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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薄熙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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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薄熙來 (병음:Bó Xīlái, 한국 한자음:박희래)
국적
파일:중국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출생지
중국 베이징시
출생일
1949년 7월 3일 (70세)
학력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학사
중국 사회과학원 석사
종교
없음 (무신론)
정당
중국공산당(1980년~2012년)[1]
주요 이력
다롄시 시장
랴오닝성 성장
중화인민공화국 상무부 부장
충칭시 당위원회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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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3. 출세
2.4. 충칭 시위원회 서기 / 상무부장
2.5. 창홍타흑
2.6. 왕리쥔 사건
2.7. 몰락
3. 몰락의 분석
3.1. 보시라이의 위험한 수준의 권력
3.2. 구카이라이의 살인 및 도덕적 타락
3.3. 장웨이제 실종 사건 연루설
4. 결과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정치가이자 前 다롄 시장, 前 충칭시위원회 서기. 범죄자.
혁명원로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 파벌의 일원으로, 중국 공산당 원로이자 정부의 재정부장을 역임한 보이보(薄一波, 박일파)의 아들이다. 아버지 보이보는 이른바 8대 원로의[2][3] 한 사람이라 태자당 중에서도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4] 거기에 키가 186cm나 되는 장신훈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집안 좋고, 머리도 좋은 공산당의 엄친아인데다가 행정능력도 뛰어나고 빈부격차 해소와 복지정책 확충이라는 괜찮은 비전도 제시했으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시민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에 올랐지만 막상 본인이 몸처신을 제대로 안하면서 무리수를 둔 대가로 몰락한 예이다.
문화대혁명 때문에 제대로 된 대입시험은 1976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77년에 대입시험이 부활했을 때 이걸 패스한 최초의 엘리트 학번인데, 순식간에 북경대학 역사학 학사와 중국사회과학원 석사를 합격해서 학벌까지 갖췄다. 심지어 언변까지 굉장히 탁월해서 인터뷰, 연설을 했다하면 허구한 날 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실제로 기자들이 가장 많이 달려들었던 정치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2. 일생



2.1. 문화대혁명


한창 고급중학교에 다녔을때 문화대혁명이 터졌고 보시라이도 당대의 여느 중국 청소년들처럼 홍위병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에는 연동(連動)의 멤버였는데, 연동에서는 "뿌리가 붉으면 곧은 싹이 나온다", "아버지가 영웅이라면 아들은 호걸,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은 바보" 등의 혈통론을 선전했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가 반동으로 몰려 자신의 '반동혈통'으로 출세길이 막힐 뻔하자 홍위병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두들겨 패 갈비뼈 2개를 부러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들겨맞으면서도 속으로는 '제대로 정치인의 자질이 있구나'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5][6]
"강청이 나를 반동분자로 선포하자, 나의 아들인 어린 시라이까지도 나에게 철권을 날렸다. 나는 눈앞이 시커멓게 되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독한 어린 아들은 다시 앞으로 나와서 발로 가슴을 몇 번 밟았다. 당시에 늑골 3개가 부러졌다. 이 육친불인, 손속이 독하고 마음이 악독하고 부친마저도 죽이려 할 정도인 것을 보면, 이 어린 아들은 우리 당의 미래 후계자로서 좋은 재목이다. 나중에 분명히 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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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의 보이보(1908-2007). 장수하여 아들 보시라이가 그 덕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보시라이 본인도 아버지의 후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인데,[7] 밑에서 이 사람의 결혼 생활이 포함된 사건을 보면 이런 것도 유전인가 할 정도로 닮았다.
문혁 시절에는 교육기관도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보시라이는 이 시기에 대학도 안 가고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2.2. 결혼이혼, 재혼


이때 같은 혁명공신 리쉐펑의 딸 리단위와 중매로 결혼한다. 이후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보시라이는 뒤늦게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8] 이 결혼은 6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는데, 이유는 보시라이가 대학을 다니면서 리단위의 오빠의 부인의 동생(그러니까 큰처남댁의 동생) 구카이라이(谷開來)와 눈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미 보시라이와 리단위는 아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이혼했다. 아들 왕즈는 다른 여자에게 간 아버지를 증오한 나머지 성을 어머니를 따라 리씨로 바꿨다고 한다.

