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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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みなもと(
미나모토씨

파일:미나모토씨 가몬.svg
미나모토 가문의 가몬
조릿대와 용담
笹竜胆

씨성
미나모토노 아손(源朝臣)
본가
황실(皇室)
씨조
천황의 황자, 왕
궁가의 왕
종별
황별(皇別)
후예
사가 겐지(嵯峨源氏)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가잔 겐지(花山源氏)
우다 겐지(宇多源氏) 등

1. 개요
2. 기원
3. 역사
4. 기타
5. 미나모토 성을 쓰는 인물
5.1. 실존 인물
5.2. 가공의 인물




1. 개요[편집]


일본의 4대 본성(혼세) 중 하나. 보통 일족을 가리키거나, 설명을 할 때는 '源氏'(원씨)라 쓰고, '겐지' 또는 '미나모토 우지'로 읽는다.

'미나모토노'라고 된 것도 '미나모토'씨이다. '노(の)'는 '~의'라는 뜻으로 '미나모토 가문의' 라는 뜻이 된다. 일본 고대 귀족의 이름을 쓸 때 이렇게 쓰는데, 서양식으로 따지면 독일어의 'von',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의 'de', 이탈리아어의 'di', 영어의 'of'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헤이시(平氏, 또는 타이라), 후지와라시(藤原氏), 타치바나시(橘氏)와 함께 4대 본성, 즉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로 칭해진다. 원래는 천황의 아들이나 손자가 신하의 신분으로 강등될 때 주어지던 (우지)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족으로는 타이라타치바나가 있었다.


2. 기원[편집]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선비계 황족인 탁발(拓拔)씨가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元)씨로 바꿀 적에 방계인 남량독발(禿髮)씨를 소리가 같은 '원'(源)씨로 바꾼 일을 본따서 간무 덴노의 차남이자 제52대 천황이었던 사가 덴노가 아들들에게 '미나모토노아손(아소미)'(源朝臣)을 준 일이 처음이었다.


3. 역사[편집]


겐지 중에서도 일파가 나뉘어 하위로 21류파가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세이와 겐지(清和 源氏, 청화 원씨) 계열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1] 세이와 겐지 계열은 제56대 세이와 덴노[2]의 자손들로, 그중에서도 카와치쿠니(河内國, 하내국)을 근거로 했던 카와치 겐지(河内 源氏, 하내 원씨)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가마쿠라 막부를 창건한 세이이다이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이 계열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인 아시카가 가문, 에도 막부의 쇼군가인 도쿠가와 가문[3]도 세이와 겐지의 분파였다. 세이와 겐지 외의 겐지 류파 중 유명한 가문은 세이가케(청화가) 9가 중 하나인 쿠가 가문이나 무로마치 막부 당시 이세 슈고였던 키타바타케 가문[4]이 속한 무라카미 겐지(村上 源氏, 촌상 원씨), 센고쿠 시대의 유력 다이묘 가문이었던 롯가쿠씨, 아마고씨, 쿠로다씨의 시조격이었던 우다 겐지(宇多 源氏, 우다 원씨)의 사사키씨(佐々木氏)나 요리미츠 4천왕의 일원이었던 와타나베노 츠나의 후예인 와타나베씨의 원류 사가 겐지(嵯峨 源氏, 차아 원씨) 등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무가 정권 시절에도 천황의 상징성이 생각보다 강했기에 천황 가문과 연결된 일족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으므로 막부를 수립한 가문은 하나같이 천황가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처럼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를 개막한 정이대장군(세이이다이쇼군) 가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성씨였던 만큼, 여러 실력자들이 족보조작을 통해서 미나모토 일가임을 자칭했다.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 등도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일파인 닛타 씨(新田氏)의 세라다(世良田) 도쿠가와(得川) 가문 후손을 자처하며 외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자신들의 성을 미나모토로 표기하기도 했다. 미나모토=일본 열도를 지배하는 자(쇼군가)라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가강(原家康)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일족 간에 내분이 빈번했던 일본 내의 여러 가문 중에서도 가장 내분이 심했다. 특이한 점은 몰락할 때는 물론 승승장구할 때에도 내분이 있었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호겐의 난카와치 겐지 내 부자•형제 간의 내분, 겐페이 전쟁 후반기에 카와치 겐지 가문이 이세 헤이시 가문(헤이케)을 몰아붙이는 시점에서도 내전이 일어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친동생 요시츠네를 보내 자기 사촌 미나모토노 요시나카(키소 요시나카)를 토벌한 사건이 있었고[5], 나중에는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까지 숙청해버렸다.[6] 애초에 겐페이 전쟁 이전 카와치 겐지가 약해지고, 이세 헤이시(헤이케)가 득세하게 된 것은 제4대 당주 미나모토노 요시타다의 암살 및 그에 연관된 잇따른 내분으로 인해 가문의 유력자들 상당수가 사라진 것이 그 원인이었는데, 이 모든 참극이 당주 자리를 빼앗으려던 요시타다의 숙부 신라사부로 요시미츠의 간계 때문이었다는 후대의 기록이 있다.[7] 그리고 이 요시미츠와 대립했던 인물 중 요시타다의 동생이자 요시미츠에게는 또 다른 조카인 미나모토노 요시쿠니가 있었는데 이 요시쿠니의 장남은 이후 닛타 가문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은 아시카가 가문의 시조가 되어 훗날 후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대에 무로마치 막부를 건립하게 된다. 그런데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있어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더불어 일생의 숙적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닛타 요시사다로 앞에서 언급한 요시쿠니의 장남 가문의 당주가 차남 가문 당주의 철천지 원수였다. 그리고 센고쿠 시대 미나모토 가문의 분파 후예들간의 내분을 보면 그냥 겐지 일족 간의 내분이 일본 역사를 새겼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4. 기타[편집]


