통해 유입된 [[스페인]] [[은]] 등의 영향으로 은 본위 경제 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장거정]]의 개혁으로 일조편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국가의 재정 악화, 무능한 황제들의 실정, 북로남왜 등의 침공, 만주 왕조의 대두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다가, 빈발하는 농민 반란 속에서 직접적으로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청나라]]가 이자성과 [[장헌충]] 등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중국 내륙으로 장악하여, 명나라로부터 천명(天命)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통일 왕조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멸망 이후에도 청에 대항하여 [[남명]]의 부흥 운동, [[정성공]]의 [[대만]] 세력, [[삼번의 난]] 등이 일어났으나 모두 청나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 이민족과 공존하는 시대를 넘어 중화 제국의 구도를 완성한 점, 초기 자급자족적 질서를 추구하기도 했지만 활발한 대외 무역을 통해 흡수된 은 본위의 화폐 제도가 운영된 점, [[마테오 리치]]를 필두로 [[가톨릭]] [[선교사]]가 활동하는 등 [[서양]]과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고 필리핀과 일본 등으로부터 수입된 은 무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 점, 양명학 등 보다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 추구되어 기존 [[주자학]]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전개된 점 등으로 인해 세계사적으로는 대개 [[중세]]를 완전히 넘어선 [[근세]] 왕조로 취급받고 있으며,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하필이면 이민족인 [[만주족]]에 의해 건립된 [[청나라]]인 탓에 중국, 특히 [[한족]]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조금 더 치켜세워지고 있는 왕조이기도 하다.[* 중국은 겉으로는 [[중화사상]]에 입각, [[다민족국가]]임을 강조하며 요금원청도 모두 위대한 중국의 역사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칭기즈 칸]]도 세계정복을 이룩한 위대한 [[중화민족]]이라며 내몽골에 가짜무덤을 세워놓는 막북공정까지 하고 있다. 당연히 몽골에서는 이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다.) 실제로는 요금원청을 발전없이 파괴만 했느니 뭐니 하며 깎아내리고 한당송명을 치켜세우는 등 속마음은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시진핑]] 정권의 중국 소수민족 탄압도 그런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제대로 폭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이 명나라 문서와 청나라 문서에도 이러한 한족사관의 영향을 받아 '명나라까진 화기 제조기술이 매우 뛰어났었는데 청나라 들어서며 서양에 밀리게 됐다'는 식의 편파적 서술이 보인다. 청나라가 화기의 연구 등을 금지시키거나 게을리한 건 사실이지만 이미 명나라 시절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화기가 기존의 명나라 화기를 밀어내고 제식병기 자리를 차지했으며, 자연과학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이 기존의 한족 천문학자들을 밀어내고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오랫동안 믿어온 혼천설을 대체하는 지구 구형론을 전파하는 등의 현상이 있었으므로 '청나라 때문에 서양에 밀리게 됐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청나라가 이민족 정복왕조가 아니라 한족 왕조였어도 이런 평가를 했을까?] * 사실 명나라에 대한 재평가는 그동안의 이미지가 [[청나라]]의 편향적인 역사 서술에 의해 폄훼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점, [[송나라]]와 비교하여 폐쇄적이고 상업적으로 다소 쇠퇴했다는 기존의 이론[* 근대 서양의 충격이 있은 뒤 중국이 유럽보다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언제였냐는 질문에서 나왔다. 기존의 입장은 명나라 시기에 서양에 역전되었다는 관점이 우세했으나 최근 이것을 부정하는 연구가 속속 등장하면서 기존 관점이 흔들리고 있다.]이 흔들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근 나오는 사료나 기록에서도 과거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는 것들이 많이 나와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례로 명을 방문한 스페인 신부 라스 코르테스는 "아무리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워도, [[문맹|문자를 읽고 쓸 줄 모르는]] 어린이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반대로 청나라는 [[명 4대 암군|명나라마냥 답이 없는 암군들]]이 많은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자체의 한계 탓에 명나라보다도 외세에 더욱 밀려 중국에 도움이 안 됐다는 부정적 재평가가 많아지고 있다. 다만 이 또한 한족우월주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이민족 왕조인 청을 깎아내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서양과의 자연과학/기술적 격차가 벌어지는 건 이미 청 건국 이전인 명나라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이 점을 감안해도 청나라 말기의 상황이 명나라 말기보다도 더욱 답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결정적으로 쇄국 정책과 [[건륭제]] 시기에 있었던 지나친 [[문자의 옥]]으로 인한 폐해가 결과적으로 중국을 엄청나게 퇴보시켰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청나라 침입과 관련하여 청나라를 무조건 옹호하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과연 청나라 말기가 명나라 말기보다 더 심각하고 답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나라가 추태를 보여주며 망한 건 사실이다만(애초에 망할 땐 어느 나라든 추하지만) 명나라 역시 만주족이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철벽처럼 만주족을 막아내던 자국의 명장 원숭환을 '''알아서 처형했고''' 그렇다고 또 다른 별다른 의미있는 개혁을 보여준 것도 아니며 결국 농민반란에 의해 '''알아서 멸망했고''' 만주족은 반쯤은 주워먹는 수준으로 중원의 새 주인이 되어 한족들을 핍박하고 학살한다. 