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물섬 (문단 편집) == 해설 == ||보물섬: 빅토리아 시대 아동 문학의 반란 1881년 『청소년Young Folks』 잡지에 연재를 시작해 2년 뒤인 1883년 단행본으로 나온 『보물섬』은 출간된 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러하듯, 『보물섬』의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1881년, 당시 서른한 살이던 스티븐슨은 작가로 살 뜻을 굳혔으나 아직 상업적 성공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그해 여름, 스티븐슨은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 북부 고지에 있는 브래머로 휴가를 떠난다. 하지만 날은 춥고 연일 비가 내려서 스티븐슨의 의붓아들인 로이드는 집 안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로이드는 섬 지도를 한 장 그렸다. 로이드가 그 지도에 색칠하는 모습을 본 스티븐슨은 지도를 좀 더 정교하게 다듬고 〈해골섬〉, 〈망원경 산〉과 같은 지명을 붙이기 시작했고, 몇 곳에 붉은 ×표를 그려 넣었으며, 섬 자체에는 〈보물섬〉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지도가 완성되자 로이드는 해적과 보물섬에 얽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뒤로 사흘 동안, 스티븐슨은 『보물섬』의 처음 세 장을 써서 가족들에게 읽어 주며 의견을 들었다. 스티븐슨은 가족들의 의견을 반영해 『보물섬』의 첫 부분을 수정했다(가령 빌리 본즈의 궤짝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스티븐슨의 아버지가 제안했으며, 사과 통 안에서 벌어진 사건 또한 스티븐슨의 아버지가 제안해 들어갔다). 보름 뒤, 스티븐슨의 지인인 알렉산더 잽은 『보물섬』의 앞부분을 『청소년』 잡지의 편집자에게 보여 주었고, 『청소년』은 매 호마다 『보물섬』을 한 장씩 발표하기로 한다. 계약을 한 뒤로 스티븐슨은 보름 동안 하루에 한 장씩 써내려 갈 정도로 『보물섬』에 열을 올렸다. 『청소년』이 유명한 잡지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보물섬』은 연재 당시에는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으로 나오자 독자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다. 당시 수상이었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이 『보물섬』을 읽느라 새벽 두 시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보물섬』이 성공한 데에는 물론 작품 자체의 힘이 컸지만, 발표 시기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 발표된 소설들은 작가와 출판업자, 사설 도서관들의 담합으로 값이 무척이나 비쌌다. 이 때문에 19세기 중반, 영국인들 가운데 책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소설은 보통 세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는데, 이는 첫 권을 출판해야 책의 나머지 부분을 찍을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설의 평균 분량은 대략 15만에서 20만 단어였다(참고로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이 25만 단어 정도이다). 하지만 19세기 말 인쇄술이 발달하며 책을 찍는 비용이 줄었으며, 공립 도서관의 수가 늘면서 사립 도서관들이 몰락하기 시작했고, 이런 요인들 덕분에 책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도서관이 빌려 주기 원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또한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분량을 늘인 소설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1870년에 시행된 의무교육 법안으로 인하여 가독 인구가 늘어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스티븐슨은 이런 상황을 잘 파악했고, 『보물섬』은 그러한 시장의 욕구를 충실히 반영한 소설이었다. 『보물섬』은 7만 단어 정도로 기존 소설 분량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며, 〈바다의 요리사, 또는 보물섬: 소년들을 위한 이야기The Sea Cook or Treasure Island: A Story for Boys〉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소년이 대상이었으며, 1880년대 제국주의 팽창에 발맞추어 〈외지 세계의 탐험을 통한 부의 실현〉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또한 『보물섬』의 권두를 장식하는 〈이 책의 구입을 망설이는 분에게〉라는 시 제목은, 이 책이 단순히 독자가 아닌 구매자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작가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더불어 〈구매자〉라는 표현은 그전까지 상업적 성공을 이루지 못해 초조해하던 스티븐슨의, 실제 구매력이 있는 성인 독자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욕심이 배어 있다. 당시 스티븐슨이 얼마나 절박한 심경이었는지는 그가 1894년에 『보물섬』을 다시 내며 실은 〈나의 첫 작품〉이라는 머리말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가장이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전까지 소설로 제대로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었으며, 일 년에 200파운드를 벌어 본 적조차 없었다……. 나는 이번 책마저 완전히 실패해 펜을 꺾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보물섬』의 성공을 바라는 스티븐슨의 심정은 동료이자 유명한 편집자인 W. E. 헨리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이 청소년물로 돈을 벌 걸세. 하지만 우선 첫걸음을 떼는 게 중요하지. 『청소년』에 연재가 끝나면 나는 이 원고를 루트리지 또는 그 정도 급의 유명한 출판사를 통해 책으로 묶어 낼 거야. 〈바다의 요리사〉는 재판을 찍을 거고 그로 인해 꽤 많은 돈을 벌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네.」 비록 스티븐슨은 『보물섬』을 『청소년』에 연재하는 동안 원하던 만큼의 고료를 받지는 못했지만(연재료로 34파운드 7실링 6펜스를 받았다) 저작권을 가질 수 있었고, 2년 뒤인 1883년 (원했던 루트리지가 아닌) 카셀 출판사와 선인세 백 파운드에 사천 부 판매 이후부터 천 권당 이십 파운드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스티븐슨은 이 조건에 무척이나 기뻐했고, 헨리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을 때 그러한 심정을 밝힌 바 있다. 「오, 나는 행복하다네. 한몫 벌었거든.」 하지만 스티븐슨 자신도 『보물섬』이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듯하다. 그는 같은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백 파운드 선인세는 『보물섬』의 가치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은 거라네.」 하지만 『보물섬』은 스티븐슨의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 책으로 스티븐슨은 당시 최고의 작가로 우뚝 섰다. 또한 『보물섬』은 이후 해적물의 전형을 이루었고, 여러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후편을 쓰게 했으며 여러 번에 걸쳐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제작되었을 뿐 아니라 〈보물섬〉이라는 이름은 테마파크의 단골 이름이 되었다. 또한 스티븐슨은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보물섬』의 대성공은 수많은 아류작과 속편, 각색물을 이끌어 냈고, 소재로 쓰인 손으로 그린 지도, 해적, 보물, 무인도 그리고 심지어 등장인물인 실버는 이후 나온 해양 모험물의 단골 소재로 쓰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