2.3. 출세


어쨌든 구카이라이는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고, 보시라이는 태자당으로 공산당에 들어가 출세길에 올랐다. 보시라이를 출세로 올린 것은 다롄 시장직이었다. 이때 보시라이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많은 깡패들을 잡아 소탕했고, 반부패운동도 벌여 부패 공무원을 추방했다. 거기다가 시의 미관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다롄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미항으로 꼽힌다. 때문에 보시라이는 퇴임할 때 다롄 시민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았으며, 이때의 공적으로 차세대 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때 한국도 자주 방문하는 등, 지한파 중국 정치인으로 꼽혔다. 이 당시 다롄 시민들은 축구, 패션, 그리고 보시라이를 다롄의 3가지 보물로 일컫기도 했다.
이때 다롄 공안국장이었던 왕리쥔(王立軍)을 심복으로 두게 되는데, 왕리쥔은 지나치게 저돌적인 성격이었고, 그 덕분에 보시라이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무리수 때문에 많은 적을 두게 되었다. 이런 관계는 후에 악연으로 끝난다.

2.4. 충칭 시위원회 서기 / 상무부장


이런 공적으로 랴오닝성 성장을 역임했고, 이후 충칭 시위원회 서기로 승승장구했다. 이와 함께 로펌을 설립한 부인도 남편이 공산당의 고관이라는 배경에 힘입어 사업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외동아들을 12세부터 영국의 해로 스쿨(Harrow School)[9]유학 보낼 정도였다.
2004년에는 중앙정부의 상무부장에 임명되어 2007년까지 중앙정부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중국은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독일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다.
2006년 뭄바이에서 인도 총리 만모한 싱이 "미래는 아시아의 시대가 아닌 자유의 시대"라 중국을 에둘러 까자 다음날 "데모할 자유는 민주주의가 아니다"음?이라는 말로 인도를 공격하며 "민주주의 논쟁"을 일으켰다. 항목 참조. 또 같은 해 중국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중국 제품과 식품은 안전하다"라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기도 했다.
2007년에 충칭 시원회 서기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때 보시라이는 이때 충칭이 소득재분배 정책 시범 추진지역으로 선정되면서 임대아파트 보급 등 복지제도의 대대적인 도입 및 인프라 건설사업을 주도하게 되면서 충칭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마오주의 노선과는 철저하게 거리가 멀었던[10] 보시라이는 당 중앙상무위원회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정책에 좌파적인 색채를 씌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 몸 처신 좀 잘하지

