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인 (문단 편집) == 초기 경력 ==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 상원천면 중흥리에서 태어났다. 상원천면사무소가 있던 원풍리의 동상소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3월 함흥중학교에 입학했다. [[8.15 광복]] 이후 [[소련군]]의 약탈과 만행을 목격하고 분노하며 반소, 반공 의식이 생겼고, 이는 1946년 3월 23일 [[반공 사건|함흥반공학생 의거]]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격발되었다. 직후에 휴학령이 선포되고 시위 참여자에 대한 수색 및 체포, 구금이 이어지자 월남을 결심했고,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뵌 뒤 1947년 친구인 이시묵과 이시묵의 동생 등 2명과 함께 [[한탄강]]을 통해 월남하였다. 월남 직후에는 광복 이전에 출가해 미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에 살고 있던 누나 집에 기거하면서 [[서북청년회]]에 입단해 활동했다. 그 뒤 서북청년회 활동에 대해 회의와 한계를 느끼고,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사병]] 및 [[하사관]] 생활을 거쳤다. 하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함흥중학교 선배인 김완용 대위와 [[한신(국군)|한신]] 중위의 추천을 받아 1948년 5월 5일, [[육군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에 6기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해 그해 7월 28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10월 19일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에는 [[영등포구]]에 있던 육군 특별사령부에 [[소대장]]으로 복무했으며, [[중위]] 진급 후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작전국 [[작전장교]]에 보임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 작전국 상황실로 복귀해 근무했다. 이때 앞서 작전장교 시절 직접 선발한 [[정훈장교]] 1, 2기와 생도 2기생들은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계급)|소장]]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작전국장이던 [[장창국]] [[대령]]이 만류했음에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포천 전투]]에 투입되어야 했고, 결국 많은 희생자를 내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이 때문에 박정인 장군은 채병덕 장군을 몹시 싫어한다. 이후 [[제6보병사단|제6보병사단 19연대]] 작전주임 등으로 활약하면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2번의 탈출끝에 원대 복귀에 성공하기도 했다. 1967년 거의 막차로 준장으로 진급을 하게 된다. 이후 1968년 [[울산경비사령부]] 초대 사령관을 역임[* 원래 월남에 가고 싶다고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에게 요청했으나, 울산에서 1년 정도 고생하면 보내주겠다는 말에 사령관직을 수락한다. 하지만 울산에서 3년이나 사령관을 역임했고, 끝내 월남에는 가지 못했다.]한 뒤, 1971년에는 [[제33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