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규수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 박종채는 대과에는 붙지 못하고 [[음서]]로 현감 등을 지내며 박지원의 저작들을 모아 정리하는 데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 박규수는 부모가 [[결혼]]한 지 8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로 [[태몽]]이 학이라 규학이 원래 이름이었다. 박규수가 태어난 때는 [[영조]]와 [[정조(조선)|정조]] 시기의 [[르네상스]]도 끝나고 [[서양]] 학문이 [[청나라]]를 통해 조금씩 소개되던 때였다. 특히 조부 박지원은 열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서양의 존재와 청나라가 서양을 겪은 내용들을 [[인맥]]이나 청나라 서적을 통해 조선에 들여 왔다. 박규수는 그래서 [[지구]]가 둥글고 [[우주]]가 있으며 [[지동설]]을 정설로 정확히 알고 있었다. 16살 때 [[태양]], 지구, 지구의 위성 [[달]]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는데 배움을 정리하는 정도의 시로 세 천체를 '환약'으로 표현하는 점이 재미있다. 박규수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천재성을 보여 나이 많은 유학 선배들도 서로 친구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전해진다. 특히 박지원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폭넓은 배움을 익혔으며 추사 [[김정희]]와도 교분이 깊었다.[* 김정희는 박지원의 문인인 [[박제가]]의 제자였다.] 약관의 나이에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박규수는 [[효명세자]]와도 깊은 친분을 자랑했는데 효명세자는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강력한 [[왕권]][* 다만 세도정치 또한 기본적으로 정조가 키워놓은 강력한 왕권에 기생한 권력이다.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다가도 같은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가 대두되자 일시적이나마 몰락했던 현실, 안동 김씨가 다시 세력을 회복한 사건, 고종이 즉위하자마자 안동 김씨의 세도가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 자체가 그대로 반증한다. 본질은 비대화된 왕권에 비해 암울한 왕들이 계속 즉위했고 왕권에 기생하는 인척 세력들이 설쳤던 것이지 왕권 자체는 [[한반도]]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강력했던 시기이다. 신권의 왕권 견제가 사실상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한 전제 왕권은 물론 정조와 같은 현군이 집권하면 르네상스로 평가될 만큼 일시적으로 좋은 체제일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현군이 등장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동시대의 서양에서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급격히 발달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퇴행적인 사태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 행보를 현대적 민주주의적 관점으로 보는 건 옳지 않다.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봤을 때, 세도가문을 쳐내려면 왕권의 강화는 필수적이었다. ]을 세워 세도정치를 견제하고자 했는데 그에 맞는 젊은 [[인재]]로서 중용됐다. 아직 정식 대과에 급제도 못한 상태였지만 효명세자는 경연 자리에도 박규수를 배석시키고 견해를 들었고 박지원의 사상에 관심을 보여 박지원의 저작을 모두 올리라고 박규수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곧 [[요절]]했고 이 충격으로 박규수는 [[관직]]에서 물러난 채 20여 년간 칩거했다. 효명세자의 다음 대는 효명세자의 어린 아들 [[헌종(조선)|헌종]]이라 세도정치의 횡포는 효명세자의 [[개혁]] 시도에 대한 역사적 반동으로 더욱 심해졌다. 만약 효명세자가 [[정치]]적 행동을 계속하려 했다 치더라도 있을 곳은 없었을 것이다. 20년이 흘러 1848년 효명세자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던 헌종도 슬슬 병색이 완연하고 세도정치의 악폐가 해결될 기미가 없자 박규수는 다시 [[벼슬]]길로 출사한다. 헌종은 박규수를 불러 "내 너를 너무 늦게 알아봤다. 부친의 총애를 받던 너를 중용하겠다."라고 말을 하였는데 세도정치에 눌려 [[술]]로 일관하던 헌종이 아직 뜻을 꺾지 않았다는 증거. 그러나 박규수는 안동 김씨들로서도 요주의 인물로 찍히고 있었으며 뒷배경도 별로 없는 박규수가 요직에 앉을 리 없었다. 외직인 [[룡강군|용강]]현령이 된 박규수에게 비보가 닥치는데 헌종이 승하했다는 것이나 박규수에게는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철종(조선)|철종]]이 즉위한 것인데 문제는 강화도령 철종은 더 힘이 없었으며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시절 사귄 여자도 [[의문사]]하고 진실은 묻힌 채 안동 김씨의 핵심 김문근의 딸을 비로 맞아야 할 정도였다. 박규수는 외직을 전전하는 동안 이런저런 [[실학]]의 흔적들을 찾아 머리 속에 새로운 세상을 그렸다. 