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남채 (문단 편집) == 생애 == 백남채는 1888년 1월 1일 [[경상도]] 자인현 하동면 송림동(현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에서 아버지 백용달(白龍達)과 어머니 안순이(安順伊)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남산동(대구)|남산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계성고등학교(대구)|계성학교]]에 진학하였다. 계성학교 졸업 후 1910년 [[중국]] [[베이징대학|협화대학]]에 유학하던 중 [[이시영(정치인)|이시영]] 등과 교류하게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18년 협화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모교인 [[계성고등학교(대구)|대구 계성중학교]] 교감 및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그는 대구남산교회 장로로 있으면서 그 무렵 [[상하이]]로부터 돌아온 [[김규식]]의 처 [[김순애(독립운동가)|김순애]]와 동생 백남규(白南圭)를 비롯해, 남성정교회 목사 [[이만집]],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 [[천도교]] 경북교구장 [[홍주일]] 등과 비밀리에 접촉해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같은 해 3월 1일, [[경성부]]에서 시위가 시작되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이 심부름차 보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생 이용상(李容祥)이 [[기미독립선언서]] 200매를 갖고 이튿날 이만집을 찾아오자, 그는 이만집·[[정재순(1877)|정재순]] 등 대구 지역의 유지들과 함께 구체적인 의거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대구 서문시장|서문 밖 장터]]를 장소로 하고, 장날인 3월 8일 오후 1시로 시각을 잡았는데, 이 때 백남채는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러다가 그는 거사 3일 전인 3월 5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거사는 계획대로 추진되어 3월 8일 첫 만세시위가 서문 밖 장터에서 일어났고, 이어 10일에 2차 시위가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일어났다. 한편, 그는 그 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61&evntId=0034988025&evntdowngbn=Y&indpnId=000001929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여 같은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에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856&evntId=0034980646&evntdowngbn=Y&indpnId=000001240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교육사업과 경제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비교적 온건한 독립운동으로 향하게 된다. 그는 먼저 대구요업회사를 설립하여 그 수익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군 군자금을 조달해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동생 백남규가 임시정부 경상도 대표로 일하고 있었고, 북경 유학시절 이시영과 교류가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1922년 10월에는 [[서상일]]과 함께 조양회관(朝陽會館) 건립에 참여하여 벽돌을 기증하기도 했으며, 1926년 대구 희원(喜媛)학교와 순도(順道)학교가 병합되어 [[대구종로초등학교|희도보통학교]](喜道普通學校)가 설립될 때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여 식민지 치하에서의 어린이 교육에 열성을 보였다. 한편, 1925년 9월 모종의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9월 2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소요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1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395&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고]] 출옥하였다. 그러나 1927년부터 [[신간회]] 운동이 대두될 때, 그는 여기에 불참하면서 점차 일제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1927년 5월에서 1930년 4월까지 '대구학교 평의원' 을 역임했는데, 학교평의회는 일제가 조선인 교육에 관한 경비 마련을 위해 설치한것으로, 식민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대구 [[YMCA]]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는 대구상업회의소의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6년에는 일제의 말단지배기구로서의 역할을 한 남산정 제2구 총대(總代)를 지내기도 했다. 한편, 1935년 [[합명회사]] [[http://db.history.go.kr/id/hs_001_1937_04_13_0490|광성초자(光星硝子)]], 1936년 [[http://db.history.go.kr/id/hs_001_1937_04_07_1270|주식회사 대구요업]], 1937년 [[http://db.history.go.kr/id/hs_001_1939_03_03_2000|합자회사 공업친목회]] 등의 회사를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하기도 했다. 1938년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독교대구연합회를 결성했는데, 그는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일본인이었다. 이 때 이 조직에서 추진한 사업은 교회에서 일본의 4대 명절을 지키게 하는 일, 일본인들을 강사로 초빙하여 종교보국 사상을 고취시키는 일 등이었다. [[8.15 광복]] 직후 독립운동가 서상일은 조선군 대구지구헌병대장 간다(神田)로부터 일제가 물러갈 때까지 치안유지에 대해 협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 또한 [[배은희(1888)|배은희]], 엄성문, [[서동진]], [[장인환(1897)|장인환]], 이재영, 송기찬 등과 [[서상일]]의 자택에 모여 협의 끝에 건국의 우선과제인 치안 유지를 위해 경북치안유지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고, 서상일을 대표로 선출했다. 그 후 대구 지역의 애국지사들은 해방공간에서 원활한 건국사업을 위해 앞서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위원장 [[김관제]])와 경북치안유지회 등 두 조직을 통합하기로 하고, 8월 22일 대구공회당에서 합동회의를 열어 '건국준비치안유지회' 란 이름의 통합단체를 발족시켰다. 이 때 김관제가 위원장, 백남채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1945년 9월 창당된 [[한국민주당]]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정계에 투신하게 되었고, 대구지부 수석 부총무, 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후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여 1946년 12월 조직된 [[미군정]]의 임시입법기관인 과도입법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갑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한 그는 1950년 10월 5일 [[폐암]]으로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7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