2.5. 창홍타흑


보시라이는 차기 대권주자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휘해서 창홍타흑(唱紅打黑)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중국의 개방화와 함께 무너져가고 있던 공산당 문화의 부흥을 외쳤다. 이에 앞장선 것이 몽골계 심복 왕리쥔이었다.
'타흑'이란 부패한 자를 몰아낸다는 뜻으로 1500명이나 되는 부패·폭력 범죄자를 체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탈법이나 편법이 판쳤다는 잡음이 심하게 일었다. 가령 재력가를 고문하여 재산을 상납하게 하고 중죄인으로 처리해버리는 식으로 축재를 했다고 전해진다. 전임자의 측근도 비슷하게 처리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당시 최고의 부패경찰으로 악명높았던 중경시의 사법 국장인 문강을 본격적으로 탈탈 털면서 부정축재, 성폭행 혐의를 캤는데 이때 연못 밑에 방수처리를 하고 그 밑에 돈을 깔아놓는 수법을 쓴 문강을 까발리는 것을 전국적으로 방영하며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환호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문강을 공개재판 1심 사형, 2심 사형으로 바로 처형해버리면서 이 인기에 불을 붙였다.
'창홍'은 이른바 唱红歌, 读经典, 讲故事, 传箴言라고, 옛 경전을 읽히고 공산당 문화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으로, 공산당의 선전가를 부르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물론 문자 메시지며 마이크로 블로그 등을 통해 옛 경전의 글귀나 명언 등이 널리 퍼졌다. 공산당 선전과 관련된 문구가 있었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광고가 충칭 지역 방송에서 금지되었는데,[11]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2011년부터 지역 방송국에서 광고를 빼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과 관련된 프로를 틀도록 지시했는데, 관계자들이 '광고가 다 팔렸다'라며 반발했지만 보시라이는 이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다고 한다.(홍콩 SCMP)
또 보시라이는 사회주의적 가치인 분배를 강조하는 발언을 여러차례 해서 가난한 중국 서민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를 위해서 저가 임대주택을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이것을 '충칭 모델' 나아가 '차이나 컨센서스'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포퓰리즘"적인 정책, 즉 민중의 인기를 얻고 공산당의 지도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로 보여져 정적들의 경계를 샀다.
그가 정치적 스승 저우융캉의 뒤를 이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 정치법률위원회 서기를 노린다는 얘기가 많았다. 상무위원은 우리나라로 보면 대통령과 5부 요인(국회의장, 국무총리, 대법원장, 선관위장, 헌재소장)급이고, 정법위 서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민정수석비서관+국회 법사위원회 위원장+당 중앙 법사위원장으로 당 서열 9위이지만 사법부의 수장이라 할 만큼 권력이 엄청나다. 한국에선 장관급인 법사위와는 달리 수상이나 부통령급으로 검찰부장과 최고재판소장, 공안부장, 법무부장, 그리고 정규군에 버금가는 무력인 중국인민무장경찰 사령관을 통솔할 정도로 사법계에서 막강한 자리이다.

2.6. 왕리쥔 사건


그런데 갑자기 2012년 3월 초, 보시라이는 그동안 타흑창홍을 지휘하던 측근인 왕리쥔을 공안부장에서 해임하고 문화담당 부시장으로 발령냈다. 이는 표면상 승진이었으나 실제로는 실권 없는 자리로의 좌천이었다. 이 직후 왕리쥔은 청두미국 영사관을 통해 망명을 시도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말이 많은데, 중앙정부에서 보시라이에 의심을 품고 조사하기 시작하자, 보시라이는 이를 왕리쥔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이를 위해 좌천시켰다가 결국 불안을 느낀 왕리쥔이 망명을 시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왕리쥔은 중국의 기밀정보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다는 의혹이 있었으며, 보시라이가 자신을 떨쳐버리려한 것에 분통을 터트려 망명하려했다는 의혹이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백악관의 지시로 왕리쥔의 망명은 거부되었고[12], 보시라이는 왕리쥔의 신병을 확보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치부가 낱낱이 밝혀져서 목숨이 달아날 판이었다. 얼마나 급했던지 보시라이는 자신의 관할 지역을 넘는 것은 물론 외교적 무례조차 신경쓰지 않고 충칭 공안차량 70대를 보내 청두 미 영사관을 포위해버렸다.
당연히 미국 측은 미쳤냐며 노발대발했고, 놀란 중앙당에서도 급히 쓰촨성 공안병력을 출동시켜서 충칭시의 공안병력과 대치하게 된다.시빌 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결국 보시라이의 충칭 공안병력들은 철수했고, 이 시점에서 보시라이의 운명은 결정난 것이었다. 왕리쥔은 국가안전부[13]에 연행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된 후에 보시라이의 치부를 까발리기 시작했다.