세상에 대한 비관도 상당했던 모양인데 이때 남긴 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대충 내용은 '조선 조 내내 글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벼슬길을 피하고 [[안분지족]]을 즐겼던 것은 깨끗해서가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다. 결코 청렴 결백 등으로 미화할만한 것이 아니다. 권력에 눌려 뜻을 펼 수 없으니 도망간 것일 따름'이라며 평가 절하했다. 틀린 말은 결코 아니지만 세도정치에 상처입고 시니컬해진 박규수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러다 1851년 사헌부 장령이 되어 중앙 정계에 복귀하고, 1854년에는 동부승지에 이르고 곧바로 경상좌도 암행어사가 되어 암행어사로 파견나간다. 그래도 왕의 측근으로 꽤나 길게 일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실록에도 기록이 적어지는 것을 봤을 때에는 사실상 큰 뜻을 펼치기에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고, 1858년에는 곡산부사로 외직으로 다시 나가있게 된다. 그러다 1861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인해 [[열하]]로 피난 가있던 [[함풍제]]의 위문사를 파견하는데 부사로 임명되어서 연행을 하게 된다. 여기서 박규수는 청나라가 처한 국제 정세를 알았을 것이고, 이것이 그가 개화파의 시조가 되는 데 큰 영향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열하에서 돌아온 이후 성균관 대사성이라는 꽤나 높은 직책을 받은 그는 1862년 [[진주시|진주]]에서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수습을 위해 안핵사로 파견됐는데 조정에 [[백낙신]]을 파면해 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의 건의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으나 세도정치가들은 개혁의 의지가 전혀 없었기에 그야말로 유야무야 되었고, 그의 직책도 이조참의로 복귀했다가 부호군으로 사실상 강등되는 등 그의 정치적 관운도 거의 끝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864년 철종 사후 효명세자의 부인었던 대왕대비 조씨에 의해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의 관운도 확실하게 펴게 된다. 고종이 즉위하자마자 도승지, 예문관 제학,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거쳐 이조참판에 곧바로 오르게 된다. 이렇게 오르는 시기가 1년도 채 안 되었다. 그리고 1865년에는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거치게 되면서 판서직에 처음으로 오르게 된다. 이후 [[평안도]] 관찰사로 옮겨갔는데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시|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했다. 박규수는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부정적이기는 했지만 일단 [[미국]] 함선이 들어왔고 자신의 위치에서는 통상을 허가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군 이현익을 보내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이 침입자로 오해[* [[통역]]을 맡은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는 조선말을 해서 말은 통하는데 정확하게 뜻을 알지 못했다.]하고 붙잡는 바람에 사태가 악화되었고 결국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게 한다]]. 배는 불태웠어도 되도록이면 생존자들을 구해서 미국과의 교섭에 이용하고자 했으나 제너럴 셔먼호의 포격으로 조선인 사망자 7명을 포함해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탓에 분노한 주민들이 생존자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생존자들을 내주었고 모두 주민들에게 맞아서 살해당했다. 이후 1869년 중앙에 복귀하며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872년에는 다시 정사의 위치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그리고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박규수는 [[우의정]]에 올라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100여 년이 넘어서 처음으로 [[국교]] 정상화를 위한 국서를 보냈다. 그러나 국서의 내용이 기존의 국서와는 달리 발신인이 [[천황]]으로 되어 있었고 '대일본', '칙서' 같은 [[황제]]국에서나 쓰는 용어들을 쓴 탓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박규수는 그런 문제들은 지엽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주장했지만 결국 조정에서는 일본의 국서를 거부했고 1875년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포격을 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로 인해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나이가 들어 [[관직]]에서 물러난 박규수는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877년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