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고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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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위 이전
2. 내정
2.1. 재정 개혁
2.3. 중앙집권체제 강화
2.4. 개성부 복구, 남경 및 서경 부속도서 설치
2.6. 조세제도의 완성
2.7. 유교와 불교의 조화
2.8. 무신 처우 개선
3. 외교
3.1. 연려제요(聯麗制遼)
4. 거신의 난
6. 사학의 발달
7. 태평천자의 붕어



1. 즉위 이전[편집]


文宗章聖仁孝大王 諱徽 字燭幽 古諱緖。顯宗第三子 母曰元惠太后金氏。顯宗十年己未十二月癸未生 十三年 封樂浪君 靖宗三年 冊爲內史令。十二年五月丁酉 靖宗薨 卽位于柩前 百官奉國璽 詣重光殿朝賀。

문종 장성인효대왕의 휘(諱)는 휘(徽)이고, 자는 촉유(燭幽)이며 원래 이름은 서(緖)이다. 현종의 셋째 아들로 모친은 원혜왕후 김씨이다. 현종 10년 기미년 12월 계미일에 태어나 같은 왕 13년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고 정종(靖宗) 3년에는 내사령(內史令)으로 임명되었다. 정종 12년 5월 정유일, 정종이 죽자 그 영구 앞에서 즉위하니 백관들이 국새를 받들고 중광전(重光殿)에 나아가 하례했다.

고려사》 <문종 세가> -총서-.


王幼聰哲 及長 好學善射。志略宏遠 寬仁容衆 凡所聽斷 不復遺忘。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았다. 품은 뜻이 웅대했고 사람들을 관대하게 포용했으며, 한 번 결재했던 일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고려사》 문종 37년

부왕은 2•3차 여요전쟁을 치른 '중흥지주' 현종 원문대왕(제8대)이었고, 모후는 원혜왕후였다.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문종의 즉위 이전 관작
봉호
낙랑군(樂浪君)
봉지인 '낙랑'은 평안도 일대의 별칭이다.
직위
내사령(內史令)
고위 왕족에게만 봉하는 명예직. 명목상 중서문하성의 최고위 관직이다. 실제 실권을 가진 최고위직은 문하시중이었다.
1037년에 중서문하성의 명예 최고위직인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1046년 5월, 형 정종이 붕어하자 유조에 따라 고려의 천자가 되었다. 정종이 아들이 넷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우 문종에게 선위한 이유는 태조 신성대왕의 《훈요 10조》 중 제3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내사령(內史令) - 낙랑군 왕휘는 짐이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약한 성품이 이웃 나라까지 알려졌으니 그에게 보위를 전해 밝은 빛을 나타내게 하리라.

- 정종의 유조(遺詔).


2. 내정[편집]


즉위하자마자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령하여 율령(律令, 형법과 행정법)과 서산(書算)을 정리하도록 했으며, 불교를 증흥시키고, 치세 기간 측신인 이자연(고려)과 최충을 중용했다.


2.1. 재정 개혁[편집]


制曰 諸州府郡縣 逐年盛設輪經會 慮外吏憑此聚斂以成勞弊。今後醉飽娛樂之事 並宜禁斷。

(2월) 정유일. 왕이, "모든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는 해마다 성대하게 윤경회(輪經會)를 여는데, 외리(外吏)들이 이를 핑계로 재물을 거두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금후로는 거창하게 술자리를 벌이거나 풍악을 울리는 일을 모두 엄금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고려사》문종 정해년(원년)


27세의 혈기넘치는 청년 군주 문종은 즉위 초부터 선왕인 정종이 마련한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그 중 하나가 각 지역마다 강제적으로 열려 외리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악용되었던 윤경회를 폐지한 것이었다. 윤경회는 불교의 경전을 여러 사람이 서로 돌리는 의식으로 불교 의식 중 하나였지만 그 규모가 커지고 방대해졌으며, 이에 드는 경비가 커지자 폐단이 생겼다. 문종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윤경회가 놀이화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시킨 것이다.

또한 임금이 검소해야 나라가 검소해진다며 금•은으로 장식된 어좌와 발 디딤판을 동과 철로 바꾸고 금실, 은실로 짜여진 이불과 요는 모두 견직으로 교체했고, 환관을 10여명으로 축소시켰다.


2.2. 사법제도 정비[편집]


戊申 制曰 法律刑罰之斷例也 明則刑無枉濫 不明則罪失輕重。今所行律令 或多訛舛 良用軫懷 其令侍中崔冲 集諸律官 重加詳校 務從允當。 書算業 亦令考正。

(6월) 무신일 왕이 말하길, "법률은 형벌을 부과하는 기준이니, 그것이 명백하면 억울하거나 지나친 형벌이 없게 되고 명백하지 못하면 형벌이 공평성을 잃게 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율령 가운데 어떤 것은 오류가 많아 매우 우려되는 바가 있으니, 시중(侍中) 최충으로 하여금 율관(律官)들을 모아 다시 세밀하게 검토한 후 적합하게 고치도록 하라. 서업(書業)과 산업(算業)도 역시 잘 검토해 바로잡도록 하라."

문종 원년 6월 기사


또한 문종은 범죄자들이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신경을 썼다. 원년에도 위와 같이 최충에게 법을 개정하도록 조치했고, 이어 1047년 8월에는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여 한번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다. 짐(朕)은 사형수를 판결할 때마다 반드시 세 번 심사를 하고도 오히려 실정에 어긋나지 않았을까 염려해 왔다. 그럼에도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어 한(恨)을 품게 되면 가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으니 법관들은 부디 잘 살피고 조심하라."

