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나모토 (문단 편집) == 역사 == 겐지 중에서도 일파가 나뉘어 하위로 21류파가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세이와 겐지'''(清和 源氏, 청화 원씨) 계열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여담이지만 21류파라고는 해도, 이 중에는 천황의 자식인 친왕 중 한 명만 따로 '겐지'의 성을 얻어 분가했다가 곧바로 후손이 단절되어 사라지는 등 사실상 이름뿐이었던 분파들도 전부 포함한 숫자이다.] 세이와 겐지 계열은 제56대 [[세이와 덴노]][*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인 25대 [[무령왕]]의 후손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아들로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고손자]의 자손들로, 그중에서도 카와치쿠니(河内國, 하내국)을 근거로 했던 '''[[카와치 겐지]]'''(河内 源氏, 하내 원씨)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한 [[쇼군|세이이다이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이 계열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인 [[아시카가]] 가문, [[에도 막부]]의 쇼군가인 [[도쿠가와]] 가문[* 남북조 시대 초기 북조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씨와 대결했던 요시노 조정, 즉 남조의 충신이었던 닛타씨의 후예를 자청했다.]도 세이와 겐지의 분파였다. 세이와 겐지 외의 겐지 류파 중 유명한 가문은 세이가케(청화가) 9가 중 하나인 쿠가 가문이나 무로마치 막부 당시 이세 슈고였던 키타바타케 가문[* 나중에 오다 가문에서 챠센마루([[오다 노부카츠]])를 양자로 들였다가 몰살, 챠센마루가 오다씨로 복성하면서 멸족된다.]이 속한 '''무라카미 겐지'''(村上 源氏, 촌상 원씨), [[센고쿠 시대]]의 유력 다이묘 가문이었던 롯가쿠씨, 아마고씨, 쿠로다씨의 시조격이었던 '''우다 겐지'''(宇多 源氏, 우다 원씨)의 사사키씨(佐々木氏)나 요리미츠 4천왕의 일원이었던 와타나베노 츠나의 후예인 와타나베씨의 원류 '''사가 겐지'''(嵯峨 源氏, 차아 원씨) 등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무가 정권 시절에도 천황의 상징성이 생각보다 강했기에 천황 가문과 연결된 일족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으므로 막부를 수립한 가문은 하나같이 천황가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처럼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를 개막한 [[정이대장군]](세이이다이쇼군) 가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성씨였던 만큼, 여러 실력자들이 족보조작을 통해서 미나모토 일가임을 자칭했다.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도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일파인 닛타 씨(新田氏)의 세라다(世良田) 도쿠가와(得川) 가문 후손을 자처하며 외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자신들의 성을 '''미나모토'''로 표기하기도 했다. '''미나모토=[[일본 열도]]를 지배하는 자(쇼군가)라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가강'''(原家康)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콩가루 집안|'''일족 간에 내분이 빈번했던 일본 내의 여러 가문 중에서도 가장 내분이 심했다.''']] 특이한 점은 몰락할 때는 물론 승승장구할 때에도 내분이 있었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호겐의 난]]의 [[카와치 겐지]] 내 부자•형제 간의 내분, '''[[겐페이 전쟁]]''' 후반기에 카와치 겐지 가문이 이세 헤이시 가문(헤이케)을 몰아붙이는 시점에서도 내전이 일어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친동생 요시츠네를 보내 자기 사촌 [[미나모토노 요시나카]](키소 요시나카)를 토벌한 사건이 있었고[* 이는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아버지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요시나카의 아버지였던 요시카타를 죽여버린 것이 컸다. 근데 그 요시나카는 또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사촌이었다.], 나중에는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까지 숙청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너무나 친족 숙청에 매달린 나머지 결국 외척인 호조씨(간무 헤이시의 분파)에게 실권을 뺏겨버렸다. 본인 직계도 단절된 건 덤] 애초에 겐페이 전쟁 이전 카와치 겐지가 약해지고, 이세 헤이시([[헤이케]])가 득세하게 된 것은 제4대 당주 미나모토노 요시타다의 암살 및 그에 연관된 잇따른 내분으로 인해 가문의 유력자들 상당수가 사라진 것이 그 원인이었는데, 이 모든 참극이 당주 자리를 빼앗으려던 요시타다의 숙부 [[미나모토노 요시미츠|신라사부로 요시미츠]]의 간계 때문이었다는 후대의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 양반을 가문의 시조로 모셨던 후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센고쿠 시대]] 다이묘 중에서도 모략과 신의 없음으로 유명했던 그 [[다케다 신겐]]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조상에 그 후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그리고 이 요시미츠와 대립했던 인물 중 요시타다의 동생이자 요시미츠에게는 또 다른 조카인 미나모토노 요시쿠니가 있었는데 이 요시쿠니의 장남은 이후 [[닛타]] 가문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은 [[아시카가]] 가문의 시조가 되어 훗날 후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대에 [[무로마치 막부]]를 건립하게 된다. 그런데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있어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더불어 일생의 숙적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닛타 요시사다]]로 앞에서 언급한 요시쿠니의 장남 가문의 당주가 차남 가문 당주의 철천지 원수였다. 그리고 [[센고쿠 시대]] 미나모토 가문의 분파 후예들간의 내분을 보면 그냥 '''겐지 일족 간의 내분이 일본 역사를 새겼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