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세광 (문단 편집) === 운명의 그 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문세광 여권사진.png|width=100%]]}}} || || '''1974년 7월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명의로 발급한 여권 사진''' || 1974년 7월 지인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받았다. 8월 6일 오후 1시에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해 조선호텔에서 15일까지 투숙하였다. 한 가지 여담으로 여행사 직원의 회고에 따르면 8일 문세광이 야간관광을 하고 싶다고 부탁하였고 확인 후 오후 5시쯤 방에 전화를 걸었는데 한국인 남자가 “잠깐”이란 말하고 문세광에게 바꿔주었다고 언급하였다. "부탁한 야간관광이 없다"고 말하자 "알겠다"며 끊었다고 증언했다. 다른 여직원도 같은 증언을 하였는데 13일 오후 5시 30분쯤 문세광이 투숙하고 있는 방에 전화를 걸었는데 "여보세요"라는 [[한국어]]로 대답해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 "거기 1030호실 아닌가요?"라고 물었더니 "그렇습니다. 웬일로 그러십니까"라면서 문세광에게 전화를 바꿔주어 [[일본어]]로 "대한 여행사 쪽에 시내 야간관광편이 있으니 6시까지 내려오면 된다"고 했더니 "오늘은 바빠서 안 된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고 증언하였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맑은 표준어를 사용하는 30대의 남성 같았다고. 최소한 두 번 이상 한국 남자와 있었으며, 또한 8월 23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날 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두 여행사 직원과 면대해 사실을 함구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8월 15일]]에는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던 국립극장에 들어가 [[일본인]] 초청자임을 빙자하고 잠입하였다.[* 당시 중부경찰서 송OO 경감의 말에 따르면 8.15 저격 사건 전날 청와대 경호실 장OO 계장이 중부경찰서로 문세광을 데려와 김OO 중부경찰서장과 최OO 정보과장에게 소개하고 문세광을 검문하지 알고 입장하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최OO 정보과장은 대통령 경호실 장OO 경호관이 "장관을 만나러 온 사람이다"라고 말해 장OO 경호관과 알고 있는 재일 한국인이라고 생각해 들여보냈다고 진술했다.][* 문세광이 묵었던 [[조선호텔]]에서 국립극장으로 갈 때 호텔택시를 대절해서 가려고 했으나 조선호텔은 호텔택시가 있는 호텔이 아니어서 마침 누군가가 타고와서 조선호텔에 와 있던 호텔택시를 타고 갔다. 그 호텔택시가 바로 '''영화 [[택시운전사]]로 알려진 [[김사복]]의 [[포드 20M]] 택시였다.''' 다만 [[김사복]]이 운전한 게 아니라 보조운전사 황수동 씨가 운전했다.][* 당시 사건 수사에서 황씨는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고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을 가리키며 "쿠루마"란 말을 덧붙여 기다리고 있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고 한다. "하차선에서 정문 입구 계단까지는 15m쯤 되지만 계단을 오르기 전에 차머리를 주차장 쪽으로 돌려 어디로 들어갔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12시까지 기다리다가 문세광이 나타나지 않아 호텔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저격 당시 찍힌 사진.png|width=100%]]}}} || || '''저격 당시 찍힌 사진''' ||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낭독하던 중 뛰어나오면서 총을 발포하였으나, 대통령의 암살에는 실패했고, 그 와중에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자세한 전말은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문서를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