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부흥운동 (문단 편집) ==== 개요 ==== [[통일신라]]는 백제 유민들을 체제의 한계 탓에 온전히 신라인으로 포섭하는데는 끝내 실패했고 결국 백제는 망한지 약 230년 만에 다름아닌 [[견훤|신라 장수의 손으로]] [[후백제|이 땅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견훤 이전에 [[김헌창의 난]]에서 엿볼 수 있듯 백제지역은 유민의식은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으며 김헌창은 무열왕계가 백제지역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들을 근거로 백제지역의 민심을 얻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는등 폭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직 여력이 남았던 신라조정과 김헌창의 낮은 군사적 식견이 겹쳐저서 규모에 맞지 않게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는 견훤이 백제건국에 있어서 참고할만한 좋은 사례가 되었다.[* 당시 분위기는 통일신라가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다. 구)고구려 지역의 호족들은 누가 이기나 방관하였으며 [[장안국]]은 백제뿐만 아니라 가야지역까지 장악하여 신라는 구)진한 영역에서만 병력을 동원할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공불락이라던 삼년산성까지 반란에 동참하기까지 하였다.] 880년대 말부터 이 지역에서 크게 세력을 모아왔던 [[견훤]]은 마침내 892년 왕을 칭하고 수천 명의 세력을 모아 군사(반란)를 일으켰다. 칭왕 8년 후인 900년 견훤은 백제 계승을 주장하며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초기 8년 동안 국호를 따로이 칭하지 않았던 이유는 견훤이 워낙 신라 장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인물이었기에 신라 조정으로부터 모종의 대우나 교섭을 기대했을 거란 지적이 대두 중이다. 심지어 견훤은 초기 칭호 중 신라 대장군이란 의미의 '도통'이란 칭호를 백제왕이란 타이틀보다 중요시하는 기이한 모습을 꽤 오랫동안 보인다.] 견훤의 후백제는 단순히 편의상으로 붙이는 명칭에 지나지 않으며 당대의 정식 국호는 그냥 백제였다. 역사에 익숙하지 못해 한반도 국가들이 본디부터 하나였다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일쑤인 현대 한국인들은 이러한 망한 나라의 재등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정체성이 완전히 죽지 않으면 망한 나라는 백년이든 이백년이든 계속 다시 등장하며 오히려 이런 경우가 흔한 사례에 속한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다름 아닌 신라도 망한지 백수십 년 뒤에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세계로 발을 넓히면 [[그리스]], [[아일랜드]], [[베트남]], [[이스라엘]] 등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물론 9세기 후반 신라 말기에 [[진성여왕]] 등의 실정으로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고 지방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유력 호족들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분위기 가운데 [[송악]]의 [[궁예]]와 더불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광주에 부임한 무관 출신으로서 세력을 키운 [[견훤]]이 깃발을 들어올려 후백제 건국이 가능했던 건 맞지만, 그러한 중앙 정권에 대한 도전이 왜 망한 나라의 이름을 붙여서 일어났어야 했는가? 그때까지도 유민 의식이 불식되지 못한 채 그 영역 속에 깊게 남아 있었기에 설득력이 있어서 다름아닌 신라 장수 출신인 견훤이 야심을 그러한 식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빙성은 낮지만 견훤의 후손이 지은 『이비가기(李碑家記)』란 책의 경우 견훤이 아예 진흥왕의 먼 후손으로 나온다. 다만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전승도 있다. 물론 이것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이고 인구 이동 등까지도 고려하면 견훤의 정확한 출자는 불명이다.] 백제 유민들의 부흥 운동과는 '전혀 시대적으로 다른 것'이란 견해는 망한 나라를 부활시키려면 모름지기 망한지 시간이 얼마 안 지나야 한다는 대단히 자의적인 전제를 깔고 하는 주장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신라 정부에 크게 대항한다면 구태여 백제의 이름을 차용하지 않고도 방법은 많았는데 굳이 그걸 택하는 것 자체가 백제인, 고구려인 등이 완전히 신라에 통합되지 못했음을 상징한다. 국적이나 소속만으로 보면 후백제의 구성원은 전부 신라인이고 태봉의 구성원 역시 대부분 신라인이었던 건 맞지만,[* 태봉의 경우 후에 말갈인, 발해인 등도 상당수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식이면 해방 직후 한국인들은 온전한 '조선인'이 아닌 다 국적이 [[일본 제국]]인 사람들이었다. 