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정환 (문단 편집) === 3.1운동 이후, 어린이 운동에 뛰어들다 === 1919년, 손병희를 도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 속에 던져넣어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이때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적도 있는데, 당시 동료들 몇 명은 감옥에서 옥사까지 했으니 고초가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부터 방정환은 위험 인물로 분류되어 고등계 형사들에게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83277532388.jpg|width=100%]]}}}|| ||<:>{{{-1 1923년 5월 1일 찍은 색동회 창립 기념 사진.[br]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방정환.}}} || 1919년 말 [[도쿄]]에 유학, 도쿄연수(硏修)영어학교에 입학해 소정의 과정을 수료했고, 1920년 [[토요대학]] [[철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토요대학 철학과에 다닐 때 [[마해송]], [[윤극영]] 등과 함께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 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 [[김기전]]과 함께 [[어린이날]]을 만드는 등, 활발한 어린이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도쿄에 천도교청년회 지부를 설립해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 ~ 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했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했다. 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다. <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난파선#s-3]], [[신데렐라|산드룡의 유리구두]], [[행복한 왕자|왕자와 제비]], [[잠자는 숲속의 미녀|잠자는 왕녀]] 등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다작을 번역하면서 본인이 소설도 많이 썼다. 소파,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 [[오타]]나 [[초성체]]가 아니라 정말 방정환 선생이 썼던 필명이다. 사실 ㅇㅇ생 형태의 필명은 일제강점기 당시 잡지 등에서 많이 쓰였다.] 등등 여러 가명을 썼는데, 이는 잡지사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CROOVE|한국의 어떤 전설적인 게임음악 작곡가]]가 [[EZ2DJ The 1st TRACKS|세기말에 이걸 재현한 바 있다]]. 역시 개발사에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EZ2AC 시리즈|같은 게임]]의 [[KIEN|모 작곡가]] 역시 이를 [[EZ2AC : ENDLESS CIRCULATION|다시 재현해냈다.]]] 방정환은 또한 신문과 잡지에 [[수필]]도 많이 기고했다. 그의 글을 보면, [[1920년대]]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문체]]가 굉장히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김기전과 함께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지나치게 상하 관념과 나이를 중시하는 유교문화]] 아래에서 사회적 약자들인 어린이들이 천시와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며,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실제로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http://www.ibabynews.com/news/newsview.aspx?categorycode=0010&newscode=201311182357015702631892#z|"아동인권 존중의 역사, 한국서 먼저 태동"]] 1922년, 장인 손병희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 >1923년 5월 1일 1923년 어린이 잡지인 월간 <어린이>[* 방정환이 1923년에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펴내기 이전부터 육당 [[최남선]]이 1916년 일본 유학을 그만두고 조선에 돌아올 때에 인쇄 노동자들과 함께 돌아와 서울에 출판사를 차리고 나서 육전소설[* 대중들의 인기를 받던 고전소설들을 색상을 입혀 화려하게 꾸미고 6전(錢)이라는 싼 가격에 인쇄한 소설. 딱지본이라고도 하는데 딱지처럼 작은 판형이기 때문이다.]과 <어린이보이>, <붉은저고리>를 펴내었다. 방정환도 [[선린상업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이들 잡지를 읽으며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창간되었으며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 따라 1934년 7월 발간 중지될 때까지 통권 제122호를 찍었다.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준다"고 선전해도 8명이 신청할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방정환이 구연동화를 하며 열심히 선전하고 독자퀴즈를 내어 정답을 맞힌 어린이에게는 상품을 주고 독자를 초대하는 행사를 했으며, 방정환 자신이 광고문구를 작성하는 등 발행인으로서 활약을 하자,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를 창간했다. 그가 창간한 <어린이>는 매년 10만 부씩 판매되는 등 사상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고[*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었으니 매년 10만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요즘 '월간조선'과 '한겨레21'의 발행 부수가 매년 4만 부다.] [[이원수(아동문학가)|이원수]], [[마해송]] 등 아동문학가들이 이름을 알리는 장이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위대한 예술을 품고 있는 어린이여! 어떻게도 이렇게 자유로운 행복만을 갖추어 가졌느냐![br]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 >〈어린이찬미〉, 1924년 5월 15일 잡지 어린이에는 읽을거리 뿐 아니라 다양한 유희 컨텐츠가 실렸는데, 그 중에는 [[보드 게임]]도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ISI20210504_0000740552_web.jpg|width=100%]]}}}|| ||<:>{{{-1 1930년 2월호 '어린이' 부록으로 실린 '어린이 대운동회' 말판. ([[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10504_0001429672|출처]])}}} || 그 이외에도 다른 보드 게임들도 직접 만들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192386|#]]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후로도 '아기별 삼형제'[* 오늘날에는 '형제별'이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McSk_JIl2BQ|동영상 참조]] ] 등의 동요를 짓고 추리소설인 <[[칠칠단의 비밀]]>[* 조선 아이들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팔아버리는 조직에게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아나선 오빠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며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담고 있다. 1970년대에 극장용 만화영화로 만들어졌고, 2008년 [[MBC]]에서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등을 집필했다. 외국 동화도 계속 번역했고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야기하는 재주가 뛰어나서 동화구연을 하러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매년 70회, 통산 1,000회 이상의 동화구연을 했으며, 당시로서는 시골인 [[경상남도]] [[양산시]]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이때 [[이원수]]가 양산까지 찾아와 동화구연을 하는 방정환의 모습에 감명을 받고 아동문학가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갔을 당시에도 죄수들에게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해줘서, 슬픈 이야기를 하면 몰래 이야기를 듣던 간수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나중에 방정환이 석방될 때, 다른 죄수들과 간수들이 그를 못 가게 막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방정환 스스로도 '[[신데렐라]]' 동화구연을 하고 나서 이렇게 회고했다. >"남녀 선생이 가끔 얼굴을 돌이키고 눈물을 씻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학생들은 벌써 눈물이 줄줄 흘러 비단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것을 그냥 씻지도 않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산드룡[* [[신데렐라]]의 [[프랑스어]] 발음인 \[sɑdʁijɔ\]의 차용발음이다. 비음모음이 제1음절에서는 종성ㄴ첨가로 실현되었고 마지막 음절에서는 종성ㅇ첨가로 실현된 것이 특징이다. 무표적으로 비음모음이 종성ㅇ로 차용되지만, 제1음절의 경우는 조음위치동화를 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제2음절의 초성으로 치경음이 나오기 때문이다.]이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 맞는 구절에 이르자, 그 많은 여학생이 그만 두 손으로 수그러지는 얼굴을 받들고 마치 상갓집 곡성같이 큰소리로 응- 응- 소리치면서 일시에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선생들도 일어나 호령을 할 수 없고, 나인들 울려는 놓았지만 울지 말라고 할 재주는 없고, 한동안 단상에 먹먹히 서 있기가 거북한 것은 고사하고 교원들 뵙기에 민망해서 곤란했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 강연에 항상 참석했던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고등계 형사]]도 최루성 동화구연에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강연을 듣다 보면 자기도 자지러지게 울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고등계 형사가 참석했다가 동화구연을 중지시키라고 외쳤는데,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있던 사람들은 듣지도 못했고, 종국에는 형사 자신도 이야기에 빠져버려 동화구연을 마치자 울었다. 그러다가 자기 입장을 자각하고 허겁지겁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만, 이미 청중들이 보고 만터라 망신을 당했다. 이후 방정환은 '형사를 울린 남자'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미와 와사부로]]는 방정환을 이렇게 평가했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하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그놈이 [[일본|내지]]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