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후중상설 (문단 편집) == 결과 == 흔히 배후중상설의 실체를 ''''전쟁을 일으키고 독일을 패전시킨 군부의 똥을 수습한 불쌍한 사민당과 자유주의 세력''''으로 일축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 일단 현대 역사학계는 '독일 수뇌부가 전쟁을 일으켰다' or '독일의 전쟁 책임이 가장 크다'라는 식의 옛 학설들을 반박하고 뒤집고 있다. 자세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문서 참조. 또한 패전에 대해서도 독일 군부가 할 말이 있는게, '[[에리히 루덴도르프]]로 대표되는 독일 군부 세력이 카이저를 일방적으로 뒷구멍으로 몰아내고 횡포를 부려서 망했다'는 인식도 현재는 적극적으로 반박되고 있다. 1917년 이후부터 루덴도르프가 독일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재자]]는 아니었다.[* Tipton, Frank B. A History of Modern German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카이저는 여전히 인사권을 쥐고 있었고,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베트맨홀베크]] 수상과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 역시 여전히 독일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 내내 그 어떤 방면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따라서 대전 기간 동안 독일 민중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군부측 인사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만이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얻은 전공을 바탕으로 범국민적인 존경을 누리고 있었고, 이를 이용한게 그의 야심만만한 부관 [[에리히 루덴도르프]]이었다. 그는 반대 세력이 그들의 정책을 반대하면 [[힌덴부르크]]가 사퇴하겠다고 땡깡을 부리고, 우유부단하고 인기를 잃는게 싫었던 카이저/수상/사민당 등이 결국 깨갱해서 굴복하는 식으로 국정이 굴러갔다. 흔히 일컬어지는 '독일 군부 독재' 체제는 실상 [[루덴도르프]]가 독일 제국의 실무를 담당하는 대신 [[힌덴부르크]]가 자신의 인기로 루덴도르프를 비호해 권력을 누리는 시스템이었다. 실제로 전쟁 막바지에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상실했던 루덴도르프는 [[빌헬름 2세]]한테 바로 모가지 당했다.[* Mommsen, Hans Eugene. The Rise and Fall of Weimar Democracy. Translated by Elborg Eugene. Forster and Larry Eugene. Jones.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8]. 이를 반대로 생각하자면, 만약 사회민주당이나 빌헬름 2세가 독일 민중들에게 제대로 된 리더십이나 뚝심을 보여주었다면 군부가 모든걸 좌우하는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례로 1917년 초반에 제국의회에서 연합군과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조약을 맺는다는 안건을 통과시키자, 힌덴부르크는 자신의 주특기인 사퇴를 무기로 협박해 왔다. 빌헬름 2세와 사민당 다수의 의회는 이러한 공갈에 대항하기는커녕 굴복을 택했고,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물론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베트만홀베크]] 수상의 사임 요구까지 들어주었다.[* de Gaulle, Charles (2002). The enemy's house divided.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이런 식으로 사민당은 이론적으로 무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내내 군부의 횡포를 막는 노력을 보이기는 커녕 방관하고 협조했다. 이 비판은 역시 우유부단했고 전쟁 전부터 독일의 외교 상황을 악화시킨 [[빌헬름 2세]]에게도 적용된다. 그럼에도 전쟁 중반부터 끝까지 독일의 실권을 잡고 전세를 주도한 세력이 독일 군부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볼수 있다. [[빌헬름 2세|카이저]]와 베트만홀베크가 반대했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다시 밀어붙여서 미국을 참전을 유도하고, 전쟁 중후반 동안 제기 되었던 합리적인 평화 협상들을 전부 걷어 찼던 장본인들 또한 [[루덴도르프]]를 주축으로 한 군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앞서 서술한 의회의 평화 안건 말고도 빌헬름 2세의 비교적 온건한 대러시아 강화 조건들과 1918년 초반에 벌어진 노동자들의 반전 시위들을 강압적으로 탄압했고, 그 결과는 독일 제국의 완전한 패망이었다. 따라서 '''배후중상설을 떠들어 댄 독일 군부야말로 독일의 패배를 불러온 가장 큰 책임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에리히 루덴도르프|루덴도르프]]와 [[파울 폰 힌덴부르크|힌덴부르크]]를 포함한 상당수의 군부 수뇌부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고 전쟁 기간 동안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에 부정적이었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군부 인사들은 패전 책임에 대해서 쉬쉬했다.]은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배후중상설을 고집했다. 