라며 삼복제(三覆制)를 시행토록 했으며, 1061년인 문종 15년에

"지금부터는 형조의 관리들을 정선해 일을 맡김으로써 억울한 형벌을 당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

는 지시를 내리는 등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이 발생하는 것에 안타깝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다음해인 1062년 죄수 심문에는 반드시 형관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최대한 공정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을 마련해 불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문종은 억울한 죄수가 생기는 것을 염려해 최대한 벌을 내리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아래 나오는 거신의 반란 때도 주도자인 거신을 제외하면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그쳤다. 보통 반역죄에 해당하는 짓을 했을 때 군주는 해당 가문을 아작을 내는데 그에 비하면 정말 파격적인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 기록들에도 죄수들의 건강과 억울하게 수감된 죄수가 있는지 염려하거나 본인이 직접 재심사를 하는 기록들이 자주 나온다.


2.3. 중앙집권체제 강화[편집]


한편 문종 집권기 이전까지 고려는 중앙집권의 확립을 위해 지방의 호족과 향리들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제6대 성종 대에 처음으로 관리를 지방에 파견한 이래로 제8대 현종, 제9대 덕종 대를 거치며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강화해 나갔는데 이를 문종이 대대적으로 손을 본 것이다.

기존 12주에 절도사를 배치했던 제도를 폐지하고, 5도호부/75도로 나누어 안무사를 배치토록 했다. 그 후 4도호부/8목/56지주/56군사/18진장/20현령으로 다시 개편했다. 그 뒤에도 1077년 향리의 자제를 수도 개경에 머물도록 해 지방 호족들의 힘을 빼놓는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되었다.

2.4. 개성부 복구, 남경 및 서경 부속도서 설치[편집]


재위 16년 차에 문종은 부왕 현종이 폐지한 개경의 산하 행정구역이었던 개성부를 복구했다. 현종은 개성부를 폐지하고, 개성현과 장단현으로 찢어 상서성에서 직속 관리하게 했는데, 문종은 개성부를 복구해 중앙정부의 부담을 줄였다.

재위 21년 차, 문종은 양광도(楊廣道)에 속한 도시 양주(楊州)('양'광도의 양이 양주)를 부수도인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이는 개경, 서경, 동경의 기존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했는데, 훗날 황권 강화를 전면적으로 시도했던 제15대 숙종은 '남경개창도감'을 두어 이궁까지 창건했다.

남경의 설립으로 이제 제1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동경, 서경, 남경 등 '3경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종 치세의 남경은 큰 변화없이 계속 존재하다가 제25대 충렬왕 34년에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고, 제32대 우왕, 제34대 공양왕 때 잠시 수도가 되었다가 조선 왕조가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수도로 삼게 된다.

재위 16년 차, 제7대 목종이 개칭한 호경(鎬京)은 문종에 의해 '서경'(西京)으로 복구되었다. 문종 대의 서경은 부수도였지만 황성을 두른 장락궁이 존재했는데 황성은 천자가 있는 수도에 세우는 성이다. 즉 서경은 천자가 있는 도시였다. 또한 서경엔 독자적인 분사(分司) 정부가 있어서[1] 고려 제2수도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었다.

문종은 제1수도 개경에 부속도서 개성부(開城府)가 있듯이 서경에도 '경기 4도'(京畿四道)를 설치해 제2수도 서경의 부속도서를 구성했다.[2]. 부속도서의 단위가 개경같은 '부'(府)가 아닌 '도'(道)인 이유는 서경이 제2수도이기 때문에 지위의 차이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서•남경 중 유일하게 서경에만 부속도서를 설치해 서경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서경의 '경기 4도'는 고려 역사 최초의 경기도이며, 훗날 인종(제17대)때 묘청의 난으로 인해 폐지되어 6현으로 찢어지고 격하된다.

2.5. 오등봉작제 완성[편집]


문종은 공, 후, 백, 자, 남으로 대표되는 5등작 제도를 도입해 제도를 성문화했다. 문종의 5등작을 오등봉작제(五等封爵制)라고 하는데, 오등봉작제는 황족이 받는 작위와 신하가 받는 작위가 서로 달라 이원화되어 있었다는 독창성이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오등작 문서 참조.

문종의 오등봉작제는 고대 중국 왕조인 주나라의 제도를 본 떠 주나라 천자 아래 5등작 제후가 천하를 수호한 것을 고려에 대입했다. 문종의 오등봉작제로 인해 고려는 대왕 아래 5등작 이성 제후, 3등작 종실 제후가 나뉘어져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나타내게 되었다.

문종은 고려의 천자국 체제를 강화한 셈이다. 오등봉작제는 제25대 충렬왕 재위 초기까지 사용되다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폐지되었고, 제31대 공민왕이 다시 부활시켜 재위 5년 ~ 11년, 재위 18년 ~ 21년까지 사용했다.

2.6. 조세제도의 완성[편집]


재위 3년째인 1049년에 현직 귀족들에게만 토지를 내렸고, 공음전을 지급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법은 5품 이상의 고위 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해 문•무 양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공음전시법은 상속과 매매가 가능한 공음전시를 내리는 별도의 법률로 이걸 1049년에 시행해서 고위 귀족들에게는 피해가 없게 만든 다음, 퇴직 관리에게는 전지를 주지 않는 경정전시과가 1076년에 시행되는 것이다.

