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남준 (문단 편집) == 어록 ==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 >—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1984년에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 질문에서.[[https://www.nocutnews.co.kr/news/4630805|#]][* 이 명언은 백남준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가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어느 기자가 백남준에게 물어본 질문과 대답이다. 백남준의 이 명언이 202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한류]]의 영향력으로 전세계의 국가에서 [[한국 문화]]의 수출에 크게 기여하고 경제 분야에서도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제대로 미래를 예견했고 소름돋는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나 전쟁 직후 보다는 경제력이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눈부시게 많이 상승했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국력이나 국제적인 위상이 지금보다 크게 부족했고, 문화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내세울 인물이 [[백남준]]이나 [[김연자]]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나 2020년대를 비롯한 현재의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한류|한류의 영향력으로 세계 각국에서 대중문화 수출에 활발히 나서고,]] 경제분야에서도 매우 큰 효과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매우 탁월한 선견지명임을 잘 보여준다.]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예술을) 하는 거지요."''' >"1982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 >— 1964년, 동료 예술가 [[볼프 포스텔]]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써낸 답글 중 >''백남준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고만 규정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20세기에 이미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을 내다본 선지자였으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할 만큼 엄청난 배포의 기획자였다. [[마셜 맥루한|마셜 매클루언]] 같은 문명비평가부터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까지 전 세계 수많은 인사가 그의 친구였다. 백남준이 연하장을 보내는 이는 100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스타였다.” >---- >미술사학자 김홍희 [[http://luxury.designhouse.co.kr/in_magazine/sub.html?at=view&info_id=75121|#]] >"백남준이 한국에서 예술을 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되었을까? 나는 가끔 주변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귤을 맛있는 귤로 키우지 못하고 탱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 >백남준의 오랜 [[호형호제]], '''[[이어령]]''' >"그건 그렇고, '''[[30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선생님, 혹시 (곧 다가올) [[21세기]] 말씀이십니까?" >"아니, '''1000년 후 30세기.'''" >---- >[[1994년]] 미국 휘트니미술관 2인 전시를 함께한 설치미술가 [[강익중]]과 나눈 대화[* 2인전이 끝나고 백남준과 [[강익중]], 그리고 미국 [[월가]](街)의 금융인들과 가진 식사자리에서 나온 대화였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광적인 독서와 매일 두 시간씩 여덟 개의 주간지, 네 개의 월간지, 세 개의 일간지를 읽었던 백남준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월가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변화들을 꿰뚫어 본 그는 월가의 금융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직후에 나온 대화가 바로 문제의 30세기에 관한 질문. 후에 강익중은 30세기의 세상을 상상하던 백남준을 두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1998144|낮에도 별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백남준은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 속의 [[부처]]'''였다. >---- >'''[[오노 요코]]''', 백남준의 장례식 추모연설 中 >나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닙니다. '''[[세기]](世紀)적인 예술가'''입니다. >---- > [[2002년]] 무렵 경기문화재단에 보낸 친필 편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