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부흥운동 (문단 편집) == 개요 == [[삼국시대]]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를 부활시키려 했던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을 뜻한다. 국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백제부흥운동은 멸망 직후 부여씨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을 일컫는 표현이지만, [[후백제]]나 고려시대의 [[이연년 형제의 난]]까지 그 범주에 포함할 수 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는 신라와의 약조를 깨고 구(舊)백제 지역에 백제도호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통치하여 백제 지역을 당나라의 기미주로 만들려고 했다. 단, 잘못 알려진 바와는 달리 당나라의 초기안이 오히려 백제인들에겐 유리했다. 군사권과 행정권이 일부 제한되고 외교권만 박탈한채 나머지 자치는 인정해주는 체제였으나,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군하면서 행한 패악질이 워낙에 도에 넘쳤던지라 이는 당나라에게 먼저 포로가 된 의자왕 일가 외엔 나머지 백제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물론 백제부흥군 중 남은 세력은 신라에게 포섭되어 나당전쟁에서 신라 편에 서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 얘기고, 적어도 백제부흥운동 초반에 백제부흥군의 공격 대상은 당나라와 신라 둘 다였음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한편 신라는 지혜롭게도 백제부흥군과의 과도한 투쟁은 자제하고, 직접 지배 영역을 서서히 늘려 백제부흥군을 천천히 말려죽이는 한편 백제부흥군과 당군 양측의 전력 소모를 기도했고 후술하지만 이 전략은 성공했다.[* 물론 백제 부흥운동 주체가 나라를 부활시키기도 전에 주도권을 놓고 다퉈서 자중지란에 빠진 게 가장 원인이 컸지만, 설령 목표대로 당군을 소멸시켰어도 대신라 국경에서 요충지들을 너무 많이 잃은 백제가 이후 신라를 상대로 얼마나 버텼을진 미지수다.][* 훗날 후백제를 상대하던 신라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던 이유는 추풍령 요새 일대를 처음부터 죄다 잃고 시작하는 황당한 차포 떼고 게임하기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백제부흥세력 또한 겉으로는 당군을 향한 투쟁에 성공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 전성기 때도 신라군이 대전으로부터 차근차근 주요 요충지를 장악하던 중이었다.] 백제부흥운동 지도부는 왜국에 망명해 있던 왕자 [[부여풍]]을 군주로 내세웠지만 이후 지도부 사이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내분이 발생하며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