공음전시법은 사실상 고위 관직에 대한 땅 몰아주기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이 공음전이란 것이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거라 말도 꽤 많이 나왔다.

이는 경종(제5대)이 976년에 시행한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라는 토지 제도를 실시한 것을 목종(제7대)과 덕종(제9대)이 개정을 했고, 이것을 다시 문종이 공음전시법으로 개정한 것이었다.

원래 이 공음전시법은 관리들의 생활을 안정화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고위 관리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좀더 안정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종이 시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은 제도는 아니었다. 이것 때문에 문벌귀족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자세한 것은 하단의 그늘 항목 참조.

다음해인 1050년, 기상이변 등의 천재지변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피해액에 따라 세금을 면해주는 재면법(災免法)과 현지 수확 상황을 지방관이 조사한 후, 농작물의 피해 정도에 따라 세금을 줄여주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제정했다.

1054년에는 전품제(田品制)를 도입했다. 이는 해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상전', 1년 경작하고 1년 쉬어야 하는 땅을 '중전', 1년 경작하고 2년 쉬어야 하는 땅을 '하전'으로 하여 등급별로 나눈 땅에 세금을 다르게 매기는 것이었다. 이로써 평민들의 세금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만들었다.

또한 1076년 12월엔 기존의 전시과 제도를 약간 손을 본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를 시행했는데 이 제도는 14세기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토지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이때 태조 왕건이 부분적으로 시행한 이래 간간히 유지되던 녹봉제(현물이나 월급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직책만 있고 별다른 업무를 하지 않는 관리들에게도 지급되던 토지를 더 이상 지급하지 않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현안은 토지 지급 대상자인 공신과 관리들 수가 늘어나 토지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시행한 것이다.


2.7. 유교와 불교의 조화[편집]


문종은 자신의 넷째 아들 의천을 포함한 총 3명의 왕자를 출가시키는 한편 성종(제6대) 때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원래 현종(제8대) 때 이미 부활했으나 완전히 정착된 것은 문종 대였다. 이를 통해 고려의 국교인 불교가 다시 융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승과(僧科), 왕사(王師), 국사(國師) 제도를 완성시켜 승려들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승려들의 우대를 이용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1059년 8월, 아들이 3명 이상인 집에 한해 15세 이상인 아들 1명만 출가가 가능하도록 제한하는 칙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요나라의 《거란대장경》이 처음으로 고려에 반입되기도 했다.

1067년에 전무후무한 규모의 흥왕사를 창건한 것으로 유명한데 완공에 13년이 걸렸으며, 총 2,800간으로 규모가 궁궐에 아슬아슬하게 못 미쳤다고 전한다. 문종은 또 여기에다 144근, 427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였으며 절 주변에 성벽까지 둘러쳤다.

흥왕사에 거주하는 승려만 수천 명 규모였다. 각종 불교 행사를 주최해서 하루 걸러 하루씩 불교 행사를 빙자한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개경의 백성들은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비대해진 대신 세력을 견제하고 전란으로 지친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실제로 이후 의천이 주지로 부임한 흥왕사는 왕권 강화를 위한 중심 사찰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 시기 교종 파벌들은 모두 문벌귀족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왕실은 광종(제4대)의 불교 통합 운동이 실패한 이후 가끔 사찰이나 세우면서 한 축만 챙기고 있었던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종을 왕권 강화 차원에서 통합하려고 한 것이 의천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의 발달은 사찰과 승려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고, 술과 고기를 먹는 등 세속화되는 모습을 낳았다. 그리하여 1056년에 문종이

"승려답지 못한 자에겐 엄히 벌을 내릴 것이다."

라는 칙서를 반포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교가 부흥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문종은 유교의 발전도 같이 꾀했다. 그는 직접 부왕이 최초로 문묘에 배향했던 설총최치원 등을 존중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2.8. 무신 처우 개선[편집]


문관의 힘이 강력했던 고려 초중기에 무관에 대해 혜택을 주었던 것도 바로 문종이다.

성종의 관제 개편 이후 고려의 관직은 문반직과 무반직으로 나뉘었다. 무반직 중 최고위 직위인 상장군(上將軍) 직의 품계를 정3품{정3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으로 정하여 상당히 높은 대우를 해주었다. 2성 중 중서문하성 최고위 직위이자 문반직 중 최고위 직위인 문하시중이 종1품{종1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서성 최고위 직위인 상서복야가 정2품{정2품 특진(特進)}인 것을 감안하면 상장군이 정3품이 된 것은 문벌귀족이 지배층인 국가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문종은 아버지 현종 당시 외세의 침략을 겪은 것을 반영해 나라를 이끄는 것 만큼이나 나라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 이와 같은 정책을 펼쳤다.


3. 외교[편집]


고려의 국력이 정점에 달했던 황금기답게 국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해 비록 요나라북송의 연호를 쓰고 그들을 상국으로 대하긴 했지만 고려도 나름대로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었고 요나라와 북송도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최종필의 이름 강제 개명 사건이 있는데 사건 내막은 이렇다. 1055년 10월 요나라의 예부(禮部)에 갔던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종필(崔宗弼)이 돌아와서 "거란 놈들이 제 이름에 지네 황제 이름이 들어가있다고 지들 마음대로 바꿨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전대 황제인 흥종(興宗)의 휘가 거란식으론 야율지골(耶律只骨), 중국식으론 야율종진(耶律宗眞)이었는데 최종필의 '종'(宗) 자와 같다고 거란 측에서 서신에 적히는 이름을 '최필'(崔弼)로 바꿔버린 것이다. 최종필의 말을 들은 신하들이 "사적인 편지도 아니고 국가 간의 서신인데 네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가 자기네 황제 이름과 같다고 빼버리면 폐하의 체면이 어떻게 되시겠느냐. 바꾸기 전에 폐하의 뜻을 물어보겠다고 대답했어야지. 글자에서 획 하나 빼거나 점 하나 줄여도 되는 일인데 글자가 통째로 빠지는걸 보고만 있었더냐. 즉시 벌하소서!"라며 반발했지만 문종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넘어가줬다.