그리고 군부의 주장을 수용한 극우 선동가들의 의해 배후중상설은 독일 사회 곳곳에 퍼지게 된다. 이는 패전 수습이라도 시도했던 사민당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에 치명타를 가했고, 공화국은 배후중상설의 여파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나치에게 끝장나게 된다. [[인지부조화]]도 이만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준.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한 정신승리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해보면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독일 국민들의 믿음으로 발전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잠시나마 실현되는 듯 보였으나, 연합국의 강력한 항전의지를 꺾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전쟁 초기에 독일에게 당할 대로 당한 연합군은 단순히 최전선의 독일군을 격퇴하는 것을 넘어 수년간 독일 본토를 폭격하였으며, 1945년에는 거의 모든 점령지를 탈환한 다음에 독일 본토까지 지상군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의 수뇌부가 계속 저항을 지속하려 하자 연합군은 [[베를린 공방전|수도를 빼앗아버렸고]], 결국 히틀러의 자살 이후 열흘도 안 되어 독일이 모든 연합국에 항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비극이 끝났다. 그리고 배후중상설을 믿은 독일 국민들은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 국민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던 터전이 대대적인 폭격이 떨어지고, 1945년 1월~5월에는 자국의 영토로 진입한 연합군에 의해 고향과 국토가 불타는 동시에 가족과 이웃들이 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군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 나서야 비로소 배후중상설이 헛된 것임을 자각하였다. 참고로 이 때문에, '''실제로 일부가 항복을 제안하려 했을 때, 연합군은 그냥 씹고 진격했다.''' 이미 때는 늦었고, 따라서 이제서야 독일인들이 현실을 자각하거나 후회해보았자 소용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참고로 양차대전으로 질린 미국은 전후 독일의 산업능력을 아예 거세해버리고 '''농업국가로 만들 계획'''도 세웠었다. 냉전이 일어난 것이 독일에게는 행운일 따름.[* 일본에 대한 민간인 폭격도 어느정도는 이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일본쪽은 아예 [[윌리엄 홀시|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을 정도]]까지 깡그리 밀어버리려 들었다.][* 사실 독일 수뇌부는 이미 냉전이 올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여기에 희망을 걸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냉전을 너무 기대한 나머지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알아서 서방연합군이 자신들의 편에 서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서방연합군이 바보도 아니고 김칫국만 들이마시는 독일을 냅둘리는 없었고 결국 히틀러가 자살한 후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야 부랴부랴 협상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항복 여론을 확실히 하고 나아가 전후에 패전국 국민들 사이에서 배후중상설같은 헛소리가 횡행하다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참사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패전국 국민들에게 "질만 해서 졌다"는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해야한다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뤄졌다. 어쩌면 '''[[커티스 르메이|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얘기.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연합군이 자신들의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의 의식 사이에서 배후중상설은 오랜기간 동안 근절되지 않았다. 1952년에 이루어진 설문조사의 따르면 독일인들의 68%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믿었고, 1950년대 중반까지도 독일인들의 절반 이상이 히틀러가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믿었다. 심지어 1959년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독일인들의 90%가 유대인들을 자신들과 이질적인 인종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독일인의 인식에서 배후중상설을 완전히 일소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20-30년이라는 긴 세월과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연합국의 끈질긴 교육 활동, 그리고 [[68혁명|대규모의 사회운동]]이 필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