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부흥운동 (문단 편집) ==== 전개 ==== 충북대 양기석 교수는 백제부흥운동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다. * 제1기 : 660년 8월부터 661년 8월까지. [[좌평]] [[정무#s-4]], 달솔 [[부여자신]], [[귀실복신]] 등이 백제유민을 규합해 초기 부흥군을 이끌고 나당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시기다. * 제2기 : 661년 9월부터 663년 2월까지. 왜국에 체류하던 [[부여풍]]이 귀국해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신라의 2차 대공세가 시작될 때까지다. 백제부흥군은 풍왕을 옹립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당연합군의 군량보급로를 차단하였다. * 제3기 : 663년 3월부터 664년 3월까지. 부흥군 지도층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백강 전투]] 패배, [[주류성]]과 임존성 함락 등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최후 항전기다. 마지막은 664년 3월 일어난 사비산성의 봉기다. 660년 8월 2일에 공식적으로 [[의자왕]]의 항복식이 열렸으나, 그 순간에도 [[좌평]] [[정무#s-4]] 등이 이끄는 부흥군이 부여 외곽의 석성산성, 왕흥사잠성 등에서 농성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통 [[태종 무열왕]]은 전쟁을 장수한테 맡기는 편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급하다 느꼈는지 직접 신라군을 이끌고 11월까지 이례성, 왕흥사잠성 등 부여 근처의 백제부흥군을 토벌했다. 11월 중순 백제부흥군의 기세가 한 풀 꺾였다 보았는지 무열왕은 장수들에게 백제 땅을 맡기고 [[서라벌]]로 돌아갔지만 사비 바깥의 서천, 청양, 논산 같은 각 지방에서는 백제부흥군이 순조롭게 힘을 모았고 661년 2월 들어 다시 사비성에 본격적인 공격을 재개한다. 백제부흥군은 초반에는 꽤 좋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약 10일만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는 기염을 토하는 한편 왜국과 힘을 합쳐 [[웅진도독부]]의 아성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포위하여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어버리고 당나라 군대가 철수를 고려하기까지 했던 저력을 보여주었기 때문. 이 단계에서 백제도호부는 설치된 지 1년도 못가서 없어지고 웅진도독부만 남게 된다. 신라에서도 장수들이 지고 돌아온 자가 많아 벌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을만큼 661년은 백제부흥군의 전성기였다. 게다가 [[고구려]]도 660년 말부터 [[뇌음신]] 장군을 지휘관으로 해서 신라 북쪽 한강 유역을 줄기차게 공격해([[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백제 땅에 신라군 정예가 쏠려있는 상황에서 후방 견제해주어 백제부흥군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모든 백제 유민의 힘이 합쳐지지 못해 [[충상]], [[상영]], [[자간]] 등은 신라군에, [[부여융]] 등은 당나라 [[웅진도독부]] 소속으로 들어가 부흥군과 싸웠다. 이는 전력 누수이기도 하고, 백제의 왕자나 고위 대신이었던 이런 자들이 부흥군의 적으로 등장한 상황은 부흥군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곧이어 당나라 본토에서 토벌군이 순차적으로 파견되면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한다. 당나라의 증원군은 육로가 아닌 수군으로 주로 파견되어 신속하게 백제 땅에 도착했다. [[의자왕]]의 맏아들이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도 당나라군의 지휘관이 되어 돌아와 [[유인궤]]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토벌하는 당나라군을 이끌었다(...) 고구려도 661년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이 벌어지자 백제를 지원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부흥군 내에서 [[부여풍]]과, [[귀실복신]]과 [[도침]] 등 부흥운동 지도자 간에 내분이 벌어졌다. 《일본서기》에는 부흥운동 세력의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내분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 에치노하타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하타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그러나 이 당시 부여풍은 실권이 거의 없이 귀실복신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던 시절이라, 사실 저 천도안은 귀실복신 혼자의 주장이었을 개연성이 높고, 부여풍의 뒷배였던 일본군 장수가 반대 의견을 내놓은 게 실은 부여풍의 의중이었을 소지가 높다. 부여풍과 귀실복신 간의 대립은 부흥운동의 노선 갈등이 원인이었다. 부여풍은 되도록 일본측에 외교력을 집중해서 일본의 원군을 더 많이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부여풍이 데려오는 일본 군세가 많아질수록 영향력이 떨어지는 귀실복신 입장에서 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이 있었는데, 일단 부여풍이 백제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장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천황에게 책봉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부흥군 장수들이 눈물을 흘리는 사건이 있었다. 부여풍이야 일본의 지원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필요악으로 여겼겠지만, 다른 부흥군 장수들이 보기엔 이건 백제사에서 단 한 번도 벌어진 바 없는, 그 아신왕도 광개토대왕한테 해본 바 없는 대굴욕이었다. 귀실복신에게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실복신에게 문제는 없었는가?''' 귀실복신은 백제에서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명망이 높았던 고승 도침을 살해하고 그 병력을 빼앗은 바 있었는데[* 물론 부여풍에게도 보고도 없이 독단으로.], 이렇다 할 구실도 없었고 순전히 그냥 본인의 권력욕과 야심이 이유였다. 