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태하 (문단 편집) === [[포항 스틸러스]] === 1991 K리그 드래프트에서 [[포항제철 아톰즈]]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무명' 박태하는 당시 [[최순호]], [[이흥실]], [[이기근]], [[조긍연]], [[박경훈]], [[김상호(축구)|김상호]], [[최문식]], [[윤성효]] 등 스타 선수들이 즐비한 포항제철에서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군 격인 백호팀에 선발되는 영광을 얻었다. 2년 차인 1992년, '''등번호를 17번'''으로 바꿨다. 35경기 5골 7도움을 기록하며 포철의 4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커리어 첫 K리그 베스트 11에 뽑히는 등, 90년대 초반 포철의 세대교체의 핵심 일원으로 중용받았다. 그러나, 3년 차인 1993년 동계 훈련에서 무릎 인대 부상을 당한 뒤 상무에 입대했다. 1994년 2월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돼 A매치에 데뷔했지만, 결국 [[1994 FIFA 월드컵]]에 참가하는 대표팀엔 선발되지 못했다. 1995년말, 전역과 동시에 팀에 복귀하자마자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챔피언결정전에서 복귀했다. 3차전까지 치러진 결정전 모든 경기에 출전했지만, 팀은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정식으로 팀에 복귀한 1996년 36경기 9골 4도움, 1997년 18경기 6골 4도움을 기록하는 등, 포항의 우측면을 지배했다. 1996년에는 등번호의 수혜를 받아 축구공 0과 등번호 17이 017이라는 컨셉으로 [[신세기통신|017광고]]를 찍어서 축구에 관심이 적은 국민에게도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8년이 되고 박태하는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한다. 제대 후 그와 함께 팀의 세대교체 주역으로 함께한, [[라데]], [[홍명보]], [[황선홍]]이 모두 팀을 떠난 것이다. 그 상황에서 [[안익수]]에 이어 팀의 주장을 맡게 된다. 38경기 9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고, 플레이오프까지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동해안더비]]로 펼쳐진 플레이오프에선 [[김병지]]의 '''그 골'''이 터지며 결승으로 가지 못했다. 여담으로, 김병지와 헤딩 경합을 한 선수가 바로 박태하,,,, 1998 시즌이 끝나고 안익수와 [[공문배]]가 은퇴하고, [[서효원(축구)|서효원]]이 중국으로 진출하며 팀의 최고참이 됐다. 그럼에도 매시즌 30경기 이상을 출전하며 주장 완장을 달고 팀을 이끌었다. 이후 2001년이 끝나고 [[최순호]] 감독 아래서 세대교체를 단행하는 팀에게 은퇴 권유를 받았고, 다른 팀에서 뛸 바엔 [[원클럽맨]]으로 남으며 은퇴를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