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동환 (문단 편집) === [[롯데 자이언츠]] 시절 === [[파일:문동환.jpg]] 데뷔 해였던 1997년에는 선발로는 나오지 않고 마무리 투수 보직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기대치만큼의 성적은 거두지 못하면서 최종 성적은 2승 5패 8세이브 39이닝 ERA 4.85. 하지만 1998년과 1999년 12승과 17승을 기록하며 명실상부한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된다. 참고로 '''1999년에는 189⅓이닝 동안 17승 4패 141탈삼진 ERA 3.28'''을 찍는데, 이 해는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뛰어난 성적이었다.[* 이 당시 2점대 ERA 투수는 [[정민태]]와 [[임창용]]을 제외하면 없었다.] 다만 포스트시즌에는 매우 부진하였고, 결국 롯데 자이언츠는 한화 이글스에게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실제 한국시리즈 최종 5차전에서 결승타를 내준 선수가 문동환이었다. [* 워낙 플레이오프에서 피말리는 접전을 펼친 끝에 겨우 올라온 처지라 비단 문동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롯데선수들이 체력 저하가 극심했다] 참고로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로 유명한 플레이오프 7차전의 선발투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의 선수협 파동 당시 선수협을 지지하다가 구단에게 제대로 찍혔다. 게다가 선수협 사태 동안 구단 단체 훈련에서 제외되고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 투구 내용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나마 2000년은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7승 3패의 성적[* 이중 5승이 최약체 SK 상대였다.]을 거두고 있었으나 결국 오른팔꿈치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 아웃되었고, 이후 2001~2002년 동안 고작 4승 11패 2세이브의 성적에 그쳤다. 기나긴 부상과의 사투, 그리고 재활을 거쳤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2003년은 아예 시즌을 날려버렸다. 팔꿈치 뼛가락 수술과 인대접합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2004년 [[정수근]]의 [[KBO FA제도|FA]] 영입 당시 보상 선수로 선택되며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롯데 자이언츠]]는 톱타자를 버리면서 투수를 데려왔지만 다시 그 투수를 톱타자를 위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하루 만에 [[한화 이글스]]의 [[채상병]]과 트레이드되어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리고 13년뒤 여자배구계에서도 [[김유리(배구선수)|이러한 비슷한 상황이 벌어젔다]].] 여담으로 한화에서 뛸 당시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시절은 롯데에서 뛰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본인의 고향팀인데다 나름대로 선수 생활에서는 전성기를 보냈던 팀을 이렇게 대놓고 디스했으니 [[8888577|당시 롯데의 막장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한화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단적인 예로 [[임재철]]은 롯데에 있다가 삼성을 거쳐 한화로 갔는데 자신의 고향 팀인데다 한화 성골인 북일고 출신인데도 한화의 열악한 환경에 학을 뗐다고 말했을 정도. 실제로 이 당시 한화는 야구단에 대한 모기업의 관심과 투자가 미비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2군 홈구장이나 연습장조차 없어 1군 홈 경기가 없는 대전구장, 청주구장 등을 돌거나 인근 아마추어 야구장을 빌려 훈련했을 정도로 시설이 상당히 열악했다.][* 실제로 한화의 환경이 개선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김성근 감독 전후부터였는데 --[[살려조|선수를 죽어라 굴려야 하기 때문에]]-- 선수를 굴린 만큼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신조가 강한 김성근이 훈련 중 부상을 줄이고 빠른 재활을 위해 시설 개선을 요구했다는 말이 있다. 선수들이 지옥의 펑고를 몇 차례나 죽어라 했는데도 별 부상이 없었던 걸 보면 맞는 말인지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