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후중상설 (문단 편집) == 배경 == 이 음모론이 나온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거시적인 상황'과 민중의 '미시적인 개인의 인식'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후대가 아는 전체적인 지식과 당시 개인의 삶 속의 지식은 차이가 있고, 이 때문에 배후중상설이라는 괴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당시 동부전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 박살이 나면서 붕괴 직전이다가 [[타넨베르크 전투]]로 한숨을 돌렸고 이후 1915년부터는 전과를 확대해서 오히려 러시아 제국 깊숙히 진격했다. 또한 서부전선은 [[독일 제국군|독일군]]의 초기 전과로 [[알자스-로렌]]을 제외하면 [[프랑스]], [[벨기에]] 영토 안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서부전선이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지옥같은 [[참호전]]으로 변해서 4년을 질질 끌면서 독일의 모든 물자가 바닥나고, 1917년과 1918년 겨울에는 매일마다 아침 점심 저녁 '''[[순무]]를 갈아서 [[순무]]에 발라먹고 찍어먹는''' [[순무의 겨울|어려운 상황]]이었다. 독일 제국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의 전투를 끝내고, 여기서 빼온 예비부대와 자원으로 1918년 서부전선에서 5번에 걸쳐서 [[루덴도르프 공세|대공세]]를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미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자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한계에 달한 독일군은 1918년 9월 [[발칸]] 전선에서 [[동맹국]]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가 붕괴해도 속수무책, 동부전선의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전쟁을 포기했고, 서부전선도 군데군데 숭숭 구멍이 나면서 탈영병이 속출,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긴 '[[힌덴부르크 선]]'까지 무너지면서 군부는 민간 내각에 협상국에 [[항복|휴전]]을 요청해 달라고 통보한다. 당시 군부독재 체제였던 독일은 정보가 통제받던 탓에 '''[[내각]]과 [[총리]]조차''' 막장테크 탄 9월에 가서야 이런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 전까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러시아의 항복]] 덕에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차 대전에서는 [[일본 제국]]이 이런 생각을 하다가 패배한다~~ 협상국은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휴전 협상 선결 조건으로 전쟁 이전 독일 국경까지 군대를 자진해서 퇴각하고 자신들이 전범으로 낙인찍은 [[군부]]와 [[빌헬름 2세]] 대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민간 내각하고만 협상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소식이 독일에 알려지자 민심이 폭발해 앞으로 있을 평화 협상에서 걸리적거리는 황제는 강제로 퇴위 당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으며, 전쟁 전 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과 전후처리를 수습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민간과 군부는 정부와 괴리되어 있었고, 게다가 '''[[독일 제국|독일 본토]]'''는 전쟁터가 아니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라디오 방송과 국가의 발표는 독일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거나 힘든 싸움을 하고 이겼다는 거짓된 선전들로 가득했다. 허황된 거짓말이었지만 민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고위인사들까지 의심치 않은 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국민들 중에서 상황을 안 좋게 보는 이들조차 '''"독일 안에서 전투가 없네?? 우리가 아직 지지 않았군."''' 이라고 현실을 오판하고 있었다. 패배를 알만한 이들도 패배를 체감할 시간은 전혀 겪지 않았다. 이처럼 독일 국민들은 전황이 좀 나빠졌지만, 내부상황은 아직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고, 휴전을 요청하다가 갑자기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가 바뀌어 '''[[GG|"우리가 졌다. 항복 선언하겠다."]]''' 라고 전국적으로 발표를 하니 독일 국민들은 격하게 반발했다. 독일 국민들은 패배를 부정했고 내부의 [[배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만들었다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국민들이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민간정부 내각의 이후 국정이 어떻게 될지 심각하게 우려했고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정파의 이익보다는 독일을 위해서 고민 끝에 결국 이 역할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는, 협상국의 실수도 한 몫 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을 발효하고 나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군대는 휴전 협상 뒤 평화협정을 하기 전 독일이 딴 마음을 못 품도록 북해 항구를 봉쇄하고 지상군은 [[라인 강]]까지 진격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1918~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사이 독일 국민들은 휴전 이전처럼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결국, 독일 국민들은 곳곳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르주아]] 체제라며 거부하고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주장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공산주의자들의 봉기와, 이를 진압하려는 집권당인 [[사민당(독일)|사회민주당]], 그리고 이 모두와 대적하던 [[자유군단]]과 [[철모단]] 같은 우익 민병대[* 태반이 제대군인이었고,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내 벌어진 우익 준동의 주역일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주요 지지세력이 된다.]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나라 꼴은 이도저도 못하는 [[아노미]] 상태가 되어버렸다.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한 직후 1919년 1월 선거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중도좌파~좌파)]]-[[독일 중앙당|중앙당]](중도우파~우파)-[[독일민주당]](중도~중도좌파)의 흑적황 좌우 대연정은 76.2%의 지지를 얻으면서 독일에서도 민주 공화 체제가 정착한 것 같았지만[* 1919년 1월 선거는 남녀 보통선거였다. 