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양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604_532.jpg|width=100%]]}}} || 본관은 [[반남 박씨]]. [[정조(조선)|정조]] [[후궁]]인 수빈 박씨의 일족으로 [[박규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유대치]] 문하에서 [[김윤식(조선)|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등과 교우하였다. 186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1866년 문과에서 급제하였으며 온건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관직]]에서 승승장구하여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좌윤,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1887년 주미 특파 전권 대사가 되어 [[워싱턴 D.C.]]에 부임했다. 1889년 귀국하여 홍문관 제학, 호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고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자 회의원이 되었다. 11월 제2차 김홍집 내각 때는 학무대신이 되었고 1895년 [[삼국간섭]] 등으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총리대신이 되어 과도 내각을 세웠다가 [[을미사변]] 때 수구파의 대대적인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다시금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내부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진행하다가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당해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내부대신, 총리대신 서리,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1897년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만민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 참가하였다. 독립협회가 [[폭력]]적으로 탄압당하자 사직서를 올렸으나 반대로 [[고종(대한제국)|고종]]에 의해 내무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9월 표훈원 총재가 되었고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으나 병이 악화되어 11월 사임 후 곧바로 [[사망]]하였다. [[순종(대한제국)|순종]] 때 문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