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양 (문단 편집) == 여담 == * 개화에 앞장섰으나 온건 개화파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해서 정쟁에 자주 휘말렸다. [[김홍집]]의 3번의 [[내각]]에 모두 참가하였으면서도 제3차 김홍집 내각 전후로 총리대신 서리를 맡았다는 점에서 박정양의 [[정치]] 역경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당시 정치적 문제에 대한 수습은 거의 박정양이 맡았다는 것이다. * [[친일]]적인 측면이 엿보였다는 평도 있으나[* 본래 [[개화파]]치고 친일 의혹 안받아보는 사람이 없다. 19세기에는 어느 [[국가]]와 가까운지에 따라 파당 [[이름]]이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친일파]]라고 해서 [[이완용]] 등과 동급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 계속 참가했다는 점과, [[을사오적]]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는 점, 그리고 [[이상재]] 등 젊은 개화파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친일파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 한국 [[행정학]]의 개척자 중 1명으로 꼽히는 [[박동서]] 교수가 박정양의 [[손자]]다. * 친일파 [[박중양]]과는 이름만 비슷하지 완전히 다른 인물이니 주의하자. 이 쪽은 [[반남 박씨]]가 아니라 [[밀양 박씨]]다. * 박정양보다 몇 년 앞서 미국에 갔던 [[민영익]]처럼, 박정양도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땅바닥에 몸을 엎드려 큰절을 했다. * 미국 사교계 파티에 참석했다가 충격을 받기도 했다. 파티에 여자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저 여자들은 모두 기생인가?' 라고 물었다가[* 유교 문화권인 조선에서는 큰 잔치를 벌여도 남녀의 자리를 별도로 마련했고, 남자들 자리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여자들은 음식 시중 드는 노비이거나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기생이었다.], '저 여자들은 미국 저명인사들의 아내이거나 딸이다'라는 대답을 듣고 놀랐다. 그런가 하면 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의 옷차림(가슴과 어깨를 많이 드러낸 드레스)과 남녀가 짝이 되어 서로의 몸을 잡고 춤을 추는 것에도 충격을 받았다. * 박정양의 둘째 아들 박승철은 [[독립운동가]]로 아버지가 타계한 후 아버지의 문인이었던 [[이상재]]로부터 영어를 교육받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했으며, 1922년엔 해방 후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준연]]과 함께 독일 [[베를린 대학교]]로 다시 유학을 갔으며 막 독립한 [[폴란드]]를 포함해서 유럽권 일대를 순회하고 잡지에 기행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귀국 후엔 [[배재고등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농촌 운동과 관련된 기독교계 항일 민족주의 단체에 참여해 옥고를 치뤘다. 해방이 될 때까진 고향인 [[연천군]]에서 계속 거주한 것으로 보이나 해방 후 38선이 그어져 연천이 북한에 속하게 되자 월남해 현재 [[한국전력]]의 전신이기도 한 남선전기의 사장을 지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면서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상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