겐지와는 별개로 皆本, 皆元, 水元, 南本 등 '미나모토'라고 읽을 수 있는 다른 성씨들도 있기는 하지만 위의 원(源)씨와는 독음만 같을 뿐 한자 표기가 달라서 상관이 없다.

현대 일본에도 겐지 성씨인 미나모토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앞에서 설명한 미나모토 가문의 후손은 아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가문 분할 이후에는 미나모토 본성(우지)을 쓰지 않고, 각 분가성씨(묘지)를 썼기 때문이다. 성씨의 본래 사용법으로 적용하면 미나모토는 성이 되고, 분가는 씨가 된다. 그리하여 이때 이후 미나모토 본성은 공문서나 족보에서나 쓰고 평상시에는 자기 가문의 씨명을 썼다. 또한 메이지 덴노 시대 평민에게 성을 주면서 자칭한 미나모토씨도 많다. 따라서 본성으로 쓰인 경우만 위에서 설명한 미나모토 가문 출신이고, 미나모토가 현대의 성씨로 쓰인 경우는 그냥 한자만 같은 평범한 미나모토 성씨라고 보면 된다.

5. 미나모토 성을 쓰는 인물[편집]



5.1. 실존 인물[편집]




5.2. 가공의 인물[편집]


작중의 미래 시점에서 결혼으로 인해 씨를 바꾸는 경우 ☆ 표시.
[1] 여담이지만 21류파라고는 해도, 이 중에는 천황의 자식인 친왕 중 한 명만 따로 '겐지'의 성을 얻어 분가했다가 곧바로 후손이 단절되어 사라지는 등 사실상 이름뿐이었던 분파들도 전부 포함한 숫자이다.[2]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인 25대 무령왕의 후손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아들로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고손자[3] 남북조 시대 초기 북조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씨와 대결했던 요시노 조정, 즉 남조의 충신이었던 닛타씨의 후예를 자청했다.[4] 나중에 오다 가문에서 챠센마루(오다 노부카츠)를 양자로 들였다가 몰살, 챠센마루가 오다씨로 복성하면서 멸족된다.[5] 이는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아버지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요시나카의 아버지였던 요시카타를 죽여버린 것이 컸다. 근데 그 요시나카는 또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사촌이었다.[6] 그러나 이렇게 너무나 친족 숙청에 매달린 나머지 결국 외척인 호조씨(간무 헤이시의 분파)에게 실권을 뺏겨버렸다. 본인 직계도 단절된 건 덤[7] 참고로 이 양반을 가문의 시조로 모셨던 후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센고쿠 시대 다이묘 중에서도 모략과 신의 없음으로 유명했던 그 다케다 신겐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조상에 그 후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8] 다만 한국으로 들어올 때 성이 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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