2.7. 몰락


보시라이는 이러한 의혹들이나 자신이 부패 혐의의 조사 대상이라는 의혹을 부정했다. 하지만 결국 3월 8일, 원자바오 총리가 직접 담화에서 보시라이의 이름을 거론하며 실명 비판했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라는 발언을 함으로써 보시라이는 치명타를 입었다.
중국 정계에서 문화대혁명은 하나의 금기인데, 비록 현재 주류 세력인 덩샤오핑 계열이 反문혁을 모토로 하고 있기는 하나 문혁을 지나치게 까고 부정하기만 하면 기존의 극좌 세력들이 반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문혁을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라고 규정하여 그의 과오 중 하나에 포함시키긴 했지만 그 이상의 과격한 평가나 파고들기는 하지 않은 채 적당히 거리를 둔 것이다.
헌데 원자바오의 발언은 보시라이의 타흑창홍이 곧 "인민을 선동하여 중국 공산당의 체계를 망가뜨리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행위라고 매우 극단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중국 정치권이 문혁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게 문혁을 좋게 평가해서가 아니라 까고 싶지만 까기에는 부담이 너무 커서일 뿐임을 고려한다면 답이 나오는 문제로, 보시라이는 촉망받던 차세대 대권주자에서 문혁급의 대형 사고를 친 범죄자로 찍혀 거의 모든 직책과 권력을 잃고 몰락하게 되었다.

3. 몰락의 분석


외부의 관측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가 대중운동으로 권력을 강화하려 하는 보시라이의 행태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몰락의 원인이라고 한다. 게다가 보시라이는 앞에서는 反부패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엄청난 재산을 빼돌리고 100명이 넘는 정부()를 두는 등의 엽색행각을 벌였음이 들통나서 더욱 위기로 몰렸다. 빼돌린 재산으로 볼 때는 사형[14]에 해당하여 보시라이는 차세대 권력 바로 앞에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 했다.
거기다가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의 아들인 보과과는 영국 명문 해로우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 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인재인데, 파티나 여자에 탐닉하는 등의 행각을 벌여 안그래도 위태로운 아버지의 위신을 더욱 땅에 떨어뜨렸다. 후에 하버드 교지인 더 크림슨에 "남들이 내가 돈이나 배경으로 여기 입학했다고 하는데, 나는 공부 잘했음"이라는 글을 기고하는 드립을 치기도 했으나...옥스퍼드 시절 보과과는 정학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하버드 진학을 꿈꾸던 보과과가 담당 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버드에 합격을 하였다. 분명 고등학교 시절 A-Level에서 올A를 받은 수재임은 분명하나, 이후 대학 생활에서 삐뚤어진 생활을 하였음에도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 붙은 건 여러모로 다른 요인이 보과과의 하버드 합격에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 된다.[15] 보과과는 2019년 현재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공부한다고 한다.
2012년 4월 결국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이후로 별다른 변동이 없던 중국 정치계에서 불어닥친 폭풍이었다. 이젠 같은 태자당으로 꼽히던 시진핑마저도 보시라이를 보호하지 않고 쳐내게 되었다. 다만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태자당 내에서는 정적 같은 관계로 평가되기도 한다.

3.1. 보시라이의 위험한 수준의 권력


중앙정부라도 군구는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선양군벌은 90년대에 '양가군'이라 불릴 정도로 양씨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군대며 아들 사위에게 지휘권이 물려진다. 개별 가문이 중국 군구 중 하나를 장악하고 있다.[16]
청두군구의 14군은 보시라이의 아버지가 만든 군이었고 때문에 보시라이의 사병에 가까웠다. 왕리쥔 사건 이후 보시라이는 14군을 방문했다. 장갑차량을 앞세워 무리하게 미국 대사관을 봉쇄한 것과 이후의 몰락을 생각하면 방문의 의도가 의심스러워진다.
시진핑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 중국은 군대만이 아니라 정치도 나누어져 있었다. 집단지도체제는 중국 정치의 특징이었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의 협의로 나라를 운영했다. 이들 9명은 중국 권력의 실세였고 체제의 특성상 서로 간섭할 수 없었다. 그런 권력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상무위원 저우융캉은 보시라이를 후계자라 생각했다. 저우융캉의 무장경찰은 150만에 달했고 사병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저우융캉의 뒤에는 3대 파벌인 상하이방이 있었다. 상세할 설명은 링크의 글을 참조.#
'사설 도청조직을 운용하여 주석인 후진타오를 도청하려 했다'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와 보이는 짓이 후에 밝혀졌는데,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무리가 아니다. 보시라이는 한국의 도지사 수준이 아니라 중국의 핵심 권력자이며 차기 대선 주자였다.
이후 20일 쯤에 '베이징에서 군사작전이 벌어졌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증거 하나 없는 괴소문이었고 만약 보시라이측의 쿠데타나 정부의 진압이었다면 숨기지 못할 정도로 사태가 커졌을 테니 사실이 아니라고 추측되지만 그 시기에 보시라이는 행방불명되고 이후 법적 처분을 받았다. 이게 그저 헛소문이라고 해도 당시 보시라이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일이다.
여담으로 사태 2년 뒤 저우융캉은 다른 이유로 체포, 당적 박탈. 상하이방은 시진핑에게 탈탈 털리며 몰락했다.