3.1. 연려제요(聯麗制遼) [편집]


1004년 거란과의 영토 전쟁에서 패배해(전연의 맹)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치욕을 당해 온 북송은 신종(神宗 : 1068년 ~ 1085년 재위) 때 신법당[3]

이 집권한다. 신법당은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그 배후의 고려와 연합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의 외교 전략을 수립한다. 하지만 고려는 북송의 이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외교 관계를 재개한 두 나라는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한다. 송나라와 거란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해 영토 분쟁을 유리하게 이끈 고려식 등거리 실리 외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박종기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송·거란·여진 사이 줄타기 외교 … 103년 만에 보주 탈환


북송 역시 단교해온 고려에 손을 뻗으며 고려와 연합해 요나라를 제압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라는 외교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고려 문종은 북송의 이러한 계산을 파악하여, 현종 대 이후 끊겼던 북송과의 연줄을 다시 잡았다.

또한 북송과의 재수교는 고려의 급격한 국력 상승을 나타내는 모습이기도 하다. 문종은 요나라에 어떠한 긍정적인 제스쳐를 취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 동쪽 영토를 거란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를 청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1055년 7월, 압록강 동쪽에 요나라가 성을 쌓고 다리를 설치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가을 7월 초하루 정사일.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거란의 전 태후와 황제는 조서를 내려 압록강(鴨綠江) 동쪽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란이 성과 교량을 가설하거나 전투용 방책과 사격용 궁구를 설치하면서 점차 국경선을 넘어오니 이는 욕심이 지나친 것입니다. 이제 또 우정(郵亭)까지 새로 만들어 우리 영토를 잠식하고 있으니 《춘추》에서 지적한 '제멋대로 뻗어나가게 방치하지 말리니 더 이상 방치하면 제어하기 어렵다.'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거란의 동경유수(東京留守)에게 국서를 보내 더 이상의 군사 행동을 중지하도록 경고하되, 그들이 거부하면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건의에 따라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국경으로 삼아왔습니다. 하물며 전 태후와 황제께서도 책문을 보내 은혜를 베풀면서 영토를 분봉할 때에도 또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상국에서는 우리 영토 안으로 들어와 교량과 보루를 다수 설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보내 입조해왔으며, 또한 조정에 글을 올려 옛 땅을 돌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아직까지 허락을 얻지 못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최근에는 내원성(來遠城.지금의 압록강 검동도)의 군사들이 우리 성 바로 근처까지 사격용 궁구(弓口)를 이설했으며, 망루를 만들려고 건축 자재까지 쌓아 놓음으로써 변경의 주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동경유수께서는 이웃나라와의 친선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실정을 잘 헤아려 황제께 잘 보고해 주셔서 우리 땅을 돌려받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임의로 설치한 성과 교량, 전투용 방책과 궁구 및 망루는 모두 철거하도록 해주십시오."

《고려사》 <문종 세가> 문종 9년(1055) 을미년 가을 7월


간단히 요약하자면 정중하게 쓰긴 했지만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에 다리를 설치 → 문종 曰 "니네 지난번에 우리 아부지랑 협의할 때 압록강 경계가 우리 영토라고 했는데? 좀 꺼지지?"

이 같은 요구에도 요나라가 답변을 하지 않자 문종은 "저놈들 대답할 때까지 사신 보내."라고 명했다. 그래서 요도종에게 축하 사절단을 보내는 편에 항의문도 같이 보냈다. 그럼에도 요나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진 않았고, 요나라에서 오히려 태자 책봉의 사절단을 고려에 보내 토산물을 보내주는 등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요나라가 고려의 강경한 대처에도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은 고려의 국력이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이미 1019년 귀주 대전에서 쓴맛을 본 요나라는 덕종(제9대) 때 정주에 침입한 것을 빼고는 다시는 고려의 강역을 넘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한 요성종요도종 이후 다시금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주변국 침략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린 탓도 컸다.

문종은 강대해진 고려의 국력을 바탕으로 1058년 8월 서해를 건너게 할 큰 배를 만들도록 지시해 북송과의 재수교를 명령했지만 요나라와의 외교 마찰을 우려한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068년 북송에서 먼저 상인 황신(黃愼)을 고려로 파견해 재수교를 강력하게 원하는 속내를 내비치자 문종도 북송과의 관계 복구를 통하여 고려-북송-요나라 간의 팽팽한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판단한 끝에 의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집념으로 북송에 사신을 파견했고 1071년 3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송과의 재수교를 강행하기에 이른다.[4]

희령(煕寧) 3년(1070년) 군(郡), 현(縣)에서 고려의 사신을 접대했었던 사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힘들어 했는데, 규정을 만들어 반포하고 비용은 모두 관(官)에서 지급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또 고려 사신이 중국 말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으로 재물과 이익을 노리는 자들이 접근해 올까 염려해 고려 사신이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휘(徽.고려 문종의 이름)가 이부(二府)에 물품을 보낸 것이 많자, 조칙을 내려 시장에 위임하여 되도록이면 (값이 비싼) 겸백(縑帛.비단)을 팔아서 보답하도록 했다. 휘(徽)가 또 표(表)를 올려 의약(醫藥. 의원과 약) 및 고려 사람을 가르칠 화공(畵工), 소공(塑工) 등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니 아중(羅拯)에게 조칙을 내려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희령 9년(1076년)에 고려가 또 최사훈(崔思訓)을 보내 오자 중귀인(中貴人)에게 명해 도정서역(都亭西驛)의 예에 따라 고려 사신들이 묵는 객관을 수리하여 매우 후하게 대우하게 하였다.