이 허무하기 짝이 없는 멸망이 과연 청나라보다 우월하고 멋있는 멸망인가? 차라리 명나라와 청나라의 멸망이 각각 다른 면에서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 '''[[중국사|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장강]] 유역에서 시작한 통일 국가였다.''' 초기 근거지였던 남경([[난징시]])은 장강이 관통하는 하류 지역에 있는 곳으로, 장강 이북과 이남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후 북경([[베이징시]])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 상당한 국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암군]]들 때문에 국력에 비해 영 저평가당하는 비운의 [[왕조]]이기도 한데 사실 명나라에서도 [[영락제]], [[선덕제]] 등 [[명군]]이 있었고 어느 왕조나 [[명군]]과 [[암군]]이 모두 있지만 명나라의 경우 불행하게도 [[말기]]에 [[암군]]들이 거의 연달아서 즉위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정제]]와 [[만력제]]라는 진짜 개노답 [[암군]] 두 명이 너무 오래동안 재위했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명은 [[북송]]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북송]]은 인구가 1억이 넘는 인구대국에다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국가]]였고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국가]]였음에도 이전 왕조들에 비해 군사적인 면에서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국력]]에 비해 저평가받는데 명나라는 [[말기]]에 나타난 [[암군]]들의 추태 때문에 [[국력]]에 비해서 저평가당하는 점이 [[북송]]과 비슷하다. * [[영락제]]때는 과거 [[한족]] 국가였던 [[북송]]보다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락제]]대에는 '''원정군'''으로 50만을 징집하여 중국에 역사적 골치거리인 [[북원|몽골]]을 박살냈다.[* 물론 영락제 시절에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점점 국력이 약해지더니 1550년의 [[경술의 변]]에서 몽골군에게 싸우지도 못한채 국토가 유린당했고 [[척계광]]이 [[원앙진]] 전법을 고안하기전까지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하는 굴욕을 겪은 적도 있다. 심지어 말기에는 국력에서 매우 열세인 [[청나라]]에게 수차례 참패하고 국토까지 유린당했고 나중에는 [[이자성|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해 나라가 반란군에게 망하고 만다.] * 역대 중국 황제 중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황제]]는 [[북위]]의 [[태무제]], [[명나라]]의 [[영락제]], [[청나라]]의 [[강희제]] 세 명뿐인데 그나마도 [[태무제]]와 [[강희제]]는 [[유목민]]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영락제]]는 막북 친정을 감행한 유일한 한족(漢族) 황제라고 할 수 있다. * 명나라는 성리학이 생겨난 [[송나라]]와 함께 [[조선|조선 왕조]]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사 왕조인데 당장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입는 [[용포]]와 [[관복]]은 명나라 시기의 용포와 관복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비슷하고 조선의 [[경국대전]]은 명나라 [[대명률]]을 많이 참고했으며 군사적인 면에서도 [[조선군]]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원앙진]] 같은 명나라의 전법이나 [[당파(무기)|당파]], [[낭선]] 등 명나라 무기들을 많이 도입했다. * 한국에서 [[환빠]]가 있다면 중국에는 명나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명빠들이 있다. 이 명빠들은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 시절에 있었던 [[정화의 대원정]] 같은 사건들을 가지고 명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면서 열렬히 찬양한다. 이런 명빠들은 한때 중국에서도 그리 존중을 받지 못하고 비웃음을 샀으나 [[동북공정]]을 포함한 중국의 [[역사왜곡]]과 [[시진핑]] 집권기에 들어선 후 유행하게된 강경하고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요즘은 오히려 호평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 황제들의 이름을 자세히 보면 항렬자와 오행상생법으로 이름을 짓는 식으로 지었다.[* 주원장 다음을 기준으로 [br]1세손 3황제 주체(棣) 木 변 항렬 [br]2세손 2황제 주윤문(允炆), 4황제 주고치(高熾) 高 항렬에 火 변 항렬, 주윤문은 당시 '''황세손'''이라 맏 윤을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br]3세손 5황제 주첨기(瞻基) 瞻 항렬에 土 변 항렬 [br] 4세손 6황제 주기진(祁鎭), 7황제 주기옥(祁鈺) 祁 항렬에 金 변 항렬 [br] 5세손 8황제 주견심(見深) 見 항렬에 水에 해당하는 삼수 변 항렬 [br] 6세손 9황제 주우탱(祐樘) 祐 항렬에 목 [br] 7세손 10황제 주후조(厚照), 11황제 주후총(厚熜) [br] 8세손 12황제 주재후(載垕) 載 항렬에 土 변 항렬 [br] 9세손 13황제 주익균(翊鈞) 18황제 주율건(聿鍵) 翊 항렬에 金 변 항렬, 주율건은 방계로 聿 자를 썼지만 金 항렬이 들어간다. [br] 10세손 14황제 주상락(常洛) 常 항렬에 水 항렬 [br] 11세손 15황제 주유교(由校) 16황제 주유검(由檢) 17황제 주유숭(由崧) 19황제 주유랑(由榔) 由 항렬에 木 변 항렬이다. [br] 12세손 주유검의 아들인 주자랑(慈烺) 慈 항렬에 火 변 항렬.[br] 황실이라 그런지, 상당히 엄하게 항렬자를 채용한 황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