3.2. 구카이라이의 살인 및 도덕적 타락


또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가 체포되었다. 구카이라이는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청산가리독살하고, 보시라이는 그것을 은폐하는 데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닐 헤이우드는 보시라이 부부와 가까운 사업가였으나 최근 이권으로 다투고 있었다.##
보도에 의하면 충칭의 한 호텔에서 구카이라이의 부하들이 헤이우드에게 강제로 청산가리를 먹였다고 한다. 헤이우드를 죽인 이유는 헤이우드가 보시라이 일가의 재산을 빼돌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는데, 중앙정부가 헤이우드를 조사하면 자신들의 치부가 모두 나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시라이가 지배하는 충칭의 공안국은 헤이우드의 시신을 검시도 하지 않고 자살로 결론을 내서 서둘러 화장했다고 한다. 헤이우드는 전직 MI-6 요원이었으며, 이 때문에 영국 정부에서는 헤이우드의 죽음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중국 정부에 요청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사건을 조사하다가 보시라이의 비리 혐의가 포착되어 일련의 사건이 벌여졌다고 한다.
게다가 헤이우드와 구카이라이가 불륜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보과과가 영국에 유학갔을 무렵 아이를 뒷바라지한다고 영국을 장기방문해서 헤이우드와 호텔에서 동거했다고 한다. 남편은 100여 명이 넘는 정부를 두고, 아내도 맞바람에, 엄청난 부패혐의까지, 참으로 막장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회의원이나 장관급 정치인이 이런 의혹의 1/10 정도 일어나면 정치생명이 끝장인데 보시라이는 겁도 없이 그것도 장관급보다 높은 부총리급 차기 대선급 주자 핵심 정치인이 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셈. 사실 중국의 고위직 공무원도 엽기적인 추행을 서슴없이 하는 일이 많이 발생하여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3.3. 장웨이제 실종 사건 연루설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와 내연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는 다롄 방송국 여자 아나운서 장웨이제[17]를 남편 보시라이의 묵인 하에 납치 살해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현재 장웨이제는 2000년대 초 이후 장기간 실종 상태로 행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외 인체의 신비전에 나온 임산부 시신 중 하나가 장웨이제와 비슷해 보인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8] 다만 해당 전시회에 나온 임산부 시신이 장웨이제의 것이라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고[19] 관련자들의 여러 증언은 있어도 물증이 전혀 드러난 게 없는 상황이라 이 사건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4. 결과


2012년 8월 결국 판결이 나서 구카이라이는 사형에 2년 집행유예형[20]이 확정되었고, 충칭시 서기 자리를 빼앗긴 보시라이는 재판을 앞두고 있다. 그가 받은 돈의 액수가 워낙 커서 당적 박탈과 함께 20년에서 무기징역은 감수해야 한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보시라이의 인생은 사실상 끝났다, 부패사건만 드러나지 않았어도 5세대 지도 체제에서 서열 7위, 실질적으로는 3~4위 정도는 떼어놓은 당상이었고 더 출세할 수 있었지만 부패 때문에 몰락했다.
이 형량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많았다. 살인범은 사형에 처하는 게 원칙인 중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면하려면 정말 누가 봐도 우발적인 살인이거나 정상참작의 여지가 극히 커야 하는데 구카이라이는 거꾸로 명백한 계획살인에다가 선처의 여지도 없었는데 사형을 면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치적인 배려가 들어간 것.