《송사》 <외국 열전> -고려-


북송에게는 고려와의 외교 라인 개설이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일이었으며, 이 때문에 당시 고려 사신이 지나가는 곳에 사람을 못 다니게 했을 정도로 굉장히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후 예종(제16대) 대에 접어들어서는 마침내 고려 사신들에 대한 대우가 '국신사'로 승격되어 북송에서 세폐를 바치고 있었던 탕구트족의 서하보다 높고,[5] 거란족의 요나라와 동등한 대접을 받기에 이른다.

북송의 신종과 고려의 문종은 서로 친필 편지로 건강을 걱정할 만큼 친분이 두터웠다. 문종이 1078년 풍비증에 걸리니 북송에서는 의사 안도(安燾)와 진육(陳陸)을 고려에 파견하여 문종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었다. 같은 해 다시 한림의관(翰林醫官) 형개(邢愷, 혹은 형조), 주도능(朱道能), 심신(沈紳), 소화(邵化)를 고려에 파견하여 대량의 우황, 용뇌, 주사, 사향, 행인 등 100여 종의 귀중한 약재 등을 문종에게 증여했다.

2년 뒤 고려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柳洪)으로 하여금 인삼 각각 1,000을 답례로 보냈으며, 송나라는 그해 7월 계절풍을 타고 의관(醫官) 마세안(馬世安)을 다시 고려에 파견했다.

이러한 고려와 북송의 "의료 외교"는 양국의 친교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북송이 쇠락하는 철종, 휘종 때까지 이어진다.

북송은 또 《괄지지》, 《여지지》, 《고려풍속기》, 《고려지》 등의 지도 지리서를 도서관에 채우기 위해 고려에 청하기도 했다. 심지어 외국의 지도를 주문받아 만들어 준 적도 있어 단순한 교환이 아닌 고려의 지도 자체가 수출 대상이었다는 사례가 된다.

3.2. 여진족 복속[편집]


재위기간 동안 총 5차례 동여진족의 반란이 있었지만 모두 진압하고 고려에 복속시켰다. 1055년(문종 10) 7월 동번적(東蕃賊)을 치기 위해 시어사(侍御史)(어사대 소속 종5품 직위) 김단(金旦)을 '동로마병이사'(東路 馬兵貳師)로 봉해 파견했다. 김단은 대여진 전쟁 개시 전 아래와 같은 연설을 했다. 이후 김단 휘하의 고려군은 기세등등하게 동번적을 공격했고, 촌락 20여 곳을 차지하자 동번적은 모두 도망쳤는데 무기, 양, 말을 엄청나게 획득했다고 전한다.

"적을 맞이했을 땐 가족을 잊고 순국하는 것이 우리의 직분이다. 우리의 생사는 바로 오늘에 달렸다!"

臨敵忘家以身徇國分也我生死正在今日

- 《고려사》 <문종 세가> 中.


1080년(문종 35) 12월 동번(東蕃)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정확히 어떤 사태를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종은 매우 화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평장사 문정(문종의 차남 선종의 배향공신)을 판병마사로 임명해 3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박살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이 진압 작전으로 동번이 버리고 간 수많은 무기, 소와 말 100여 마리를 노획하는 한편 촌락 10여 곳을 점령했다.

"동번(東蕃: 동방 제후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정(文正)을 판행영병마사(判行營兵馬事)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최석(崔奭)과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廉漢)을 병마사(兵馬使)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삼아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는데, 431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밤에 길을 나누어 적의 소굴로 곧장 진군해 이른 새벽에 도착했는데 북소리와 고함소리에 땅이 진동하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군사들을 휘몰아 맹렬히 공격해 392명의 목을 베고 장수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소·말 100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이 버린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쳐부순 촌락이 무릇 십여 곳이었다.

- 《고려사》 <문정 열전>[6]


1081년(문종 36) 문종은 서번(西藩) 추장들의 직위를 승진시켜 위무하는데 동번은 추장 몇 명을 보내 말을 바쳤고 아들을 데리고 와서 문종에게 입조(入朝)시켰다. 1082년(문종 37) 동번이 조공 및 입조를 해왔고, 문종은 동번의 추장 중 자주 전쟁을 일으켰던 자들을 잡아 남쪽으로 유배보낸다. 이렇듯 문종은 채찍당근을 번갈아가며 여진족과 평화 관계를 이어갔다.

이로써 귀주 대첩 이래 지속된 고려의 황금기는 문종의 치세 동안 절정을 찍게 되었다. 여진의 대부분이 고려에 복속되어 토산물을 바치고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하는 항복)하기를 요청했으며, 심지어 거란에게 받은 벼슬을 버리고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는 부족까지 나타났을 만큼 고려의 간접 영토·영향권이 가장 넓게 확대되었던 것이 바로 이때였다. 즉 해동 천하관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고려 역사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으로 인해 인지도는 낮은 상황이다.

