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인 (문단 편집) == 1973년 3.7 완전작전 == [include(틀:대한민국의 대외 전쟁ㆍ전투)] 1973년 3월 7일 [[제3보병사단|제3보병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었다. [[제18보병여단|진백골 18연대]] 전방대대에서 군사분계선 표지판 작업 도중 북한군의 사격도발로 부상자가 생기자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정인은 직접 마이크를 통해 북한측에 사격중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한국측의 경고를 끝내 무시했고, 결국 포병연대에 사격명령을 내렸다. 직후 105mm 견인곡사포에서 발사된 [[백린연막탄]]이 북한군 GP의 외벽을 관통하고 내부에서 폭발하여 건물이 그대로 불지옥이 되었고, 후일 밝혀지길 그 안에 있던 상주인원 36명까지 사살되었다고 한다. 이후 부상당한 장병이 무사히 구출되어 후송되면서 포격은 끝났다. 이른바 3.7 완전작전. 이 작전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의 미루나무 절단 작전(일명 '폴 버니언' 작전), 1999년 6월의 [[제1연평해전]], 2009년 11월의 [[대청해전]], 그리고 2015년 8월의 [[서부전선 포격 사건]] 등과 더불어, 휴전 이후 한국군이 북한의 도발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 이후 북한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사단이 통째로 교체된 건 물론이고 남쪽 3사단에 대응하기 위해 2개사단을 배치했는데 북한 장교와 사관들이 가장 꺼리는 곳이라고 한다. 한 예로 1975년 김부성(소좌급 대우)과 같이 귀순한 인민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공격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밝혀졌다. 유 소위는 “그날 백골 포병이 GP 막사에 명중시킨 포탄에 인민군 36명이 사망했다”며 지금도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다.[* 제3사단은 지난 6.25 전쟁에서도 서울 수복이후 국군 부대로는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 북진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했던 명문 부대다. 부대의 별칭인 '백골'도 이북 출신 실향민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던 18연대에서 유래했을 정도. 북한군 12사단 707GP 장교로 복무 하다가 1975년 3월 강원도 철원 금화지구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유대윤 소위도 훗날 이 부대에 정훈교육차 방문하게 되었을때 악명높은 부대에 자신이 가게 될 줄은 몰랐다는 발언을 했다.] 게다가 이후 박정인은 사단 내 모든 차량의 조명을 켜고 남방한계선까지 돌진하게 하는 무력 시위를 감행했다. 이에 당황한 북한은 김일성이 직접 전군에 비상 동원령을 내려 준전시태세에 돌입했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