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남준 (문단 편집) === 행위예술가로 ===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여권[* 여권 번호가 '7번'이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67395|#]] 그 당시에 여권 번호는 발행 순서대로 부여되었다.]과 [[일본]] 비자가 있었던 백남준은 [[도쿄]]로 넘어가서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수험 준비 기간이 3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전설이 있다. 백남준의 가족은 백남준이 법학부나 경제학부에 지망할 거라고 생각하고 입학 절차를 전적으로 백남준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입학 전 도쿄대학에서 학부모 모임을 초대하는 편지에서 백남준이 문학부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백남준은 훗날 이 시절을 회상하며 그렇게 스파르타식으로 공부를 다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시험 결과가 좋아 입학처에서도 이 성적으로 법학을 공부하지, 왜 미학을 하려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도쿄대학의 체제상 지원당시는 문학부로의 지원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전공은 교양과정을 이수하고 정하는 것.][* 사실 어릴 때부터 백남준은 기업인이나 정치가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강했다. 어린 시절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과달카날 레퀴엠 같은 이후의 작업 경향을 봐도 권위주의나 군국주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약간 온건한 윤이상 내지 오늘날의 [[강남 좌파]] 같은 느낌이 있었던 듯. 이 때문에 독일 유학 때는 유학비를 제한받을 정도로 부친과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할때 사용할 비싼 텔레비전을 구하는데에는 백남준 집안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대학원을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 [[독일]] [[뮌헨 대학교]]로 진학하여 철학 석사와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음악이나 미술을 따로 보지 않은 경향이 있다. 통틀어 예술이라 했으며, 평생 음악, 미술, 행위예술 등 모든 예술분야를 넘나들고, 이어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의 첫 전시는 현대음악과 관련된 작업이었다. [[https://www.donga.com/news/amp/all/19990701/7451657/1|13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여 관객이 직접 작동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다른 영상과 소리가 재생되는 작품이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개념과 함께 근래 유행하는 인터랙티브의 성질도 있는 작업이다. 여담으로 그는 첫 전시장 입구 위쪽에 죽은 소의 머리를 아무 처리도 없이 걸어둬 주민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 때 같이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윤이상]]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훗날 김민기 이전의 독일 [[괴테메달]]을 수여한 유이한 인물이 된다. [* 동경대에서 전공한 미학이 음악미학이다. 학부때의 부전공도 음악사학. 이미 이전부터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다.][* 뮌헨대학에서의 공부도 그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다 진취적인 분위기의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옯겨서 현대음악 공부를 더했다고... 뮌헨대학의 석사학위를 완전히 마쳤는지는 자료에 따라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쯤 [[존 케이지]]나 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접한 뒤, 행위예술가로 변신하게 된다.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선을 그리는 것도 사실 백남준이 했던 퍼포먼스다. 이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고,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사실 백남준이 1964년 [[미국]] [[뉴욕]]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었다. 무대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는 [[행위예술]]을 하기도 했다. 1967년에 백남준이 누드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공연하다가 샬롯이 경찰에 체포당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하다.[* 샬롯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당시 [[뉴욕]] 예술계는 유죄 판결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당시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록펠러]] 가문 출신, 후에 [[미국 부통령]])는 예술적인 퍼포먼스라면 누드라도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을 개정하게 만든다. 이로써 뉴욕은 [[행위예술]]같은 퍼포먼스에 관해서 보다 자유롭게 변했다.] 그 결과 백남준은 미국 예술계에서 제대로 된 예술도 못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람, B급 예술가 정도로 치부되었다.[* 백남준이 샬롯 무어먼과 나체의 퍼포먼스를 한 이유는 음악에는 섹스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미술, 문학, 공연 등의 다른 모든 예술에는 섹스가 존재하나 음악에서는 찾을 수 없었으며, 백남준은 그 이유가 음악이 가진 위선적인 권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반골 기질이 강했으며, 권력과 권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 또한 모두가 즐길 수 있고, 또 평범한 모든 일상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음악에서도 사람의 급을 나누는 권위를 싫어했고, 이에 따라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 샬롯 무어먼과 나체로 공연을 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샬롯 무어먼과 함께한 작업으로는 TV브라 등이 있다. TV로 만든 첼로를 가지고 연주를 하는 것이다. 물론 첼로는 현도 엉성하고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https://www.google.co.kr/search?sa=X&sxsrf=ALiCzsbFmIXkID8FOry5CI-LhQEwHiZjsw:1653561719828&source=univ&tbm=isch&q=nam+june+paik+charlotte+moorman+tv+cello&hl=ko&client=safari&fir=Y4Pb4rlVkPGQxM%252CKzf-gGHZcgnHZM%252C_%253BOaMUwxnpbjNbuM%252CndnQ9JJjnoRAyM%252C_%253B6FgY9HsSbNDmbM%252C4zLu29vi9-4g5M%252C_%253BxHC_wpPYoK9JxM%252COJDYStBa8X_A_M%252C_%253BiGyLArEtgCkzaM%252CjJwE44xHERcULM%252C_%253Bzgb3BbDafBT0zM%252C4_8qLW13WU_86M%252C_%253B-71RJDPoBDKcQM%252CPJFbftGJyqZ9wM%252C_%253BfBQIv3Z-4wng3M%252CxOu9NPCxfxL3fM%252C_%253Bpfkm5C60pfUJXM%252C1RVe6l-nt15iBM%252C_%253BP58TODc_YN96RM%252CTRzvwjaLWYnM3M%252C_%253BBh7emZ9AS6MNZM%252Cw73XUjyZolKLJM%252C_%253BKKMz7WyqJnpQnM%252CAEPMgi9mocVDYM%252C_&usg=AI4_-kSLxjMb_Vo-z23jPgr7ynrb-rVjDg&ved=2ahUKEwiOtLK3_fz3AhWWDt4KHQK6CmQQ7Al6BAgkEDE&biw=390&bih=745&dpr=3#imgrc=fBQIv3Z-4wng3M|이런 퍼포먼스]]도 했다.] 다만 B급 예술가라는 것은, 당시의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언급일 수도 있다. 당시 60년대에서 70년대에는 서서히 퍼포먼스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고, 물론, 현대에는 현대미술하면 알 수 없는 무용과 행위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이전 예술은 단순히 회화아니면 조각 정도로, 이루어지는 오브제 중심적인 예술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오브제 없이 예술가의 행위 자체와 관람객이 느껴야하는 '경험' 위주의 예술은 매우 비주류라고 할 수 있으나, 개척기이자 태동기였다.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쉽다.[* 물론 행위 예술이 남발하고 있는 현대에도 그림이나 조각이라는 '물질'의 존재 없이 퍼포먼스를 예술로 삼는 예술가들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서도, 당시 예술계에 이단아들이자, 맨땅에 퍼포먼스 예술을 시도한 '플럭서스'의 일원이며 그중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백남준의 수준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 후에 퍼포먼스예술은 80년대 이후 대중예술에서도 독특한 무대연출(패션쇼, 콘서트, 오케스트라 등)로 발전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제대로 된 무대연출을 할 줄 아는 아티스트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퍼포먼스예술이 현대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것은 종합예술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행위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80년대부터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TV로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이끌림인데 급기야는 로봇을 만든다. 이 로봇의 이름은 K-456으로 똥도 싸고, 말도 한다.[* [[https://youtu.be/6K4zTxGrtrc|작동 모습]] [[https://youtu.be/0AKyFopDMDs|작동 모습]]] 그는 이 로봇의 최후를 연출했는데 뉴욕 한복판에서 같이 산책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21세기 최초의 참사라고 명명하였다. 최초의 로봇 교통사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