2013년 구카이라이 재판이 일단락 된 이후 보시라이에 대한 재판도 열렸는데, 부부가 법정에서 자신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서로 불리한 증언을 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보시라이는 구카이라이가 문제가 된 왕리쥔과도 내연관계였다고 폭로하고,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의 부패행위를 증언하는 등 법정에서 콩가루 부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다만 위에 언급한 장웨이제 사건에 대해서는 나란히 입을 다물었고 별도의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 사건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2013년 9월 결국 보시라이는 부패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이후 항소도 기각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물론 부정 축재로 모은 재산도 모두 몰수. 보시라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보시라이는 시진핑과 리커창에 버금가는 위치였으나, 이제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다만 앞으로 수감 생활을 할 고위층 전용 감옥은 호텔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듯.
한편 보시라이의 몰락의 계기가 된 왕리쥔은 15년형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어지간히 죄질이 나쁘면 거의 무조건 사형이고 대신 나머지는 형량을 가볍게 하는 구조라 무기수도 15~20년이면 출소가 가능한 관계로 훗날 어떻게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시라이의 나이도 2019년 기준으로 70세로 이제 적은 편이 아니라 사실상 정치적 활동은 끝이 났다. 그의 형량은 이후 고위급 인물의 정치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의 상한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저우융캉도 역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놀랍게도 2017년 6월 28일 간암으로 가석방됐다. 다만 류샤오보처럼 간암 말기에 석방된 것이 아니라 초기에 석방되었고, 장쩌민과 후진타오 등 최고위 지도자들이 머물었던 휴양처에서 최고 수준의 의료진들에게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다고 한다. 시진핑: 살려 드릴게

