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나라 (문단 편집) == 경제와 대외 교역 == [[파일:external/www.transpacificproject.com/ZhengHe-1.jpg|width=600]] 명대에는 전통적인 식량 생산의 농업에서 탈피하여 상품 작물의 재배가 활발했는데 이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분업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런 원료를 싸게 사서 직공들에게 비싸게 팔고 가공물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아 차익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송, 원 대에 개방적으로 세계 곳곳의 기술들을 받아들이던 모습과 대비되어 15세기 ~ 17세기에 중국이 유럽에 따라잡히고 형세가 역전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이 시기에 서유럽이 급작스레 등장한 아메리카와 [[대항해시대]]에 활발한 대외 원정을 통해 급격히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대의 중국 경제가 황제까지도 대외 무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던 [[남송]] 대까지와는 달리 내수에 중점을 두고 폐쇄적인 사회를 지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교역의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정화]]가 대선단을 이끌고 [[아프리카]]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원정을 지원한 영락제는 황위를 탈취한 상황에서 주변 우호국들을 늘려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항해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다시 재개하려면 국세가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극구 반대했다. 특히 황제가 정화의 원정기를 읽어보려고 하자 신하들이 임의로 불태워버리고는 소실되었다고 거짓 보고를 올리거나 채근담 같은 서적에서는 이러한 기록말소를 미담처럼 기록해놓을 정도로 대외교류에 부정적이었다. 때문에 정화가 정확히 어디까지 갔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게 되었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중국 도자기나 도편 등을 토대로 그 루트를 추측하는 상황이다. 결국 영락제와 정화가 사라진 이후에는 해상 진출에 대한 원동력이 없어진 중국은 "해금령"을 통해 공식적인 해상 활동을 억제하게 되었다. 해금령은 화둥 지방의 푸젠 성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푸젠 성은 바다에 면해 있으면서도 산악 지역인 데다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성의 경제는 어업, 해운업 등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해금령으로 인해 푸젠 성의 산업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푸젠 성 주민들은 밀무역에 종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기 왜구에 가담하기까지도 했으며 가왜(假倭)로 왜구인 척하면서 중국 해안을 노략질하곤 했다. 이 해금령도 결국엔 명나라의 왜구 토벌이 종결된 1567년 [[푸젠성]]에서 제한적으로 개항을 허가했다. 곧 동남 해안 지역 전체에 급속도로 허가되어 융경 개관과 만력 중흥 등 명조 중후기의 잠시동안의 번영과 일조편법의 전국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해상 세력에 대한 견제나 유교적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농촌 사회'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하기도 한다. >전세계를 배회하던 은이 중국에 도착하면 마치 여기가 자연의 중심이라는 듯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 >- Gomes solis, "은에 대해서 논함(Arbitrio sobre la plata)", 1621 그러나 명의 대외 무역은 민간 무역의 영역에서 상당히 활발했으며 특히 은 본위 경제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한 중기 이후의 명은 대외 무역이 활발하여 전세계의 은을 긁어 모았다.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누에바에스파냐]])의 [[아카풀코]] → 필리핀 → 명으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를 통해 유입된 은은 아메리카 전체 은 산출량의 절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근대에서 공식 무역은 조공 무역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명 조정은 공식적인 무역으로는 조공 무역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 무역, 비공식적인 무역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방관하는 상태였다. 가끔씩 해안선을 비워버리는 폐쇄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특히 북로남왜의 화 시기에) 일시적인 일에 그쳤다. 뭣보다도 그러면 '''[[세금]]이 안 들어오니까.''' 게다가 해상 활동 없이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푸젠 성 사람들에게 해금 정책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기에 밀무역이 창궐했고, 중국에 창궐한 후기 왜구를 방관하거나 비밀리에 협조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도 명 중기이며 포르투갈이 명 지방 정부에 불만을 품고 마카오를 폐쇄하자 상인들이 반발하며 들고 일어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라 한 적도 있다. 결국 1509년 광저우를 조공국에 한해 개방하고, 1567년 제한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에서의 무역을 허가했으나 명나라 상인들은 그러한 제한을 무시하고 급속히 사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바람에 명나라 정부도 어쩔 수 없이 허가 무역선 규모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 중기 이후 15세기부터 금, 은이 다시 화폐로 유통될 수 있었는데 일단 황폐해진 토지가 정리되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은의 수입이 증가했다. 민간에서 유통되는 은의 양이 늘어나면서 세금을 은으로 걷기 시작하였고 중앙에서 꾸준한 회수를 통해 주도적으로 화폐 경제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잠재 역량을 깨우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던 것이지 명나라의 경제가 침체되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세수를 통해서 비교해 보면 명대의 경제력이 송대를 따라잡지 못했고 강남 지역만을 확보했던 남송 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치 상으로는 따라잡지 못했다'는 말에 불과하다. 