동로마 제국에게서 이백 년만에 나라를 찾은 불가리아 역시 비슷한 예시이다. 현상적인 국적만으로 보면 주모자는 그리스계였던 데다 주민은 얼마 전까지 동로마군에 복무하기도 했던 불가리아계 동로마인들이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어디까지나 원나라 사람이었으며 주원장 자신도 스스로가 원나라 황실에게 나름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으나, 그렇다고 한족 중흥을 포기하진 않았다. 역사는 한 번 주역이 플레이에 실패하면 끝나는 오락실 게임 같은 게 아니고, 후세 누군가의 괴이한 국적 관념으로 재단될 수 있지도 않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 점은 영산강 유역, 즉 옛 [[침미다례]] 일대가 견훤의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인데, 그 이유는 있지도 않았던 마한의 반백제 정체성에 있지 않다. 영산강 유역 일대를 자꾸 전남이라고 오해하는데, 해당 세력은 그 최전성기인 한성백제 공함 직후에도 전남 ⅓밖에 차지하지 못한 데다 다른 전남 일대의 두 세력은 백제에 대한 노선에서 영산강 유역 세력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해 관계가 전혀 달랐다. 영산강 유역 세력과 마한, 백제 그리고 전남에 위치했던 다른 두 세력권과의 관계는 [[마한]], [[침미다례]], [[나주 공방전]] 문서 참조. 그리고 다른 주목할 점은 반신라 감정이란 면에선 오히려 영산강 유역 세력이 더했음이다. 일단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적어도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이뤄지기 전에 전남 일대는 세 다른 고고학적 계통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이 구분은 마한의 원래 수장국 [[목지국]]이 백제국에게 타도되어 나머지 마한 구성국이 그 향보를 결정해야 했던 3세기 후반부터 적어도 칠백 년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백제국 같은 경우 일본 전방후원분 세력까지 끌어들였다가 나중엔 가야한테도 손을 뻗는 [[침미다례]]를 제압하기 위해 일단은 전남 광주를 거점으로 키웠다가, 가야로 넘어가버린 전남 동부 섬진강 일대를 제압한 다음에는 침미다례에 전폭적인 지원과 회유를 거쳐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성했었다. 즉 그전에는 각기 따로 놀던 전남 일대가 한 국가 안에 전부 한 묶음으로 직접 지배 지역으로 묶인 적은 6세기 초의 웅진백제 시기, 정확히는 [[무령왕]] 재위기로 추정된다. 그러니 '''전남의 마한 VS 충청, 전북의 백제 구도는 아예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고, 통일신라 내 백제 유민 VS 통일신라와의 관계와도 전혀 비교될 수가 없다. 이후로는 통일신라가 해당 지역을 접수하면서 백제보다 강력한 직접 지배력을 관철하게 되는데, 이 단계가 되면 오히려 전남 일대 토착 세력들은 전부 기득권이 백제 시절보다 못하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헌데 얄궂게도 이 과정에서 통일신라 또한 옛 백제와 똑같은 행보를 밟게 된다는 것. 통일신라 또한 원신라인들을 주로 섬진강 유역 일대, 광주 일대에 사민시키면서 해당 지역을 육성하는데, 이는 옛 마한 시기부터 독자성이 강해서 백제 또한 포섭에 애먹었던 영산강 유역 일대를 길들이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영산강 유역 일대의 반견훤 정서는 거꾸로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견훤은 백제부흥을 외쳤으며 그 구호가 적어도 옛 백제의 전역에 설득력을 발휘하였으나, 영산강 유역 세력 입장에서 보기엔 통일신라 때부터 이어왔던 재미없는 기조가 지속됨을 뜻했다. 게다가 견훤 자체가 원신라 지역 출신인 신라 장수였으니, 그들은 통일신라 시절과 마찬가지로 전남 중부 내륙부 및 동부 섬진강 유역의 기득권을 더욱 우선시하는 견훤의 백제부흥운동 따위에는 결코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적어도 이는 그전 부여씨 백제 때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때도 처음에는 광주 일대부터 백제에게 포섭되기 시작하였으나 통일신라, 후백제 때처럼 직간접적 견제 시도는 없었고, 고고학적으로는 영산강 유역이 부여씨 백제로부터 오히려 더욱 많은 후대를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힘도 없는데다 옛 백제보다도 호감이 적었던 신라에 충성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가 없었으니, 영산강 유역 세력의 선택지는 태봉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견훤 자체는 백제 부흥을 한다고 하면서도, 꾸준히 러브콜을 보내는 충남 공주, 부여 일대보다는 경상도를 장악해서 신라 쪽으로만 진출하려 하였으니 영산강 유역 세력의 선택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견훤도 백제왕 노릇을 하도 오래하다보니 나름대로 신라 정규군 장수 티를 극복하긴 하지만, 적어도 거병 초반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