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부흥운동 (문단 편집) ==== 부흥운동 소멸 후 ==== [[나당전쟁]] 종결로 패배한 [[웅진도독부]]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일단 백제 왕실이 주도하는 백제 부흥운동은 끝나게 된다.[* 이후 웅진도독부의 친당 백제부흥세력은 고구려 [[건안성]]에서 잔존하다가 [[발해]] 건국기에 궤멸하여 자취를 감춘다. 자세한 내용은 웅진도독부 문서 참조] 신라는 백제인에게 신라 관등을 주고 신라 지방 지배층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삼국사기 직관지 신라 외관, 국보 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명문] 문무왕 13년인 673년 백제인에게 수도와 지방[內外]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관등(官等)을 백제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었다. 경관(京官)인 신라의 대나마(大奈麻)는 본국(백제)의 달솔(達率)이었으므로 대나마에 임명하였다. 흔히 백제 유민에게 주어진 최고 관등이 [[5두품]]이라는 점에서 진골까지 준 고구려계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은 일단 사실이다. 고구려계, 백제계 모두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백제계 귀족들이 신라가 주는 벼슬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나라가 혹시 있을지 모를 부흥운동의 씨앗을 차단하기 위해 사비성에 있던 백제 왕족들은 모조리 당나라로 압송했고, 나머지 왕족들 중 왜국으로 도피한 부류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탈출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후 떠나지 않고 머무르고 있었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부여풍을 데려온 건 본토에 왕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자왕의 아들, 즉 정통성이 가장 강한 왕자가 그 뿐이어서지 사비성 함락 후 백제 왕족이나 귀족이 다 증발해서인 건 아니었다. 나머지 고위 귀족들이 왜국으로 집단 도주하긴 했으나 그 규모가 수십만을 헤아린다는 건 근거 없는 추측이다. 이와 더불어 애초에 항해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고 정세가 혼란했던 당대의 상황을 감안하면 고위 귀족들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백제 유민이 중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신라를 피해 [[대한해협]]을 건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장 백강 전투만 봐도 왜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선 천 척과 함께 투입한 병력의 최대 추정치는 4만, 최소 추정치는 2만 7천을 왔다갔다하고 있다. 이들이 궤멸된 상황에서 다시 왜국으로 돌아갈 선박도 엄청나게 불태워진 상황이었다. 전투의 생존자들이 꽤 많이 도주했지만 다는 못가고 상당수는 남은 게 확실하다. 신라가 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 기회만 되면 대단히 많은 백제인을 원신라 지역으로 사민했던 것도 특기할 일이다. 그렇다면 백제계 성씨들은 이후 다 어떻게 된 것일까? 통일신라 시대에 성씨를 쓸 수 있었던 건 6두품 이상이었는데, 남은 백제계 귀족이나 세력가들은 6두품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씨를 아예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원래의 지위에 맞게 관품을 받은 건 저항하다가 항복해서 의자왕 시절 다스리던 고을의 태수로 그대로 임명받은 몇 가지 예외 외엔 거의 없었고, 나중가선 아예 백제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했더라도 품계는 5두품으로 한정되어 적용받게 된다. 백제 출신으로 신라에 투항하여 장군으로 맹활약한 상영(常永), 충상(忠常), 자간(自簡) 같은 백제인들은 과거 백제 16관등 중 1순위인 좌평이나 2순위인 달솔의 벼슬을 가지고 있었던 고위 귀족들이었음에도 투항 후 비교적 낮은 경위 6등 아찬이나 경위 7등 일길찬의 관등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마저도 다른 조치들에 비하면 꽤 우대받은 케이스일 정도. [[고안승]](高安勝), [[고연무]](高延武)를 따라 신라에 합류한 고구려 유민들도 신분을 막론하고 신라계가 아니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높은 관등을 제수받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직 [[가야]] [[금관국]]의 왕족인 [[김해 김씨]]들이 거리낌없이 신라 지배층에 사실상 수용된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그리고 심지어 이들도 신라 하대로 가면서 뒤를 봐주던 무열왕계가 권력을 잃고 내물왕계가 집권하게 되자 권력층에서 밀려나게 된다. 사서가 아닌 족보상의 기록이긴 하지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을 본관으로 하는 [[신평 이씨]](新平 李氏)의 기록을 보면 백제 멸망 이후 백제계 귀족 및 호족 가문들이 대략 어떻게 역사를 거쳐왔는지가 얼핏 보인다. 신평 이씨의 시조는 백제 사평현(沙平縣)의 호족이었던 이인수(李仁壽)로 이인수의 아들인 이주(李珠) 역시 백제의 호족이었고 이주의 증손자 이석덕(李碩德)은 신라의 지방관을 지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전주 류씨]](全州 柳氏) 또한 삼국시대부터 이미 백제의 호족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증조부 류기휴(柳基休)는 신라의 지방관을 지냈고 조부 류법반(柳法攀)은 [[후백제]](百濟)의 우장군(右將軍)이었으며 아버지인 류윤겸(柳潤謙) 때 고려에 귀의해 대감(大監)을 지냈다고 한다. 류방헌의 어머니인 승화군대부인(承化郡大夫人) 담양 이씨(潭陽 李氏)는 [[견신검|신검]]의 정변을 예견하고 몸을 숨긴 이염악(李廉岳)의 딸이라 하는데 [[전라남도]] [[담양군]]이 본관인 담양 이씨는 신평 이씨에서 분관한 가문으로 역시 백제계 가문이었다. 즉 왕국이 두 개나 멸망하는 혼돈 속에서 고구려나 백제의 호족들은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머나먼 외국으로 이주하거나 아니면 본거지에 그대로 남아 새로운 [[당나라]], [[발해]] 혹은 신라 정부에 충성하여 원래 영역의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으며 [[남북국시대]]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백제계 호족들이 후백제의 관직을 역임하거나 신검의 정변에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각자 지역에 따라 새로운 정권인 고려나 후백제나 [[요나라]]에 충성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라인 갈아타기에 몰두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사서에 일일이 다 기록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적게나마 기록된 모습만으로도 많은 연구자들의 예상처럼 삼국시대 토착민의 후예들이 변화하는 상황과 시대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음이 드러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