5. 여담


  •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는 덩샤오핑 시절 부정부패 혐의를 받았던 장쩌민을 구해준 바가 있다. 장쩌민은 이후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중국의 지존의 위치에 올랐고, 생명의 은인인 보이보에게 자신이 반드시 보시라이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장쩌민 시절에 보시라이가 잘 나가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 아마도 이렇기 때문에 보시라이에게는 극형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버지가 건국의 1등 공신인 데다가 아무리 물러났지만 장쩌민은 상하이방의 후견인이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3대 계파인 보시라이가 속한 태자당과 상하이방 모두 보시라이를 적어도 최악에서는 구할 것이라고 예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시라이의 뻔뻔함은 태자당과 상하이방조차 질리게 했는지 결국 그는 2013년 9월 22일 무기징역 및 정치적 권리 종신 박탈을 선고받았다. 사실상 사회로부터 영구적으로 격리된 셈. 그래도 중국 기준으로는 100% 사형감인 그가 아내 구카이라이처럼 사형 집행유예도 아니고 그냥 무기징역을 받은 점을 볼 때 보시라이가 얼마나 거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김용옥의 주장으로는 반대로 보이보가 장쩌민을 숙청하려고 했어서 안 좋게 봤다고 한다.[21]
  • 진보좌파계열 국내 주간지 시사in은 2010년대 초 한국내 언론 중에서도 유별나게 보시라이에 집중했고 보시라이 실각 직전인 2011년 3,4분기에 이르기까지 "창홍타흑" 슬로건과 "충칭모델"식 경제정책에 엄청난 고평가를 부여하며 그를 중국 정계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했었다.# 다만 이건 이상하게 볼것도 없는것이 보시라이가 시정운영능력조차 막장이었다면 중간직에서 출세가 멈추웠겠지만 적어도 행정가로써는 능력은 뛰어났던데다가 중국의 사회복지 제도가 공산주의 국라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열악한 면이 많고 빈부격차 또한 심각하기에 충칭모델이 중국 경제성장 방식에 대안으로 제시되면서 주목받지 않는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즉, 애초부터 본인이 몸처신을 잘했으면 최소한 주석이나 총리를 노릴만한 인물이었을것이라는 것이다.
  • 인터넷 검열이 심한 중국에서는 네티즌들은 보시라이라는 이름 대신 그의 엽색 행각을 풍자한 '보치라이'(勃起来, "발기하다")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아니면 불후선생(不厚[22]先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한편 시진핑 정부 들어서, 전임 상무위원이었던 저우융캉이 비리혐의로 무기징역을 받는 등, 고위층이 연루된 중국의 부정부패는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 한때 중국 슈퍼 리그의 명문팀 다롄 스더 서포터들이 제일 존경했었지만 현재는 제일 증오하는 인물이다. 이 작자 덕택에 다롄 FC=>다롄 완다=>다롄 스더로 이어지는 역사속에 중국 슈퍼 리그 초창기부터 중국 최고의 명문팀이 되었지만, 후에 빵에 들어가면서 이분의 돈줄 역할하던 스더그룹 쉬밍회장도 잡혀가고[23] 동시에 스더그룹까지 몰락하면서 다롄 스더 축구팀도 같이 몰락, 끝내 같은 연고팀 다롄 아얼빈에 흡수당했기 때문.
  • 열거된 사실들과 별개로 충칭시민들에게는 인기가 많았고 현재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개인적인 비리가 심각하다고는 하지만 일은 잘했기 때문이었다. 중국도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젊은층들이 집을 제대로 구하기 힘들어 출산율 저하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데에다가 복지정책도 사회주의 국가답지 않게 많이 열악한데[24] 산업개발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집을 구하기 어려운 농민공들에게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등 나름대로 수준있는 복지정책을 제공한데다가, 부동산 개발 이익을 소수만이 독점하는 경우가 태반이던 기존 개발 방식에서 벗어나서 농민층들도 어느 정도 이득을 보는 방식으로 바꾸웠으며, 또한 국영기업을 효율적으로 잘 통제해서 부채 규모를 대폭 낮추고 생산성은 크게 늘려 경제성장률은 중국 내 최상위권을 기록했고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세입을 바탕으로 복지정책과 SOC 사업을 적극 펼쳐나갔다. 그래서 이를 충칭모델이라고 해서 중국 내에서든 중국 외에서든 간에 한때나마 엄청나게 주목받았고 그래서 중국 공산당이 기록 말살정책까지 펼쳐야 할 정도였다.