"유사(有司)에 명령하기를, “동여진(東女眞) 대걸라니촌(大乞羅尼村)과 소걸라니촌(小乞羅尼村)의 경계(疆界)를 조사·확정(檢定)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라.”라고 하였다."

- 《고려사》 문종 4년 4월 27일 中.


"동여진(東女眞)의 귀순주(歸順州) 도령(都領) 대상(大常) 고도화(古刀化), 부도령(副都領) 고사(古舍), 익창주(益昌州) 도령 귀덕장군(歸德將軍) 고사(高舍), 도령 검부(黔夫), 전성주(氈城州) 도령 봉국장군(奉國將軍) 야호(耶好)·귀덕장군(歸德將軍) 오사불(吳沙弗), 공주(恭州) 도령 봉국장군(奉國將軍) 다로(多老), 번장(番長) 파가불(巴訶弗), 은복주(恩服州) 도령 원보(元甫) 아홀(阿忽), 도령 나거수(那居首), 온주(溫州) 도령 삼빈(三彬)‧아로대(阿老大), 성주(誠州) 도령 이다불(尼多弗)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부(內附: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음)하여, 고려의 군현(郡縣)으로 편입되기를 간청하였다."

- 《고려사》 문종 27년 2월 21일 中.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동북 변방(東北邊) 15주(十五州) 밖(外)의 번인(蕃人: 제후국 백성)들이 잇달아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해 오면서 우리[고려] 군현(郡縣)에 편입시켜 달라는 간청이 지금에도 끊이지 않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 덕분이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먼저 종묘와 사직에 사유를 고하게 하고, 멀고 가까운 번인들이 모두 귀순하기(畢納)를 기다려서 주현(州縣)을 넓혀 정한 뒤에 몸소 종묘와 사직에 감사를 행하려고 한다. 그 행례(行禮)와 태자가 대행하는 의식 절차를 유사(有司)는 자세히 논의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 《고려사》 문종 27년 4월 3일 中.


"5월 정미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만두불(漫頭弗) 등의 제번(諸蕃: 여러 제후국)들이 요청 하기를 동번(東蕃: 동방 제후국)의 사례에 의하여 주군(州郡)을 나누어 설치(分置)한다면, 오래도록 번한(蕃翰: 천자를 호위하는 제후국)이 되어 감히 거란(契丹)의 번인들과 통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라고 하자,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내조(來朝: 지방의 신하가 조정에 와서 임금을 찾아 뵘)를 허락하라.”라고 하였다."

- 《고려사》 문종 27년 5월 5일 中.


"평로진(平虜鎭) 인접 지역에 있는 여진의 우두머리 유원장군(柔遠將軍) 골어부(骨於夫)와 멱해촌(覓害村)의 요결(要結) 등이 와서 말하기를, “저희들은 본래 이제촌(伊齊村)에 거주하면서 거란의 대완(大完) 벼슬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고려 조정의 타이름을 듣고 기유년(문종 23, 1069) 11월에 입조(赴朝: 제후로서 천자를 알현)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은 데다 또 관직까지 받게 되어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거주지가 여기서 400리나 떨어져 있어 왕래가 매우 곤란한 형편입니다. 적야호(狄耶好) 등 다섯 가호와 함께 거란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여진인들을 데려다가 멱해촌으로 옮긴 다음 호적에 편입(附籍)시켜 영구히 고려의 울타리(藩屛)로 삼아주실 것을 간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고려사》 문종 27년 5월 7일 中.


"삼산(三山)‧대란(大蘭)‧지즐(支櫛) 등 9개 촌(村)과, 소을포촌(所乙浦村) 번장(蕃長) 염한(鹽漢), 소지즐전리(小支櫛前里) 번장 아반이(阿反伊), 대지즐(大支櫛)과 나기나(羅其那)‧오안(烏安)‧무이주(撫夷州)‧골아이(骨阿伊) 번장(蕃長) 소은두(所隱豆) 등 1,238호(戶)가 와서 우리[고려]의 호적에 편입(附籍)하기를 요청합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小支櫛) 요응포(褭應浦) 해변까지는 700리에 걸쳐 장성이 수축되어 있으며 지금 제번(諸蕃: 여러 제후국)들이 줄을 이어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해오고 있는 마당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 《고려사》 문종 27년 6월 6일 中.


"만일 국경을 정하고 관방을 설치하려 할 경우... “광활한 땅(壤地)의 넓이가 끝이 없고 번인(蕃人: 제후국의 백성) 가구도 넓게 거주하고 있는 만큼 변방 끝까지 모조리 요새를 설치할 수 없으니, 요청하건대 영외의 여러 번인이 모두 우리의 주현이 됨을 기다려서 그 뒤에 점차 멀리 있는 번인까지 미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 《고려사》 문종 27년 6월 23일 中.


"〈귀부해 온 동여진인들을 귀순주에 소속시키다〉··· 9월 갑진 한림원(翰林院)에서 아뢰기를, “동여진(東女眞)의 대란(大蘭) 등 11개 촌의 내부자(內附者)들이 빈주(濱州)‧이주(利州)‧복주(福州)‧항주(恒州)‧서주(舒州)‧습주(濕州)‧민주(閩州)‧대주(戴州)‧경주(敬州)‧부주(付州)‧완주(宛州) 등 11개 주(十一州)가 되기를 요청하니, 각각 주기(朱記)를 하사하고 귀순주(歸順州)에 소속시키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 《고려사》 문종 27년 9월 4일 中.


