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병신정변 (문단 편집) == 결과 및 평가 == '''병신정변'''의 결과로 고려 조정 내 친원파 세력은 사실상 없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병신정변이 비록 원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빠른 시일 내[* 당장 [[명나라]]의 건국 시기가 1368년으로, 병신정변이 있었던 1356년은 명나라 건국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선 시기였다.]에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의 반발을 강하게 사게 된다. 당장 분노와 증오로 가득찬 [[기황후]]는 [[덕흥군]] 왕혜(王譓)을 고려 왕으로,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고려 왕세자로 책봉하여 최유를 포함한 10,000명의 대군을 동원해 침공했으나, 다행히도 고려군은 명장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이를 막아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공민왕은 자신의 최측근인 [[김용(고려)|김용]]의 전횡, 즉 홍건적 퇴치에 큰 공을 세운 [[안우]]와 [[정세운(고려)|정세운]]의 죽음을 제대로 막지도 못했으며, 1363년에는 [[흥왕사의 변|결국 이 김용이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하는 시도를 벌이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왕 자신이 잦은 외침으로 인해 정처없이 해매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는 추후에 [[신돈]]의 등용으로 이어졌다. 사실 이후 명나라가 건국되었지만 [[공민왕]] 사후 [[우왕]] 시기까지 고려는 원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하면서 명나라의 눈치까지 봐야 했으며, 조정 역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했다. 왜냐하면 명나라는 서해 바다 건너에 있었지만 원나라는 북쪽에 바로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민왕의 반원자주개혁정책은 시기가 좀 빨랐고, 잦은 외침으로 효과가 반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