6. 관련 문서



[1] 9월 28일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의해 당적 박탈[2] 80~90년대 중국 공산당을 이끈 8명의 원로를 말하며 덩샤오핑, 前 국가주석 양상쿤, 역시 前 국가주석 리셴녠, 저우언라이의 아내이며 혁명의 여성 원로인 덩잉차오 등이 포함된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니 보이보의 위상을 알 수 있다.[3] 8대 원로는 사람에 따라 조금식 다르게 말해지기도 하는데, 보이보는 덩샤오핑, 양상쿤, 천원 등과 함께 어떻게 따져도 8대 원로에 반드시 포함되는 거물이었다.[4] 태자당과 대비되는 파벌로 공청단, 상하이방파가 있으며, 前 주석이었던 후진타오장쩌민은 각각 공청단, 상하이방이다. 후계 주석으로 낙점된 시진핑은 태자당에 속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한 인물이 양쪽에 걸쳐 있기도 하다. 위의 구분과는 별도로 공산당 지도급 인사들 상호 간의 관계는 천차만별이라서 체계를 갖춘 정파보다는 인맥에 바탕한 느슨한 연대 정도로 보는 게 좋다.[5] 차라리 두려움에 제 한 몸 살고자 연극으로서, 생존 수단으로 그랬다면 정당화라도 되련만, 이 시기 홍위병 엘리트들은 그래도 이런 미친 짓거리를 막으려고 시도를 할 정도의 양심과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이런 패륜 직후에 앞장서서 다른 '반동' 출신 홍위병들을 공격했다. 미친 거다.[6] 그러나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히면 가족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일부러 다른 가족을 보호하려고 오버했다는 말도 있다. 예를 들어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박해를 견디다 못해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홍위병들이 건물 밖으로 내던졌다는 설도 있다.) 평생 불구자로 지낸 것을 봐도, 차라리 홍위병에 가담해서 아버지를 팬 게 오히려 보신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7] 보이보의 비서와 간통으로 얻은 아들이다. 보이보는 멀쩡한 전처와 이혼하고 바로 비서와 결혼했다.[8] 문화대혁명 당시 대학은 문을 닫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나고서야 제대로 입학생을 모집한다.[9] 이튼, 윈체스터와 함께 영국의 상류사회 자제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친교를 쌓는 최고 명문 사립기숙학교다.[10] 젊었을때 홍위병 활동을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젊었을때 홍위병 활동을 한 사람은 많기때문에 보시라이가 마냥 특별하다고 볼수는 없었다.[11] 그러나 전국 단위 국영방송이나 타 지역 위성 방송에서 틀어주는 광고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12] 실제로 저런 상태에서 외국 현지공관에서의 현지인의 망명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과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외교 관례상 허용되는 일이 아니다. 예외적으로 1989년 천안문 6.4 항쟁때 미국 대사관으로 도피한 이들은 미국과의 교섭 끝에 국외 추방 형식으로 망명을 허가했다. 이 경우는 인권 문제이기 때문에 부각될수록 중국이 불리해서 그렇게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견해가 많다. 왕리쥔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자국 내에서 범법 의혹을 받고 있는 입장상 해당 망명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정말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셈. 망명 항목 참조.[13] 한국의 국가정보원 같은 기관이다.[14] 중국에서는 부패정도가 일정 액수를 넘으면 사형선고를 한다.[15] 사실 하버드대 같은 경우는 세계 각국의 명문가 자제들은 입학이 일반인에 비해 매우 쉬운 편으로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학교 명예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 넣어주는 경우가 많다.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미국의 대학 입시가 꼭 한국보다 더 공정한 건 아니다. 아들 부시예일대를 학점 2.3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 입학했다.[16] 다만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군의 중국내 정치적 입김이 강하다는게 아니다. 중국 공산당의 군에 대한 통제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막강하고, 공산당 내의 부패와 세습이 군을 제멋대로 흔드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북경군구의 진압거부도 군에서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했다기 보단, 효율적 진압작전을 위해서였다. 천안문 사태 당시 군 통수권자는 엄연히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덩샤오핑이었다.[17] 영문 위키와 중국어 위키에도 정확한 출생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아는 위키러가 추가바람. 다만 1998년 구카이라이의 압력으로 다롄 방송국에서 해고된 뒤 완벽하게 행방불명된 것은 분명하다.[18]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4년 7월 20일 방영분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19] 해당 시신은 용모를 알아볼 수 없는 박피 시신이라 비슷하다는 주장도 주관적이고 불확실하며, 임신했다는 것 자체도 단지 소문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다. 일단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고, 추가 증인도 나오지 않고 있다.[20] 즉 수감 중 별다른 사고를 안치면 자동적으로 2년 후 무기나 장기징역으로 감형하는 것.[21] "김용옥은 대만에서 공부한 대만파인데 중국 본토 정치를 어찌저리 잘 아는 건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는데, 김용옥은 2010년부터 중국 대학에 자주 특강을 나가고 있다. 대만의 국어와 대륙의 보통화는 본질상 같기 때문에 중국어로 문제없이 강연한다. 당연히 현지에서 여러 관계자들과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여러 문서를 보면서 많은 정보를 습득했을 것이다.[22] 엷을 박(薄)의 반대가 두터울 후(厚)[23] 쉬밍회장은 2015년 12월 수감 도중 사망한다.[24] 국가에 노동자로 등록되어 국영기업(전체 기업의 80%)에 소속된 인민에게는 웬만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공하지 않는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이 제공된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개발 과정에서 도시로 올라온 농촌 출신 노동자들은 국가에는 농민으로 등록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사회보장 혜택에서 제외되며 소속도 좆소기업영세개인기업에 소속되어 저임금과 낮은 생활수준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이를 농민공이라 한다.