"서여진(西女眞)의 수우나(須于那) 등 7인이 내조(來朝: 지방의 신하가 조정에 와서 임금을 찾아 뵘)하여 북조[北朝: 거란]에서 받은 벼슬(職牒)을 바쳤다. 유사(有司)에서 그의 관직을 원보(元甫)로 고쳐 주자고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 《고려사》 문종 33년 4월 11일 中.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 왕저(王佇)가 아뢰기를, “서번(西蕃: 서방 제후국) 추장(酋長) 아부환(阿夫渙) 등 9인은 마음을 다하여 우리나라[고려]의 변방(塞)을 지켰으므로, 마땅히 관작과 상을 더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명령하여 아부환(阿夫渙) 등 3인을 유원장군(柔遠將軍)으로, 산두(山豆) 등 6인을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삼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고려사》 문종 35년 1월 19일 中.


"이 달에 동번(東蕃: 동방 제후국) 반적의 우두머리 장향(張向) 등 14인을 산남도(山南道)의 먼 지역으로 유배 보냈다."

- 《고려사》 문종 36년 8월 미상 中.


4. 거신의 난[편집]


이러한 태평성대 속에서도 한차례 쿠데타가 일어날 했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바는 이러하다.

(중략) 처음에는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왕을 폐하고 왕기를 세울 것을 꾀했다. 문종 26년에 병사(兵士) 장선(張善)이 고변을 올리므로 명하여 거신을 죽이고 그 족속들을 주멸(誅滅)하였다. 왕기는 이미 죽은지라 이에 왕진(王璡)을 남해에 유배하고 왕영(王瑛)은 어렸으므로 면하였다. 또 평장(平章) 왕무숭(王懋崇),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李氏),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李氏)가 그 음모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에 왕무숭 및 그의 아들 왕정(王靖)을 안동에 내치고 장녕궁주와 수안택주는 곡주에 내쳤다. 장선을 발탁하여 장군으로 삼고 자손에게도 각각 직 1급을 사하였다.

고려사


병오일.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했다.

고려사》 문종 26년 7월 기사


하급 무관이었던 거신(巨身)이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 왕기를 천자(天子)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흐지부지되어서 결국 쿠데타는 취소된 상황에서 장선이라는 병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문종에게 "저 자식들 저거 쿠데타 일으킬뻔했음요"라고 꼰질렀고, 이에 거신을 처형하고 그와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유배보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웃긴 건 역모를 들킨 것이 평양공 왕기의 사망 3년 후인데다 장선이 고변하기 수년 전에 이미 쿠데타 모의가 흐지부지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쿠데타의 핵심인 평양공 왕기는 이후 처벌이 아닌 가장 큰 혜택을 받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정황이 좀 묘하다.

게다가 이 반역에 대한 자료들이 부족한 형편이라 지금도 학계에선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예를 들어 이 때 언급된 장녕궁주와 수안택주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정황상 평양공 왕기의 아내들로 서로 자매다. 수안택주가 왕진의 아내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럴 경우 수안택주도 왕진과 같이 해남으로 유배를 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과부였기에 본가로 환송된 것으로 보이고, 또 최대의 문벌귀족 가문이었던 인주 이씨 가문 출신이라는 정도만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참고로 사료에서 '수안택주'는 이 시기 이후의 기록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수안택주는 1088년생이라 1072년 쿠데타 모의 사건에서 언급된 수안택주와 동일인물이 아니다.

한편 역모에 가담한 왕무숭은 왕가도[7]의 아들로 문종의 이복형인 덕종의 제2비 경목현비와 남매지간이다. 왕가도의 손녀이자 왕무숭의 딸이 이자연의 조카 이예[8]의 후처가 되었기에 인주 이씨와 사돈 관계였다. 이 왕무숭의 직책이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상서성 병부의 장관)였던 점을 들어 병권에 대한 정치적인 싸움이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러나저러나 당시 정국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 쿠데타 모의였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고려사 <문종 세가>에선 저 단 한 줄이 거신의 쿠데타에 대한 설명의 전부이다. 이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평양공 왕기는 이후 정간왕으로 추증되어 고려의 제후왕이 된다.


5. 문벌귀족의 흥성[편집]


사실 고려의 최전성기를 만들어 태평성대를 꽃 피웠지만 그것이 문종의 역할인지, 또 문벌귀족들의 성장을 촉진했던 시기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태평성대의 모습들 중에서도 곳곳에 문벌귀족들의 권력 강화의 움직임도 상당히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문종 재위 3년째인 1049년에 5품 이상의 고급 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해 양반 신분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시행된 것과 남반직의 최고위가 이전의 "4품위"에서 "7품위"로 떨어져 계급이 낮아지기도 했다. 이는 남반이 천시되고 양반들의 신분 우월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공음전시로 세습 가능한 토지를 물려주게 한 것도 음서와 함께 문벌귀족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기는 문벌귀족 출신 재상인 이자연최충이 중심이 되어서 통치한 문벌귀족 통치기였는데 실제로 문종의 업적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는 편이다. 물론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 주도하든 재상이 주도하든 본인들 입장에선 정치 잘하면 그만이긴 하다만. 다만 오늘날 입헌군주제랑 달리 이 당시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대거 강화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어보인다.

