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성범 (문단 편집) === [[KBS 뉴스 9|KBS 9시 뉴스]] 앵커 시절 === ||[[파일:박성범3.jpg|width=100%]]|| || [[KBS 뉴스 9]] 진행 초반. (1987~1989) || ||[[파일:박성범2.jpg|width=100%]]|| || KBS 뉴스 9 진행 마지막 날. (1991.12.2.) || 1986년 10월에 귀국해 해설위원실장으로 부임한 그는 얼마 후 [[KBS 뉴스 9|KBS 9시 뉴스]] 앵커가 되었다. KBS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나올 때 박성범의 모습이 고정적으로 나온다. > 아시는 대로 5공화국 밑에서의 언론은 저희 방송 뿐만 아니라 신문 언론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 권력의 통제 하에서 언론의 기능을 수행했던 이런 특수한 정치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저희 방송 언론인들이 가져야 될 자세와 인식에 또 그런대로 문제가 있었다는 점도 이 자리를 빌려서 솔직히 말씀을 드립니다. -일종의 옴니버스 방송이던 "KBS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88/18]]에서 재인용. [[전두환]]이 물러나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평화적 정부이양이라는 우리 헌정사의 첫 걸음”, “단임 의지를 거듭 천명해온 전두환 대통령의 약속이 확인되는 정치적 절차이며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 철학이 현실화되는, 우리나라 정치발전의 한 순간”이라고 극찬을 하였다. 전두환 시절이든 노태우 시절이든 변함없이 이러한 친정부적 뉴스 진행을 계속하여 이제 '[[땡전뉴스]]'가 아닌 '''땡노뉴스'''를 진행한다고 시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서영훈]] 체제가 들어온 후 이미지 쇄신을 할 기회가 왔지만 이것도 1990년 KBS 사태 때의 행보로 까먹었다. 이러한 친정권, 강경 보수 이미지 덕택에 KBS 내에서도 말이 많아서 중간에 앵커 교체가 검토되기도 했지만 무산되었다.[* 실제로 1989년 3월경 사표를 제출하고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었지만 사표가 반려되면서 무산되었다.] 1991년 12월 2일 방송을 끝으로 결국 앵커직에서 물러났다. 앵커직에서 강판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아예 방송총본부장이 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자리로 간 셈. 후임으로 온 앵커는 박대석[* KBS 기자. 10개월간 진행 후 다른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후임 진행자는 [[류근찬]]이 들어왔다. 박대석은 정식 진행 이전에도 종종 박성범의 대체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하차 이후에도 간간히 KBS 뉴스 9의 주말 및 임시 진행을 맡았다.]이다. 그는 앵커를 맡으면서 1986년에는 보도본부 부본부장, 1988년 서영훈 시절에는 보도본부장으로 각각 승진하여 1990년 청와대 대변인, 서울신문 사장 출신 낙하산 인사 [[서기원]] 임명에 항의하는 [[1990년 KBS 사태|KBS 노조의 파업]]에 대응해 진행중이던 9시 뉴스를 송출 중단시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1991년에는 특임본부장까지 역임하다 앵커 퇴임 뒤 방송총본부장이 됐다. 다만 위의 행보와는 별개로 KBS에 대해 반성하는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한 것을 보면 박성범 본인도 땡전뉴스 진행은 [[흑역사]]로 생각한 것 같다. 1993년 [[홍두표]]의 사장 취임으로 KBS를 퇴사한 뒤, 이듬해부터 [[한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강단에 섰다. 1993년 12월 29일 아내가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1995년 18세 연하의 [[신은경(1958)|신은경]]과 재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