이 사건 때문에 부흥군 내부의 결속이 흔들려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와 [[동구(대전)]] 일대의 중요한 산성과 요새들을 죄다 신라에게 빼앗겨 원군과 식량 보급을 웅진성의 당군에게 허락하는 바람에, 웅진성 탈환에 실패하는 큰 군사적 실패를 겪은 바 있었다.[* 이때 있었던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옹산성 전투로 김유신이 직접 투항을 권유하였으나 성주가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 패배해 수천 명이 죽고나서야 항복한다. 옹산성은 현재 [[계족산]]에 위치한 [[계족산성]]으로 비정된다.] 이와 같은 사정은 나당 연합군에게도 잘 알려져 공개적으로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판이었다. 부흥 운동 중간에 전남북 일대는 물론이고 충남에서도 적지 않은 성이 당군이나 신라군에게 순순히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이 원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결국 귀실복신은 파견나온 왜국측 지원군 장수들의 의견을 씹고 자기 뜻대로 피성(避城)[*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등으로 비정된다.]이란 곳을 부흥운동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천도한 직후에 [[김흠순]]과 [[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지금의 전라북도 동부 및 경상남도 서부인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함락시키는 사태가 벌어지고,[* 백제부흥군의 4개성을 신라군이 점령한 것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나온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4개성을 신라에 빼앗긴 후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위험했으므로 결국 2달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된다.[* [[반파국]](대가야)이 예전에 백제가 어려울 때 진출했던 그 영역들이기도 했다.] >(663년) 2월에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한 [백제의]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2년(663) 봄 2월 乙酉 초하루 丙戌 백제가 달솔 금수(金受)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주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安德)[* 현재 위치는 불명이나 백제 5방중 한곳인 덕안(德安)의 오기로 보고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류성에 돌아와 살았으니, 타쿠츠(田來津)[* 왜군을 이끌고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한 왜측 장수.]가 헤아린 바와 같았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이런 진행 과정에서 귀실복신이 먼저 선수쳐 풍왕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돼서 [[풍왕]]이 귀실복신을 [[처형]]해버렸다. 기록에 의하면 귀실복신이 ([[본인]]이) 병이 났다는 것을 핑계로 거짓말하면서 누워 있었다가 [[역관광|풍왕이 병문안을 오면 죽여버리려고 했다가, 오히려 발각되는 바람에 본인이 먼저 처형돼 버렸다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패턴은 귀실복신이 도침을 죽인 실수와 정확히 일치했다. 바로 이 사건 직후 신라군이 대전 유성구-서구 일대에서 여전히 웅진으로의 보급을 방해하던 백제군 요새들을 모조리 함락하면서 오늘날의 대전 전체를 완전 장악했고, 그것은 옛 백제 핵심지에 웅거한 당군의 보급에 방해될 요소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뜻했다. 이후 풍왕은 왜국의 구원군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백강 전투]]를 치르는데, 이 백강 전투에 이와 같은 대실패가 크게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결국 백제부흥군은 대패하여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하였고, [[부여자신]] 등은 왜군과 함께 [[왜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구심점인 왕이 사라지자 남아있던 다른 지역의 백제부흥군도 사기가 꺾이고, 부흥군도 서로 갈라져버려 따로 버티고 있던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망명하였으며 [[지수신]]은 홀로 부흥운동을 진행하다 [[고구려]]로 망명, 마지막까지 저항한 [[주류성]]과 [[임존성]]은 함락되고 부흥운동도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664년 3월 [[부소산성|사비산성]]에서 백제부흥군 잔당들이 봉기를 일으켰지만, 웅진도독 [[부여융]]에게 진압당했다.[*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사비산성(泗沘山城: 현재 부소산성)에 머물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웅진(熊津) 도독(都督)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깨뜨렸다.(三月, 百濟殘衆據泗沘山城叛 , 熊州都督發兵, 攻破之. -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6 문무왕)] 일단 이 시점에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고, 백제의 수도권은 당나라의 지배를 받는 웅진도독 [[부여융]]이 다스리고 그 외 백제 외곽의 각 지방은 신라군이 차지한 상태가 된다.[* 정확한 정세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지금의 [[대전광역시]] 와 그 주변 그리고 [[전라북도]] 상당부분은 부흥전쟁 직후 신라 점령지였다. 이후 나당전쟁 때 당군을 몰아내면서 백제 영역 전체를 신라가 차지하게 된다.] 남은 백제의 잔존세력은 [[왜국]]이나 [[고구려]]로 도주하거나 [[신라]]나 [[당나라]]의 괴뢰국이라 할 수 있는 [[웅진도독부]]에 붙어 [[나당전쟁]]에서 서로 싸우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