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종(고려)/생애 (문단 편집) == 거신의 난 == 이러한 태평성대 속에서도 한차례 쿠데타가 일어날 '''뻔''' 했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바는 이러하다. >(중략) 처음에는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왕을 폐하고 [[평양공|왕기]]를 세울 것을 꾀했다. 문종 26년에 병사(兵士) 장선(張善)이 고변을 올리므로 명하여 거신을 죽이고 그 족속들을 주멸(誅滅)하였다. 왕기는 이미 죽은지라 이에 왕진(王璡)을 남해에 유배하고 왕영(王瑛)은 어렸으므로 면하였다. 또 평장(平章) 왕무숭(王懋崇),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李氏),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李氏)가 그 음모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에 왕무숭 및 그의 아들 왕정(王靖)을 안동에 내치고 장녕궁주와 수안택주는 곡주에 내쳤다. 장선을 발탁하여 장군으로 삼고 자손에게도 각각 직 1급을 사하였다. >---- >《[[고려사]]》 >병오일.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했다. >---- >《[[고려사]]》 문종 26년 7월 기사 하급 무관이었던 거신(巨身)이 문종의 동생인 [[정간왕|평양공 왕기]]를 천자(天子)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흐지부지되어서 결국 쿠데타는 취소된 상황에서 장선이라는 병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문종에게 "저 자식들 저거 쿠데타 일으킬뻔했음요"라고 꼰질렀고, 이에 거신을 처형하고 그와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유배보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웃긴 건 역모를 들킨 것이 [[정간왕|평양공 왕기]]의 사망 3년 후인데다 장선이 고변하기 수년 전에 이미 쿠데타 모의가 흐지부지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쿠데타의 핵심인 [[정간왕|평양공 왕기]]는 이후 처벌이 아닌 가장 큰 혜택을 받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정황이 좀 묘하다. 게다가 이 반역에 대한 자료들이 부족한 형편이라 지금도 학계에선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예를 들어 이 때 언급된 장녕궁주와 수안택주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정황상 [[정간왕|평양공 왕기]]의 아내들로 서로 자매다. 수안택주가 왕진의 아내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럴 경우 수안택주도 왕진과 같이 해남으로 유배를 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과부였기에 본가로 환송된 것으로 보이고, 또 최대의 문벌귀족 가문이었던 [[인천 이씨|인주 이씨]] 가문 출신이라는 정도만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참고로 사료에서 '수안택주'는 이 시기 이후의 기록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수안택주는 1088년생이라 1072년 쿠데타 모의 사건에서 언급된 수안택주와 동일인물이 아니다. 한편 역모에 가담한 왕무숭은 [[왕가도]][* 본명은 이자림]의 아들로 문종의 이복형인 [[덕종(고려)|덕종]]의 제2비 [[경목현비]]와 남매지간이다. 왕가도의 손녀이자 왕무숭의 딸이 [[이자연(고려)|이자연]]의 조카 [[이예(고려)|이예]][* 문종의 제2비 [[인예왕후]]의 사촌]의 후처가 되었기에 [[인천 이씨|인주 이씨]]와 사돈 관계였다. 이 왕무숭의 직책이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상서성]] 병부의 장관)였던 점을 들어 병권에 대한 정치적인 싸움이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러나저러나 당시 정국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 쿠데타 모의였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고려사 <문종 세가>에선 저 단 한 줄이 거신의 쿠데타에 대한 설명의 전부이다. 이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정간왕|평양공 왕기]]는 이후 정간왕으로 추증되어 고려의 제후왕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