문종이 이자연을 키운 이유가 흥왕사 건립과 북송과의 국교 재개 등에서 의견이 일치한 것을 생각하면 약간은 조선 말기 김조순신 안동 김씨의 관계도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시기 문벌귀족들은 스스로의 특권을 늘려가고 있었는데 문종이 이에 대한 저항을 한 것이 흥왕사를 만드는데 그쳤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천 이씨 같은 문벌귀족 세력의 대두에는 어느 정도 문종 본인이 기여한 책임이 있는데 이는 문종이 이자연의 세 자매와 결혼한 이후 본격적으로 인천 이씨 세력이 외척 가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자연의 맏딸 인예왕후순종(제12대), 선종(제13대), 숙종(제15대) 등을 낳았으며, 이러한 일은 이자연의 고모부가 되는 김은부가 현종(제8대)을 상대로 먼저 행한 바가 있었다. 두 집안 모두 3대에 이르기까지 세도를 누렸으나 마지막 주자인 이자겸 대에서 제대로 망한다.


6. 사학의 발달[편집]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이 실시되었고 최충9재학당을 포함하여 사학 12도가 이뤄지는 등 귀족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다만 이게 큰 문제가 되버린 것이 국학인 국자감이 이후 지리멸렬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문음이 중시되던 고려에서 과거 제도마저 문벌귀족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 시점이 바로 사학의 창궐이었다. 더구나 '좌주-문생 관계'라고 하여 지공거 시스템까지 더해지는데 지공거는 과거 출제 위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출제 경향을 잘 알고 있는 지공거 출신들에게 학생들이 따르는건 당연했던 것.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문벌귀족의 입지는 탄탄해질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 고려 국왕들은 국자감의 부활을 위해서 고생하게 된다. 문종 시대에는 사립 학원학벌의 대두가 심각해졌는데 고교법을 제정해 학생의 재학 연한을 유생(儒生)의 경우 9년, 율생(律生)은 6년으로 제한했고 낙제 제도를 신설해서 자질이 부족하면 퇴학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국자감은 자연스럽게 쇠퇴기에 접어들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이를 타파하기 위해 문종 이후 후대 국왕들은 다양한 관학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7. 태평천자의 붕어[편집]


문종은 만 28세에 즉위해 총 37년 동안 재위했다. 재위 36년째인 1082년엔 남부를 순수하고 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지만 이듬해 1083년 5월 병자일에 병에 걸리고 만다.

결국 7월 신유일, 문종은 마지막을 예감했는지 유조(遺詔)를 남긴다.

(朕)은 하찮은 몸으로 조업(祖業)을 수호해 왔다. 천명(天命)은 끝이 있으니, 이제 날(予) 돌보지 않아 오랫동안 병에 걸려 결국 대기(大期)를 만났다.

하루라도 만기(萬機)를 비울 수 없다. 오늘부터 군국정사(軍國政事)는 모두 태자 훈(勳)에게 위임하니 보위(寶位)를 전해 받도록 하라.

경 등은 나의 간곡한 말을 몸에 새겨 충효를 다하라.

- 《고려사》 <문종 세가> 中. 문종의 마지막 조령.

유조를 선포한 뒤 본궐의 편전 중광전(重光殿)에서 눈을 감았다. 빈전은 선덕전(宣德殿)에 세워졌고, 무덤인 '경릉'은 불일사(佛日寺) 남쪽에 조성되었다. 훗날 흥왕사가 문종의 원찰이 된다. 향년 만 65세였다.

《고려사》 <문종 세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배움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쏠 줄 알았다. 품은 지략은 원대했고 관대하며 민중을 끌어 안았다. 무릇 듣고 결정했었던 일은 절대 잊지 않았다.


'효자사왕'(孝子嗣王) 순종은 <문종 인효대왕 애책>을 만들어 바쳤다. 순종이 올린 <봉책>(鳳冊)엔 7월 18일 신유시에 문종이 붕어(崩于)했다고 나오며

신성(神聖)이 만든 나라를 인효(仁孝)가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고 찬양했다.

[1] 《고려사》 <백관지> -외직-[2]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 기록[3] 新法党 : 신종의 후원 아래 부국 강병을 추구하는 ‘신법'(新法)으로 혁신 정치를 편 왕안석을 지지한 정파[4] 요나라와의 수교는 현종 때인 1019년 혹은 1020년이지만 북송과 국교를 끊은 것은 성종 때인 994년인데 제1차 여요전쟁 때 북송의 태종이 원병을 거절했기 때문이다.[5] 사실 세폐는 원래 상국에서 조공국에 내리는 것이다. 이게 이 경우에는 바쳤다고도 쓸 수 있는 건 서하는 군사적으로 북송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 서하가 조공국이 되는 대신 북송이 돈을 바쳐 평화를 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전상 요나라와 동급의 대우를 받던 고려가 서하보다 우위로 대우받을 수 있었던 건 형식상으로도 합리적인 게 된다.[6] 문정: 장연 문씨(長淵 文氏)의 중시조(中始祖)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고위 문신 관료이자 당대의 걸출했던 명재상(名宰相)이었다. 문종 대왕(文宗大王) 재위 시절 동번국(東蕃)의 반란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장연현 백작(長淵縣 開國伯)에 봉작되었으며, 이후 농사철을 피해 흥왕사(興王寺)의 토목 공사와 12곳의 감창사(監倉使)·순찰사(巡察使)를 정지시켜 민생의 폐해를 제거하도록 했다. 또한 제후(諸侯)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만년(晩年)에는 사학12도(私學十二徒) 중 하나였던 정헌공도(貞憲公徒)를 창립하여 고려 전·중기 유학 교육 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사후 선종(宣宗)의 배향공신(配享功臣)에 선정되었으니, 시호는 '정헌'(貞憲)이다.[7] 본명은 이자림[8] 문종의 제2비 인예왕후의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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