제2제국에서 선거권의 제한으로 노동계층의 정치참여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 영국은 이 당시 남녀 차별 선거권 (남성 21세, 여성은 30세 이상), 프랑스는 1945년에야 여성투표권을 인정할 만큼 당시 독일의 선거는 선진적이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을 통보하면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심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독일 국민들은 휴전이라고 해서 프랑스에다 [[알자스-로렌]] 정도만 떼어주고 합리적인 수준의 평화안을 체결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프랑스]]와 [[벨기에]]에 대한 영토 할양도 모자라서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었던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포젠]], [[서프로이센]], [[실레시아|상부 슐레지엔]], [[단치히 자유시|단치히]]. 그러나 폴란드 입장에서도 분명히 할 말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참고.], [[체코슬로바키아]][* 상부 슐레지엔의 일부 지역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넘어갔다.], [[덴마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북부가 덴마크로 돌아갔다.] 등에도 영토를 바치는 데다가 모든 전쟁의 책임을 독일에다 몰아붙이고, 독일을 완전히 거덜내버리고 몇 세대에 걸쳐서 갚아도 턱없이 모자랄 천문학적인 수준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지경이 되자 그만 정신줄을 놔버렸다. 그들은 휴전과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정치인들을 '11월의 범죄자(Novemberverbrecher)'라 부르며 비난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못 갚을 만큼 지나친 [[배상금]]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독일 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일각에서도 좀 지나치치 않은가 하는 의견이 나왔었다.] 사실 전쟁기간 내내 해상을 영국에 봉쇄당한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순무]]만 먹고 살고 있었으며, 어린이들은 의약품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던데다, 전선의 병사들은 영양실조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픽픽 쓰러져 죽어가는 판국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라면 독일이 이기지 못할 것임을 [[모든게 끝이야|잘 알고 있었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하는 장군들조차도 진지하게 이 전설을 믿지 않았지만 휴전 직후 패전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정을 열려는 시도를 의회에서 제기하자 힌덴부르크가 직접 '''"[[정신승리|우리는 전선에서 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한 까닭은 오직 후방의 반란뿐이었다.]]"''' 라고 억지주장을 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하여 법정의 성립을 무산시켰다. 또한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범 800명 인도 조항에 황제와 군부 인사들이 들었는데[*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비판적이고 전쟁의 발발에 대한 책임을 한쪽에만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당시 협상국의 주장이 그러했다.] 군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중상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여기에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정신줄을 놔버린 일부 독일인들이 협상국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이 군부 인사들을 [[영웅]]으로 띄워준다. 그리고 정치계에선 [[우익]]세력이 독일 정치계의 큰 축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을 공격하려는 수단으로 썼다는 평가가 유력하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가 1918년 군수공장 파업에 연루된 의혹을, 반전세력인 공산당은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전쟁 이전 구체제에서 주류였던 우익 세력은 민중봉기로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찬전/반전 논쟁 시기 이전에 독일 공산당과 같은 정파였던 사회민주당에게 초록은 동색이라고 몰아붙였다. 이 때 힌덴부르크 등의 군부 지도부나 보수파들은 헛소문에 휘둘린 쪽이 아니라 소문을 주도한 쪽이다. 실제로 힌덴부르크는 [[백일 전투]] 직후 독일군에게 재기의 여력이 없었음을 잘 알았다. 다만, 자신이 군인으로서 항복과 패전의 책임을 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각에 사실상 항복인 휴전 요청도 부관이었던 [[빌헬름 그뢰너]] 장군에게 ~~떠넘겼다~~위임했다. 독일은 1차 대전 이전에도 사회주의가 성행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항복하는 계기인 [[킬 군항의 반란]]은 노동자 농민들과 결합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독일 공산당]]의 전신 [[스파르타쿠스]]단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여성 사회주의자로서는 가장 유명한 축인 [[로자 룩셈부르크]] 등[* 당시 독일 공산당은 찬전/반전 갈등으로 사회민주당(SPD)에서 갈라져 나왔고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와 무관한 독자노선이었다.]이 폭력적인 공산 혁명을 시도했고, 이 사건이 극우파들의 주장이 잘 먹히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끔찍한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의 극에 다다른 제국주의 세력의 충돌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이 전쟁에서 부르주아들의 국가. 즉 자국의 정부가 패배하기를 바라야 한다'는 [[혁명적 조국패배주의]]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들에게 전쟁의 원인이자 패전의 주역으로 몰릴 위기였던 보수 우익들이 오히려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건 역공이 바로 '등 뒤의 칼에 찔렸다!' 라는 이론이고 이 시기 거대 자본은 초기에는 전통적 보수파인 힌덴부르크를, 이후에는 나치를 지원하면서 좌파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러 노력한다. 또한 좌파 세력도 급진파(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와 온건파(사회민주당)로 나뉘는 바람에 온건파가 세력을 쥔 뒤 급진파들을 무력으로 탄압을 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저지하던 시점이라 효과는 만점이었다.[* 물론 극우들에게 명분을 갖다 바쳐주는데다가 기껏 평화적으로 얻은 사회개혁 기회를 통째로 날려버리려 하는 트롤러 급진파들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먼저 무력을 사용한 측과 훗날 나치당과 함께 사민당을 흔들어 버린측이 바로 독일 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급진사회주의 세력이었다.] 그 결과 1920년에 열린 총선에서 흑적금 좌우대연정의 지지율은 반토막 이상이 나 버렸다. 76.2%에서 35%까지 줄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첫 총선에서 4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으나 이후 20%대의 정체한 득표율에서 왔다갔다 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