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창옥(1911) (문단 편집) === 몰락 === 1956년 3월의 3차 당대회에서 박창옥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론 당선되었으나 소련과의 연락책 역할을 박탈당했다. 5월 11일에 제1차 5개년 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설된 기계공업상에 임명되긴 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불안을 느낀 박창옥은 소련 대표단장으로 온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한편 김일성은 소련계를 너무 조졌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연안계가 동지들을 너무 괴롭힌다고 역으로 연안계를 숙청한다. 하지만 이것이 김일성이 생각치못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냈는데, 김일성의 사냥개 노릇을 하다가 토사구팽을 당했다고 여긴 연안계와 소련계가 묵은 원한을 털고 연합한 것이다. 박창옥은 매우 공개적인 활동에 나서 외무상 남일에게 자신이 김일성을 8월 전원회의에서 비판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남일은 소련계지만 여전히 김일성에게 충성했다. 하지만 박창옥 역시 리필규 등 쿠데타를 운운하면서 김일성을 몰아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던 강경파와는 달리 최용건, 박금철, 김영주, 박정애 등 김일성 곁의 '간신'들을 지목했다. 이윽고 일어난 것이 바로 [[8월 종파사건]]이다. 1956년 8월 30일의 전원회의에서 박창옥 역시 최창익과 함께 뭔가 말을 해보려 했으나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발언을 마치지도 못했다. 눈치 빠른 연안계 일부는 중국으로 도주했으나 박창옥은 묵묵히 남아있다가 8월 31일에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 행위에 대하여」라는 결정서가 채택되면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출당되었다. 한편 소련에 있던 북한대사 리상조가 소련에 도움을 청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 4인이 마오쩌둥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1956년 9월,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이끄는 공동대표단이 방북하여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를 열게 하고 이들의 당적을 회복하게 하였다. 박창옥은 부수상 직위는 돌려받지 못했으나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돌려받았다. 하지만 이후 중소분쟁이 시작되면서 중국과 소련은 서로 물어뜯느라 별로 개입도 못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마음놓고 이들을 다시 조질 수 있게 되었다. 박창옥은 8월 전원회의 이후 마동 시멘트 공장으로 하방되어 노동을 했는데, 1957년 9월에는 거기서조차 해고되어 체포되었다. 소식통으로는 이때 전쟁 중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죽은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투옥된 것으로 1958년 1차 당대표자회에서 [[김두봉]], [[최창익]], [[박의완]] 등과 함께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당하고 출당되었다. 1960년 1월, 박창옥은 [[최창익]], [[고봉기(북한)|고봉기]] 등 19명의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리송운]], [[김익선]], [[김경석]], [[서철]]이 주도한 비밀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북한은 이를 비밀리에 소련에 통보하였다. 그가 죽은 직후인 1961년의 4차 당대회에서 박창옥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은 박창옥을 수박 껍질만 핥는 선전자라고 맹비난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서 숙청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