송대에는 아직 화폐 경제가 완성되지 못해서 화폐상의 경제력과 실제 경제력에 거품이 끼어있었고, 도량형의 단위도 더 작았기 때문이다. 결국 송대에 경제가 융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 청을 능가했다는 주장은 허구다. 비슷한 예로 북송의 동전 발행량이 명, 청대보다 많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단지 동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명은 심각한 '''구리 [[인플레이션]]'''을 겪던 국가였다. 이건 청대도 마찬가지였고, 조선을 통해 혹은 직접적으로 일본을 통해 교역을 트고 윈난 지방의 [[개토귀류]]를 통해 동광을 확보하면서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일본이 교호 개혁으로 동 수출을 금지했을 때 동전 값이 등귀하고 동전에 아연을 더 섞어서 동전이 물러졌다고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면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송대의 경제력이 전세계의 50%였다는 계산도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과장된 감이 있다고 한다. 명나라의 전 시기인 몽골 진출 초기와 원 제국 초기, 그리고 말기에 엄청난 난세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쇠퇴한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몽골 진출 극초기의 학살[* 이 학살은 [[오고타이 칸]] 시절에 끝난다. 북중국을 완전히 정복했기 때문에 정세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쿠빌라이도 북중국 통치를 잘했다. 이렇게 통치를 잘 해서 얻은 세력으로 [[아리크부카]]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남송의 경우도 쿠빌라이 칸이 친중적이어서 전과 같은 학살은 없었다. 그래서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는 생각보다 적었다. 오히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리고 원나라의 가혹하고 무능한 통치와 극심한 인종 차별,[* 북중국의 경우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시기 이후로는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등 이 원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쿠빌라이 칸]] 항목 참조), 그 후에도 중국 전체로 보더라도 이 원인으론 인구 감소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가령, 원나라의 인구는 대부분이 한족(몽골과 색목인 층의 수는 약 200만 ~ 300만인데 비해 한족의 수는 일단 한인의 수는 약 1,000만, 남인의 수는 약 6,000만, 합쳐서 약 7,000만 정도. 한인이 아무리 발해인, 거란, 여진 등을 포함한다 해도 원나라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이었다.)인데도 계속 늘고 있었다. 1290년에 약 77,000,000, 1293년에 약 79,816,000, 1330년에 약 83,873,000, 1350년에 약 87,147,000, 명나라의 인구는 1393년에 약 65,000,000. 영문 위키 참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염병[* 흑사병의 피해가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고 흑사병으로 죽은 인구수는 중국이 유럽보다 더 많았다. 약 3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흑사병]] 항목 참조.]의 발병으로 인해 중국의 인구는 많게는 30 ~ 40%가 감소했으며, 특히 북중국 지역은 4천만을 바라보던 인구가 1천 5백만 이하로 감소해 버렸다. 사실 경제에 관해서는 원대 대부분 중상주의적 정책과 항저우와 대도(베이징)를 잇는 대운하, 그리고 원의 국내 상업로와 국제 무역선의 연결을 통한 수공업 생산과 판매와 톈산 남북로를 통한 내륙의 상업로등의 이유로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했다.[* 두산 백과 '원의 사회 경제' 참고.] 애초에 몽골 제국의 업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역전 설치와 도로 정비 등을 통한 동서 문물 교류 촉진'이다. 원이 말기에 유목민 지배층의 낭비와 엄청난 군사비로 인한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교초를 대량으로 발행하여 지폐 가치가 폭락하게 한 것을 제외하면[*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참고.], 원의 경제는 대체적으로 대호황이었다. 즉 말기를 제외하고는 원의 경제엔 문제가 없었고, 항주 같은 곳은 이전보다 더 잘 나갔다. 명 초기에 자급자족의 경제 정책을 선택한 원인은 단지 교초 대량발행으로 인해 화폐 경제가 무너져 버린 탓이다. 중국에서도 자생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관점에서 보면 명 후기의 경제적 발전 양상은 매우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 학자들 가운데 이미 송대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명대나 청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본토 뿐 아니라 [[홍콩대학]] 소속 학자들이나 대만 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무조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홍콩대학과 대만 국립정치대학은 서양에서 중국사 사료를 연구할때 가장 많이 자문을 구하는 학교들이다. 홍콩대학은 영국 식민지 시절 설립되어 영어가 쓰이며, 중공 입김에서 자유로웠다. 그래서 중국본토와 달리 보다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학문탐구가 가능해 서양 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자문을 구한다.] 하지만 고대 중국부터 [[당나라]] 대까지 중국의 중심이었던 [[관중]] 지방은 생산력이 계속 감소하여, 다른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조달받는 상황이 된다. 게다가 명나라 말기에 황제와 환관들의 부패로 관중 지방이 식량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게 되자 지역민들의 반발심은 커져 갔고, 결국 [[이자성의 난]]이 관중 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전 시대에 비해 [[양쯔강]] 중류 지역에 대한 개발이 많았는데, 이런 과정에서 현대의 [[호북성]]과 [[호남성]]에 해당하는 호광성[* [[삼국지]]에서의 [[형주]] 지방, 청나라의 [[옹정제]] 시기 호북, 호남성으로 각각 분리된다.]은 엄청난 곡창 지대로 발전해 湖廣熟 天下足(호광숙 천하족)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원대 부터 명대 초기까지 호광성은 그간 전란에 휘말리면서 내지 변방에 해당할 정도로 피폐한 지역이었으나, 명 중기부터 정부 차원에서 호광성에 대한 개발을 장려하는 것으로 바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