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시라이 (문단 편집) == 몰락의 원인 == 외부의 관측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가 '''대중운동으로 권력을 강화하려 하는 보시라이의 행태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몰락의 원인이라고 한다. 보시라이의 정변시도 당시 후계자였던 시진핑이 최고지도자로 등극하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몸을 낮추던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행실을 보였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푸젠이나 저장에서 특별한 일을 꾸미지 않고 당중앙의 방침에 복종했던[* 물론 지방관의 성과를 중시하는 공산당 특성상 담당했던 지방의 경제성장률이 특별히 높지 않아 악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안정감 때문에 상하이 서기 천량위가 비리로 낙마했을 때 대체자로 선택받아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시진핑과는 달리, 다롄과 충칭을 거치며 자신의 업적을 화려하게 포장하고 홍보했던 보시라이는 이미 왕리쥔 망명시도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있었다. 사실 공산당 고위간부들 중에서는 공식석상에서 당중앙의 방침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 없는 덕담만 하는지라 좋게 말하면 매우 조심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한 사람들이 많다. 정치적 갈등이 있어 의사표현을 할 때도 여러 층의 은유를 쌓아두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 책잡힐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후진타오]]나 [[리커창]] 같은 공청단파 지도자들의 경우 공산당이 제공하는 공식 --설정--프로필 외에는 가족이나 개인적 면모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진핑의 딸 시밍쩌도 보과과처럼 하버드 유학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게 없다시피 하다. 이는 중국 지도자들은 인민의 직접적 투표 대신, 각 계파의 타협을 통해 선출되기 때문에 소수의 우군을 만드는 것보다는 조심스럽게 처신해 반대파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출세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시라이는 대놓고 외신기자들을 가까이하면서 특유의 직설적 언어로 떡밥을 열심히 던져주는 정치인이었고, 아내와 아들도 부와 권력을 과시해, 미국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셀러브리티 노릇을 하며 전형적인 서구 정치인 일가처럼 행동했으니 보수적인 원로들에게 보시라이는 당 말아먹을 놈으로 보일 수밖에 없던 것. 거기 더해 시진핑은 팔대원로의 자손임에도 이를 내세우는 대신 겸손한 자세로 그가 모셨던 샹난, 자칭린, 쑹더푸 등의 선임 성 간부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이들은 시진핑과 배경도 정치적 입장도 달랐음에도 출세하는 과정에서 어김없이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중국 정치에서는 서로 다른 계파에 속하는 인사들도 짝을 이뤄 같이 일하는 처지다보니 개인적 관계도 상당히 중요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의외로 반대 계파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도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태자당이나 공청단 같은 분류는 참고용으로만 보는 게 좋다. 100% 순혈 상하이방임에도 시진핑이 전임 서기 천량위 숙청 이후 상하이로 급작스럽게 부임해왔을 때 시장 자리에서 시진핑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장쩌민계가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이 관계를 바탕으로 상무위원까지 승진한 [[한정]]이 좋은 예.] 그런데 보시라이는 막강한 아버지를 믿고 다롄시장 시절에는 차오보춘 시위서기와, 랴오닝 성장 시절에는 원스전 성위서기와, 상무부장 시절에는 부총리 우이와 싸우기에 바빴고(...) 당연히 이들은 중요한 때마다 보시라이만큼은 안 된다며 그들의 출세길을 막아세웠다. 같이 중앙후보위원 직에 도전했던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중앙후보위원 수를 151명으로 늘려가며 없던 자리까지 만들어 원로들이 승진시켜줬지만 보시라이는 반대표가 쏟아져 하위 5% 안에 들며 탈락했으니 사실 높은 자리에 오르기에는 인망이 너무 떨어지는 인물이었던 것. 게다가 보시라이는 앞에서는 反부패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엄청난 재산을 빼돌리고 100명이 넘는 정부([[첩]])를 두는 등의 엽색행각을 벌였음이 들통나서 더욱 위기로 몰렸다. 빼돌린 재산으로 볼 때는 [[사형]][* 중국에서는 부패 정도가 일정 액수를 넘으면 사형선고를 한다.]에 해당하여 보시라이는 차세대 권력 바로 앞에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다. 거기다가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의 아들인 보과과는 영국 명문 해로우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교]], 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인재인데, 파티나 여자에 탐닉하는 등의 행각을 벌여 안그래도 위태로운 아버지의 위신을 더욱 땅에 떨어뜨렸다. 후에 하버드 교지인 더 크림슨에 "남들이 내가 돈이나 배경으로 여기 입학했다고 하는데, 나는 공부 잘했음"이라는 글을 기고하는 드립을 치기도 했으나...옥스퍼드 시절 보과과는 정학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하버드 진학을 꿈꾸던 보과과가 담당 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버드에 합격을 하였다. 분명 고등학교 시절 [[GCE Advanced Level|A-Level]]에서 올A를 받은 수재임은 분명하나, 이후 대학 생활에서 삐뚤어진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 붙은 건 여러모로 다른 요인이 보과과의 하버드 합격에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 된다.[* 사실 [[하버드대]]를 포함한 많은 영미권 대학 같은 경우 세계 각국의 명문가 자제들은 물론 졸업생의 직계가족등에게는 입학이 가산점을 부여하여 입학이 일반인에 비해 매우 쉬운 편으로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학교 명예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 넣어주는 경우가 많다.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미국]]의 대학 입시가 꼭 한국보다 더 공정한 건 아니다. [[조지 워커 부시|아들 부시]]도 [[예일대]]를 학점 2.3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 입학했다.] 보과과는 2019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케네디스쿨보다 더 좋은 학교 같은데-- 2012년 4월 결국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이후로 별다른 변동이 없던 중국 정치계에서 불어닥친 폭풍이었다. 이젠 같은 태자당으로 꼽히던 [[시진핑]]마저도 보시라이를 보호하지 않고 쳐내게 되었다. 다만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태자당 내에서는 [[정적]] 같은 관계로 평가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